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수족이 되어 마을의 신인류들에게 이율 높은 채무를 지게 하고 인간들의 노예화시키는 데 앞장섰다지.”
“허 헉……! 찌찍, 주, 주, 주인님……!”
이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들쥐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완전히 궁지에 몰린 쥐다웠다.
“주인님! 오, 오해십니다! 찍, 찍! 그,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주인님!”
“아쉽군. 넌 그나마 초기 신인류 중 하나이기에 사실대로 실토했다면 어느 정도 감안하고 넘어가 주었을 텐데.”
람이 전혀 아쉽지 않다는 말투로 이어 말했다.
“네 꼴을 봐라, 들쥐. 인간들과 붙어먹고 제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심취하여, 완벽하게 인간의 외형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네 강대한 힘을 모두 잃었다. 이젠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한낱 쓰레기가 되었군. 넌 계약을 위반했고 실패한 신인류다. 그러니 벌을 피해 갈 수 없지.”
“주,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찍! 잘못했습니다! 제가 미쳤나 봅니다! 잘못했습니다! 찍찍!”
람의 입에서 나온 ‘벌’이라는 말이 참 깜찍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비의 손에서 벗어난 들쥐가 람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움직임이었는지 눈 한 번 깜빡이고 나자 바닥에 엎드려 있는 들쥐가 보여 이예주는 깜짝 놀랐다.
들쥐는 무릎을 꿇고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까만 쥐 눈깔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마룻바닥을 적셨다.
벌이라는 소리에 대성통곡을 하며 잘못을 비는 들쥐를 보던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이라면 대체 얼마나 무서운 벌이기에 저렇게 벌벌 떠는 것이지?
손 들고 서 있기? 아니면 엎드려뻗쳐? 기마 자세?
남자가 말한 ‘벌’에 관해 통상적인 것들을 떠올리자니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람 몸에 쥐 대가리가 달린 생물이 사람들 많이 나다니는 거리 한복판에서 기마 자세를 하고 있는 것도 참 어이없는 일이리라.
물론 3000년대인 이곳에선 그렇게 어이없는 일만은 아니겠지만.
저 남자가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그런 유치한 벌을 내릴 리는 없을 테고.
앞잡이 노릇 정도의 중죄면 신인류의 힘을 도로 빼앗는 것?
줬다 뺏어 가면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이예주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람이 단호하게 벌의 기준을 뒤엎었다.
“소멸이다.”
컥. 무심결에 침을 삼키던 그녀는 람의 말에 사레들려 작게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찌, 찌직! 주, 주인님! 찍!”
들쥐가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표정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세상이 무너질 만도 하지.
현대로 따지자면 일수꾼 놀이를 하고 다닌 죄로 받는 벌이 사형이란 소리다.
“사, 사형…….”
이예주는 먼 나라 얘기처럼 잘 와 닿지 않은 사형을 멍하니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형 기준이 뭐였지? 살인같이 무서운 죄를 저질러야 하지 않나?
벌이 소멸이라니. 그러고 보니 저 남자와의 첫 만남에서 조롱이를 괴롭혔단 이유로 자신은 소멸감이었다.
정말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오는 헛소리였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소멸이란 말이 정말로 헛소리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예주는 아직도 용암 구덩이 속에 빠져 떨어지던 그 엄청난 속도감을 기억한다.
번쩍번쩍 내리치던 번개도, 모래로 3층 건물만 한 괴물을 미친 듯이 던져 대던 소름 끼치는 괴력도.
“안됐네여. 말만 잘하면 살 수도 있었는데. 멍청한 인간들이랑 다니다 보니까 들쥐도 머리가 굳었나 봐여. 그래도 신인류였으니, 지옥 불에 소멸은 아니구 머리가 뽑혀 죽으려나여? 쩝, 들쥐는 맛있는데.”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예주가 경악을 하고 옆을 바라보았다.
조롱이가 허옇게 질린 채 울먹울먹하는 들쥐를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생긴 거랑 다르게 소름 끼친다니까.
