“……몇 달 전부터였습니다. 마을 족장 놈들이 눈족에게서 ‘검은 안개’를 어마어마하게 사들이고 있습니다. 찍찍!”
들쥐가 그사이 핼쑥해진 얼굴로 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조롱이가 탕, 책상을 치며 반박했다.
“마을 인간들의 족장은 오늘 죽었는데여? 하루 종일 장례를 치르는 걸 보고 왔어엽.”
“맞로라! 맞로라!”
“들쥐는 거짓말을 하는 거예여, 주인님!”
조롱이가 들쥐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눈을 허옇게 치켜뜨고 제 주인에게 일렀다.
그 옆에서 나비 아저씨가 “로라로라, 맞로라!” 하고, 굳세게 맞장구를 쳤다. 들쥐가 당황한 얼굴로 찍찍 울었다.
이예주는 조롱이의 말을 토대로 아까 거리에서 보았던 상여를 실은 수레를 떠올렸다. 역시 족장의 장례를 치르는 거였구나.
그렇지만 마을 족장은 시간족도 아니고, 람이랑 계약도 했다며?
족장이 람과의 계약으로 수명을 늘렸기 때문에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소리를 나비 아저씨에게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그녀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충성스러운 두 부하의 말을 전해 들은 람이 가늘게 뜬 눈으로 들쥐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찍찍! 저, 정확히는 족장의 아들놈입니다!”
들쥐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덧붙였다.
“족장의 말더듬이 아들놈이, 마을 지주들과 결탁하여 눈족 장로들에게서 검은 안개를 마구마구 사들이고 있습니다, 주인님! 찍찍!”
“마을 족장은 왜 죽은 거지? 나와 계약한 인간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글쎄 말입니다. 찍, 벼, 병이라도 걸렸나…… 찍찍.”
람의 질문에 들쥐가 애매하게 웃으며 툭 튀어나온 앞니를 긁적였다.
그 때문에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던 그의 콧수염이 미미하게 움직이며 탁자 위를 쓸었다.
이예주는 그 모습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람 앞에서 저렇게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라니, 놈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은 비단 그녀만 한 것이 아닌지, 들쥐의 옆에 앉아 있던 나비 아저씨가 탁자를 ‘쾅!’ 내려치며 박력 넘치게 외쳤다.
“그 콧수염을 하나하나 뿌리째 뽑아 버리기 전에 똑바로 대답하로라!”
“찍! 아이고, 깜짝이야! 도둑고양이 주제에! 찍찍!”
무시무시한 나비 아저씨의 눈초리 아래, 들쥐가 입으로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목을 움츠리며 제 수염을 거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람에게 애절한 목소리를 내면서 소리쳤다.
“저, 저는 정말 족장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찌직! 저, 정말입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주인님! 그냥 갑자기 죽어 버렸는걸요! 찍찍. 사실 저도 늙은 족장이 갑자기 왜 죽어 버렸는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게다가 족장은 제 말더듬이 아들이 검은 안개를 사들이는 것조차 잘 모르던 눈치였거든요! 신인류들이 바치는 주거세로 지금까지 호의호식했으니 뭐 죽어도 여한이 없었겠지만…… 찍찍!”
“자금은.”
“예?”
“검은 안개를 사들이는 자금 얘기나 마저 하지.”
“에…… 그러니까…….”
람은 의외로 마을 족장의 의문사를 파고들지 않았다.
시간족이 아닌 일반 인간인 마을 족장, 람과의 계약, 검은 안개, 죽음…….
그녀의 머릿속으로 일련의 키워드들이 쭈욱 나열되었다.
람은 마을 족장과 무슨 계약을 했을까. 또 람에게서 수명을 대가로 받은 마을 족장은 갑자기 왜 죽어 버렸을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이예주 자신뿐인 것 같았다.
들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꽤 뜸을 들이던 놈의 표정이 제법 비장했다.
“그거야 마을 신인류들에게 걷는 세금을 쏟아부었겠지요. 처음에는 그 돈으로 검은 안개를 사들이고, 검은 안개에 중독이 된 멍청한 마을 인간들에게 몇 배의 돈을 받고 되팔다 보니 자금을 모으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천문학적인 액수가 족장 아들놈의 손에 떨어졌지요. 게다가 검은 안개가 시중에 암암리에 풀리면서 수요가 급증해 버렸습니다. 검은 안개를 한 번이라도 맛본 인간들은 빚을 내면서까지 그것을 사들였지요.”
“…….”
“지금 마을의 인간들 중 젊은 것들은 하나같이 검은 안개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죠, 찍찍. 낮에는 노예 생활을 하고 밤에는 검은 안개를 들이마시며 의미 없는 일생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완전히 맛이 간 것들이죠. 신인류들이 당장 전쟁을 일으켜도 피 하나 보지 않고 마을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찍.”
