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9)화 (1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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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람이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나비는 어디선가 밧줄을 구해 와 들쥐를 꽁꽁 묶었다. 

아까 당한 게 있어서인지 들쥐는 간악한 눈을 부라릴지언정, 더 이상 나비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고구마 당과도 있로라?”

자리에 앉자마자 나비 아저씨 또한 조롱이의 전철을 밟아 가며 당과부터 찾았다. 

아까 전 들쥐를 쥐 잡듯이 잡아 대던 모습이 떠올라 새삼 그가 낯설게만 보였다. 

“고구마 당과가 맛있다고 언질을 준 건 바로 나인데, 어떻게 말도 없이 혼자 먹을 수가 있로라? 이례주, 치사하로라. 홍홍!”

“하도 무섭게 쥐 잡이를 해서 줄 틈도 없었거든요.”

“크, 큼…….”

나비 아저씨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이예주는 불퉁한 얼굴로 봉지에서 고구마 당과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홍홍 거리면서 그녀가 내준 당과를 맛있게도 씹어 먹었다.

때마침 그레이 씨가 요상한 냄새를 풍기는 요리들이 한가득 담긴 접시들을 들고 왔다. 

그 뒤를 물병을 든 그레이 씨의 아들 산티가, 또 그 뒤를 아까 본 말 꼬리 청년이 이었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말 꼬리를 씰룩씰룩 뒤흔들며 능숙하게 두 손으로 접시를 들고 오는 폼이 종업원이었던 듯싶다. 

금세 탁자 위로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팔족 족장 저택에서의 석연치 않았던 만찬 이후, 제대로 된 식사는 거의 처음과도 같았던 이예주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접시들을 훑었다. 

그러나 채 1분도 되지 않아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지만, 정갈한 음식들이 담겨 있는 접시 위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고기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풀만 무성할 뿐.

깍둑썰기로 썬 당근, 양파, 고구마, 감자 따위를 볶은 요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채소를 튀긴 요리들뿐이었다. 

심지어 음식 위에 끼얹어 놓은 양념도 자극적인 것은 없는지 모두 옅어 빠진 색이었다. 

한데 대체 무슨 기름을 썼는지 튀김 색깔이 군침이 도는 노오란 빛이 아니라, 그레이 씨의 귀와 비슷한 회색빛이 돌았다. 

식욕이 뚝 떨어지는 색이었다. 

갖가지 채소들 중에서는 이예주의 눈에 익은 것들도 있었다. 

고사리와 콩나물, 시금치 그리고 브로콜리 위로 우유보다 더 옅은 희멀건 빛의 정체불명인 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다. 

브로콜리는 그렇다 쳐도 왜 고사리랑 콩나물을 이런 식으로 먹는 거지? 

그나마 먹을 만한 건 하얗고 커다란 버섯에 굵은 소금을 쳐서 구워 놓은 것뿐이었다.

“고기는 없네…….”

이예주가 울먹이며 고기 타령을 하자 황조롱이가 짐짓 어른스러운 체하며 그녀를 타일렀다. 

“토끼네는 채식주의자니까여. 그래두 콩으로 만든 고기 같은 건 있는데여? 요기.”

“여기 인간들의 주식인 쌀도 있습니다.”

이예주의 앞에 쌀밥이 가득 담긴 대접을 내려놓으며 그레이 씨가 거들었다. 

하지만 그 쌀밥마저 대체 어느 품종인 건지 한국에서 먹던 동글동글하고 모양 예쁜 쌀알이 아닌, 후 불면 후루루 날아갈 것만 같은 길쭉하고 얇은 쌀이었다. 

자고로 쌀밥이란 찰지고 쫀득한 맛으로 먹는 것이건만! 

좋지 않은 얼굴로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등을 바라보며 그녀는 지극히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 보았다.

“……혹시 고추장 같은 건 없겠죠?” 

“고투더장? 그게 뭡니까? 없습니다.”

아주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고투더장이라고 바꿔 말할 것까지야. 

푸근하고 통통한 손으로 마저 들고 온 접시를 내려놓으며 냉정하리만치 딱 잘라 없다고 말하는 그레이 씨 때문에 그녀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런 이예주를 보며 조롱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꼬춘장이 뭔데여?”