머리가 뽑혀 죽는다니. 그리고 들쥐는 맛있다니!
그러나 조롱이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는 나비 아저씨 덕에 이예주의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머리를 뽑기 전에 눈도 뽑아내는 게 좋을 것 같로라. 죄인에게는 과분한 시력이로라! 주인님, 들쥐에게 내리실 벌은 무엇이로라?”
믿었던 나비 아저씨 또한 눈 하나 깜짝 않고 진지한 어투로 벌의 방법에 대해 람에게 물었다.
그리고 들쥐의 끔찍한 형벌은 람의 입에서 정점을 찍었다.
“인간들의 밑에 붙어 같은 신인류들을 괴롭힌 것도 모자라 내게 거짓을 고했으니 죄질이 무겁다. 들쥐에게 부여한 신인류의 힘을 빼앗고, 산 채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황조롱이의 먹이로 주도록 하지.”
엄마야, 얘네 진짜 다 미쳤나 봐. 이예주는 남자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나 평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뱉는 그 얼굴에는 티끌 한 점의 농담조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하게 두려워졌다.
나, 너무 위험한 놈들과 같이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라도 그냥 도망갈까.
“주, 주, 주인님! 자, 잘못했습니다, 찍!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 제가 잠시 회까닥한 모양입니다, 주인님! 찍, 찍!”
들쥐가 미친 듯이 수염을 아래위로 휘저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나비 아저씨에게 야비한 목소리로 대들 땐 언제고, 물기가 가득 밴 눈망울이 사뭇 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람은 일말의 망설임도 남기지 않았다.
“나비, 찢어라.”
“이 자리에서 바로 찢로라?”
“그래. 황조롱이가 바로 먹을 수 있게 지금 찢어라.”
“아이고! 찍찍! 아이고오,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아이고오! 찍, 찌직!”
나비 아저씨가 지금껏 보지 못한 흉흉한 기세로 들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들쥐가 발악을 하며 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곧 우락부락한 나비 아저씨의 팔뚝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펑! 그와 동시에 조롱이가 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푸드덕푸드덕 황갈색의 새가 솟아오르자 들쥐가 “히이익, 찍찍!” 하고 괴성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다.
토끼 부인이 오열을 할 때보다 더한 난장판에 이예주는 머리가 아파 왔다.
이게 대체 무슨 아수라장이야.
“주인님! 찍, 찍!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버둥대지 말로라!”
“주인님! 주인님, 잠시만! 이, 이것 놔라! 주인님!”
나비보다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벗어난 들쥐가 날쌔게 바닥을 다시 기어 와 람의 발치에 납죽 엎드렸다.
그러고선 엉엉 울면서 하는 소리가 이것이었다.
“다, 다 불겠습니다! 찍, 찍! 그레이의 쌍둥이들이 누구에게 끌려간 건지 다 불겠습니다! 찍!”
“내가 고작 그런 것 하나 찾지 못해 너 따위에게 도움을 구할까. 웃기는군.”
람이 들쥐의 협상을 결렬했고, 새로 변한 황조롱이가 옆에서 떽떽거렸다.
“빨리 찢어엽! 빨리 찢어엽!”
나비 아저씨가 다시 바지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들쥐의 꼬리를 거세게 잡아챘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들쥐가 이것저것 손에 치이는 것들을 부여잡으며 버텼지만 별수 없었다.
되레 버티려다가 부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나비 아저씨의 손에 털이 한 줌이나 뽑혔다.
“끄아아아악!”
들쥐가 듣는 사람도 괴로울 만큼 초고주파의 비명을 질렀다.
이예주 또한 끔찍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저리를 쳤다.
손안에 한가득인 회갈색의 털을 본 나비 아저씨가 “에비, 더럽로라!” 하고 곧바로 손을 털었다.
빳빳한 쥐 털들이 하늘하늘 공중으로 휘날리고, 그는 다시 쥐꼬리를 휘어잡았다.