들쥐는 제가 이야기를 해 놓고도 웃긴지 말을 잠시 멈춘 후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들쥐의 말로 인해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도 들쥐의 웃음에 동조하지 않고 빤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 또한 멋쩍은지 금세 웃음을 그치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마을 신인류들은 전쟁을 일으킬 만한 자금이 없으니 계속해서 인간들에게 탈취당하며 살 수밖에요, 찍찍. 어쨌든 검은 안개를 사기 위해 인간들이 신인류들에게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시장의 흐름을 영 알지 못하는 멍청한 신인류들은 그저 이자를 받을 생각에 좋다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저기 토끼 그레이가 그런 경우입니다.”
들쥐는 때마침 주방에서 홀로 걸어 나오는 그레이 씨를 길쭉한 주둥이로 가리켰다.
그레이 씨가 들쥐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들쥐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던 건지 그레이 씨의 얼굴은 완연한 흙빛이었다.
그러나 들쥐는 그런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저는 요즘 세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신인류들을 부채질하는 일을 했습죠. 돈이 필요하지만 절대로 갚을 능력이 없는 중독된 인간들에게 돈을 빌려 주라고 말입니다, 찍찍. 마담 페니는 아무리 좋은 말을 흘려도 속지 않더군요! 약아 빠진 돼지 할망구 같으니라고…… 찍찍.”
“그래서.”
말이 딴 길로 새자 람이 무뚝뚝한 얼굴로 재촉했다.
들쥐가 고개를 흘끗 조아리며 계속해서 떠벌렸다.
“찍찍, 결국 돈을 갚지 못한 인간들은 그레이 같은 신인류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법은 노예도 사유 재산으로 치지 않습니까? 찍찍, 재산이 늘면 그만큼 내는 세금도 높아지기 마련이지요! 정당한 이유를 대고 세금 폭탄을 때리면 그레이든, 마담 페니든 손쓸 틈도 없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낼 돈은 없는데, 검은 안개에 중독되어 맛이 간 노예는 팔리지도 않고, 게다가 세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니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면 저는 그때 다시 인간 채권자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죠!”
“…….”
모두의 침묵 속에서 들쥐가 신이 난 목소리로 연달아 떠들어 댔다.
“돈에 쪼들린 신인류는 낮은 이자란 소리에 앞뒤 잴 것 없이 돈을 빌리고 봅니다. 하지만 그 돈은 다 족장 아들놈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입지요, 찍찍. 생활력 강한 신인류들은 이자부터 갚기 시작하지만, 워낙 원금이 크니 기한 내에 갚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채권자였다가 하루아침에 채무자로, 그렇게 계속해서 악순환을 반복하며 족장 아들놈의 돈을 불려 주는 겁니다, 찍! 저는 그 중간에서 얼마 정도 떨어지는 돈을 받아 챙긴 죄밖에 없습니다, 주인님! 찍찍!”
“그래서 내 아이들은! 처음부터 갚지 못할 돈을 빌려 준 것이란 말이냐! 이런 쳐 죽일 놈! 내 아이들을 어쨌어! 내 아이들을!”
불현듯 그레이 씨가 와락 들쥐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찍찍! 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찍, 찍!”
“내 아내의 말처럼 나도 맡았어! 뒷산에서 인간들의 냄새와 네 더러운 풋내를 맡았다고! 기한 내에 이자를 못 내서 대신 내 아이들을 데려간 것인가! 내 아이들 어쨌어! 내 산쵸와 칸쵸를 어쨌냐고!”
“찍찍! 이거 놓고 말하게! 놔, 놔……!”
들쥐가 그레이 씨의 손아귀에 잡혀 정신없이 흔들렸다.
들쥐의 멱살을 잡고 고함치는 그레이 씨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살기가 그득 뿜어져 나왔다.
아까 전 부인을 달래며 점잖은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던 모습과는 판이했다.
“내 아이들을 내놔, 이 쥐새끼야! 내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켁, 케켁!”
이성을 잃은 듯 그레이 씨가 상스러운 욕까지 내뱉으며 들쥐의 목을 졸랐다.
들쥐가 대가리를 흔들며 켁켁거렸다.
저 순박해 보이는 토끼 귀를 달고 어디서 저렇게 악이 쏟아져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란 저런 것일까.
들쥐의 목을 조르는 그레이 씨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이예주는 덩달아 숨을 멈췄다.
목젖이 잡아 뜯길 만큼 잡힌 탓에 들쥐의 눈에 핏발이 섰다.
보다 못한 나비 아저씨가 “진정하로라, 토끼!” 하고 나서서 그레이 씨를 떼어 내고 나서야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어찌나 세게 쥐여 있었는지 들쥐의 털 밑에 있는 회갈색 살이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벌겋게 부었다.