“있어, 그런 게.”

“먹지.”

람이 먼저 수저를 들자, 나비 아저씨와 황조롱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그릇에 달라붙었다. 

물론 밧줄로 묶여 있는 들쥐는 침만 질질 흘릴 뿐, 먹을 수 없었다. 

그레이 씨와 말 꼬리 사내는 일행이 밥을 다 먹을 동안 잔시중을 들을 예정인지, 탁자에서 약간 떨어진 상태로 공손히 서 있었다. 허름한 주점에 어울리지 않은 고급 서비스였다. 

람조차 내색 않고 밥을 먹기 시작하자 이예주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들어 밥을 푹 펐다가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밥알이 푸자마자 모래알처럼 우수수수 떨어졌기 때문이다. 

천만다행히도 밥맛은 일반 쌀밥 맛이었다. 

퍼석거리는 것을 제외하곤 그나마 먹을 만했다. 

그러나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반찬들이 놓여 있었으나, 이상한 색깔로 버무려진 반찬들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특히나 그녀의 밥그릇 근처에 놓인 회색빛의 튀김에는 더더욱. 

그녀는 결국 버섯 구이 하나만 두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수북이 담겨 있는 그녀의 밥 위로 희멀건 양념을 뒤집어쓴 브로콜리가 쑤욱 올려졌다. 

브로콜리라고는 가끔 반찬 없을 때 사다가 대충 삶아서 초장에 찍어 먹어 본 적밖에 없던 이예주는 그 괴상한 모양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조롱이밖에 없을 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시뻘건 눈동자였다.

“어린것이.”

“…….”

“편식하지 말고 먹도록. 그래야 쑥쑥 큰다.”

아니, 대체 어리긴 누가 어리단 말이야! 

남자의 말에 불쑥 반감이 치밀어 올라 그녀가 입을 삐쭉거렸다.

“저 이미 클 만큼 컸거든요? 어리긴 누가 어려…….”

이예주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좀 괜찮은 것 같기도. 아니, 조금 좋은 것 같기도……. 

그러니까 지금 나 챙겨 준 거지? 맞지? 이거 착각 아니지? 

자꾸만 어린것 취급하는 남자에게 불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또 은근 챙겨 주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까처럼 입꼬리가 자꾸 근질거려 억지로 억누르던 그녀는, 제 손이 마음대로 긁적거리기 전에 남자가 올려 준 괴상한 모양새의 브로콜리와 함께 밥을 한 숟갈 크게 푹 떠먹었다. 

생각보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브로콜리 특유의 맛과 희멀건한 양념의 은은한 단맛이 입안에서 잘 어우러졌다. 

이예주는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와 같이 그릇에 코를 박고 와구와구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텅 빈 접시 그릇들을 그레이 씨와 그의 어린 아들, 말 꼬리 종업원이 차례차례 치워 나갔다. 

일행의 근처로 주춤주춤 다가와서 작은 키로 어렵사리 접시를 쌓던 산티가 쌓여 있는 당과 봉지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툭 치는 바람에 탁자 위로 당과 꼬치 몇 개가 투두둑 쏟아졌다. 

“당과!”

마침 다들 후식을 찾고 있던 차였기에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가 반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이예주가 쏜살같이 사수하려 들었지만 결국 거의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아오! 

얄밉게 웃으며 아삭아삭 당과를 씹어 먹는 두 명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던 그녀의 눈에 별안간 다른 모습이 들어왔다. 

수많은 당과 꾸러미들을 본 산티가 어린아이답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회색의 작은 토끼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앙증맞기 짝이 없어서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선뜻 말을 건넸다.

“……먹을래?”

가장 맛있었던 사과 당과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산티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당과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귀여운 모습이 심장을 타격하는 것 같아 이예주는 들고 있던 당과를 아래위로 흔들어 보였다. 

당과를 따라 산티의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도 움직였다. 

좋아, 거의 다 넘어왔어!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당과를 흔들어 보일 때였다.

“산티! 얼른 이리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벼락같은 음성이 이예주와 산티에게로 내리쳤다. 

머리 위로 삐죽 솟은 산티의 두 귀가 움찔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만큼 큰 고함 소리였다. 

허겁지겁 돌아보니 그레이 씨가 무서운 얼굴로 산티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채 붙잡기도 전에 산티가 “가, 가요, 아부지!” 하고 뛰어갔다. 

살집이 잡힌 푸근한 손으로 산티를 잡아채 서둘러 부엌 쪽으로 데리고 사라지며 그레이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어린 아들을 혼냈다.

“……인간에게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다고 했잖니!”

“말은 안 걸었어요, 아부지.”

그렇게 목소리 줄여도 다 들리거든요! 이예주가 입술을 씨근덕거리며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레이 씨는 그녀를 보고도 태연하게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다시 나왔다. 산티는 떼어 놓고 왔는지 나올 때는 혼자뿐이라 이예주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지금껏 말없이 묶인 채 몸을 사리고 있던 들쥐가 다시 나온 그레이 씨를 향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찍찍. 이봐, 그레이. 나, 나도 허기가 지는데. 남은 음식이라도 좀 나눠 줄 수 없겠는가, 찍.”

“배신자 따위에게 줄 음식은 없소.”

들쥐가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해 보이며 동정을 구했지만, 그레이 씨는 단호하게도 들쥐의 요청을 잘라 냈다. 

그러자 들쥐가 성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 계집에게도 밥을 주었지 않은가! 같은 신인류 동지보다 한낱 인간의 입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찍, 찍! 그렇게 인간에게는 장사 안 한다 어쩐다 그러더니, 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냐 이 말이야! 찍찍찍!”

아니, 저 쥐새끼가 왜 나를 걸고넘어지고 난리야? 

여태껏 들쥐에게 약간의 측은지심을 느끼던 이예주는 버릇없는 언행에 눈을 부릅 치켜떴다. 

한순간에 들쥐에 대한 동정심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찍, 찍! 나 그래도 1세대 신인류야! 비록 죽을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대우는 해 주어야 예의가 아닌가! 내 덕에 이렇게 마을에서 장사도 하고! 인간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고! 어? 지금껏 잘 살아왔으면서! 찍찍찍!”

들쥐가 벌건 얼굴로 씩씩댔다. 

이예주는 속으로 박수를 치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의 처지로 묶여 있는 주제에, 겁대가리 없이 놀리는 그 입이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때아닌 들쥐의 생떼에 그레이 씨가 난처한 얼굴로 람을 돌아보며 정중히 질문했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달라는 대로 줘라.”

의외로 람이 선선히 허락한 탓에 이예주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죄인에게 밥도 준다고? 1세대 신인류인지 뭔지가 그렇게 위대한 건가?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덧붙여지는 람의 말에 지나친 억측으로 전락했다.

“인간들에게는 사형 직전의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푸는 풍습이 있더군. 인간과 어울리며 인간에게 완전히 물들어 버린 놈이니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 줘야지.”

“허억, 찍!”

들쥐의 날카로운 숨을 들이켜며 얼어붙었다. 

역시 무서운 놈.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자를 바라보던 이예주의 눈에 약간의 두려움이 차올랐다.

들쥐에게 향해 있는 남자의 두 동공은 아직도 까맸다. 

분노했구나. 꽤 둔한 그녀도 느낄 만큼 남자에게서 예리한 살기가 피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했음에도 남자의 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꽤 당황했다. 

소멸시킨다는 말을 입에 담을 정도로 들쥐가 밉고 싫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들쥐를 향해 있는 그의 눈은 여전히 검다. 

그런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이예주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매번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동공이 온몸의 피가 몰리는 것처럼 붉어지던 것을 보아 왔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얼마나 화가 나고 죽이고 싶으면, 얼마나 분노하고 살기를 느끼면 저렇게 눈동자가 새빨개질까. 

그에 반해 인간이 아닌 여타 다른 생물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소리인가. 

이예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람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만도 한데, 어쩐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기쁘긴커녕 이 감정은 뭐랄까…… 

그래, 이 감정은 울적함과 우울함에 가까웠다.

쿵. 

람이 두 손을 깍지 낀 채 탁자 위를 내려친 탓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덕에 이예주 또한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고 그에게로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들쥐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런 들쥐를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흉흉한 기세로 주시하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살기 어린 두 눈과 다르게, 빨간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자. 이제 어디 한번 소멸되기 전, 마지막 대화나 나눠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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