제 목을 부여잡고 연신 잔기침을 내뱉던 들쥐가 헉헉 숨을 고르며 그레이 씨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켁, 켁! 이런 제기랄! 찍찍! 자네가 이렇게 경우 없이 구니 멍청하게 당하고 사는 거야, 찍! 딸린 새끼들이란 새끼들은 싹 다 잡아 오란 것을 내 자네와의 인연을 생각하여 산티와 갓 태어난 핏덩이만은 내버려 두었거늘!”
“뭐야! 저 망할 쥐새끼가……!”
“그만! 그만하로라!”
그레이 씨가 분을 못 참고 다시 들쥐에게 달려들자, 나비 아저씨가 재빨리 끌어안으며 그의 시야에서 들쥐를 차단했다.
그레이 씨가 머리에 달린 토끼 귀를 미친 듯이 흔들며 쌍둥이들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그러게, 누가 인간들을 믿으라고 했나? 찍찍! 돈 좀 더 벌어 보겠다고 욕심내서 인간에게 돈을 빌려 준 것은 자네야! 또 인간에게 갚지도 못할 돈을 빌린 것도 자네고! 찍찍. 나는 알선만 주도했을 뿐, 나머지는 다 자네가 결정한 게 아닌가!”
“그 입 닥쳐라.”
목이 졸렸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쥐새끼를 조용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역시나 람뿐이었다.
남자의 한마디에 보이지 않은 힘이라도 실린 것처럼 들쥐의 열린 입이 ‘헙’ 하고 닫혔다.
“한마디만 더하면 대가리만 남겨 놓고 모조리 찢어발겨 주마. 어차피 네게 필요한 것은 들을 수 있는 정보뿐이니 쓸데없는 몸뚱이야 없어도 그만이겠지.”
“찍찍. 주, 주인님…….”
살벌한 람의 말에 들쥐가 곧바로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레이 씨를 바라보며 깐족대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람이 표정이랄 것이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딱딱하게 들쥐의 죄를 읊었다.
“결국 토끼 자매의 실종이 너와 관련된 것이 확실해진 셈이군. 네 입으로 실토했으니 네 죄는 이제 명실상부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주인님! 찍찍! 그, 그것이 아니라!”
“그만하고 검은 안개와 마을 족장의 아들에 대해서나 마저 말해여.”
들쥐가 람에게 채 변명을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말투가 그 야비한 목소리를 갈랐다.
들쥐가 까만 동공을 굴려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살피듯 눈을 양옆으로 쭉 찢은 채 황조롱이를 샅샅이 훑어보던 놈이 갑작스레 번뜩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어린 황조롱이로군, 그래! 족장에게 저주를 내린 어린 황조롱이! 찍찍! 너무 시간이 지나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않은가! 2차 전쟁 때 족장의 저택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난 이후로 마을엔 처음 오는 것이지? 아니! 세상에나, 이, 이쪽은 인간이 아닌가! 흐억! 이, 인간이 여기에 있다니! 찍찍!”
이제야 조롱이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들쥐가 호들갑을 떨며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괴상한 생명체 바라보듯 하는 들쥐의 행동에 이예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씰룩거리는 얼굴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들쥐 놈은 계속해서 기분 나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
“우리 누나한테 신경 꺼여.”
조롱이가 이예주를 시야에서 슬쩍 가리며 들쥐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그녀는 조롱이에게 조금 감동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숨을 집어삼키며 괴상한 소리를 찍찍대는 들쥐의 반응뿐이었다.
“히익! 찍! 우리, 우리 누나! 엘로, 네 누이는 몇십 년 전 잡아먹혔지 않느냐! 그런데 이, 이, 인간 여자가 네 누나라니! 찍찍찍! 이런 인간 따위가 어딜 봐서 네 누이란 것이냐? 주인님, 새로이 키우는 인간 노예입니까? 이런, 이, 이런 걸 데리고 다니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으실 텐데요. 특히나 시간족 놈들이 이런 대체품을 만들려고 들 텐데 그럼 또 수요가 바뀔 테고…….”
“예주 누나는 노예 아니에여!”
이예주가 채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에 황조롱이가 먼저 말을 가로채어 소리 질렀다.
맞로라! 맞로라! 옆에서 나비 아저씨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롱이의 말에 동참했다.
이예주는 들쥐 새끼의 말에 화가 치솟다가도,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황조롱이와 나비 아저씨의 행동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호한 황조롱이의 부정에도 들쥐는 여전히 음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주둥이를 열었다.
“찍, 찌직. 그럼 이 인간 노예는 왜 데리고 다니는 것이지? 게다가 사, 사슬까지 묶어 놓고, 찍찍! 오호, 신체를 자르지 않은 이상 끊을 수 없는 검독수리 발톱으로 만든 사슬이잖아! 찍찍, 어지간히도 도망을 많이 치는 인간이로군. 저런 것으로 묶어 놓은 것을 보니…….”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쥐새끼가 자꾸 누구보고 인간 노예래?!”
이예주가 결국 폭발했다.
쾅 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자, 옆에서 조롱이도 똑같이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