바닥 위로 손톱자국을 주욱 남기며 질질 끌려가는 들쥐가 처절하기까지 했다.
평소 맘에 들지 않는 부위였는지, 나비 아저씨가 들쥐의 등에 한 발을 대고 가장 먼저 그의 꼬리를 잡아당기려던 때였다.
“거, 검은 안개!”
들쥐가 피를 쏟아 내듯 쉬어 터진 목소리로 악을 질렀다.
“족장의 측근들이 요즘 검은 안개를 사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검은 안개라는 소리에 꼬리부터 뽑으려던 나비 아저씨도, 공중에서 푸드덕거리며 날갯짓을 하던 황조롱이도, 무미건조한 얼굴로 들쥐를 내려다보던 람도 멈칫했다.
이예주는 오래간만에 접한 낯설지 않은 단어에 저도 모르게 람을 돌아보았다.
들쥐를 바라보는 람의 두 동공은 검은색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색 동공, 그리고 검은 안개.
시간족들이 뜯어 먹어 버린 검은 파편의 검은 안개.
들쥐의 검은 안개 소리에 람은 팔을 들어 팔짱을 꼈다.
그 와중에도 이예주를 묶어 놓은 사슬을 잊지 않고 꾸역꾸역 들고 있던 탓에 ‘쩔컹!’ 하고 사슬이 쇳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따라 위로 솟았다.
조금은 들쥐의 말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남자의 태도에 이예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람은 정말 검은 파편인지 뭔지, 그 동화 속 신 같은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면 밤하늘처럼 검게 빛나던 그의 두 동공은, 그의 검은 안개를 빼앗아 먹어 버린 인간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시뻘겋게 물들어 버린 걸까?
그녀가 람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살펴보는 사이, 그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비릿하게 웃었다.
“검은 안개라……. 신인류들에게서 걷는 주거세로는 검은 안개를 사들일 자금을 충당하기 어려울 텐데.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찍찍, 그, 그것까지는 저도 잘은…….”
들쥐가 안쓰러운 얼굴로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러자 람이 나지막이 나비 아저씨를 불렀다.
“나비.”
“바로 꼬리부터 잡아 뽑겠로라!”
“아, 아악! 자금은 세금! 신인류에게서 걷는 주거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거나 이유를 갖다 붙여 신인류에게 세금 폭탄을 때리는 것입죠, 주인님! 찍, 찍!”
별로 잡아당긴 것 같지도 않은데 몇 분 전, 털이 한 줌 뽑힌 탓인지 들쥐가 비명을 지르며 곧바로 실토했다.
“이제 좀 대화를 할 생각이 드나 보군.”
람의 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
미치도록 잘생긴 얼굴임에도 이예주는 살이 다 떨렸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기만 하는 들쥐를 보니, 남자와의 세 번째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도 저런 식으로 협박을 당하곤 했지.
후드가 잡힌 채 건물 2층 높이의 나무 위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던 그때의 심정이란.
정말 없는 말도 지어낼 정도로 속이 타들어 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던 시간이었다.
들쥐가 뚝뚝 눈물방울을 흘리며 체념조로 애원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찍찍!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주인님!”
“주인님, 어떻게 하로라?”
“잠깐 자리에 앉혀라.”
나비 아저씨는 정말로 훌륭한 부하였다.
람의 한마디에 이예주보다 약간 더 작은 들쥐는 그의 손에 덜렁 들려 아까처럼 배려 없이 쿵, 의자 위로 던져졌다.
“앉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람이 좌중을 향해 명령했고, 그녀같이 얼이 빠져 있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 명령을 이행했다.
치오르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는 그녀의 옆에서 ‘펑!’ 하는 커다란 소음과 함께 조롱이가 다시 벌거벗은 인간 모습으로 변했다.
꺅, 이예주가 눈을 가린 틈에 조롱이는 재빠른 솜씨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누나, 이제 됐으니까 앉아여.”
조롱이가 이예주를 툭 치며 말했다.
그녀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람의 옆자리에 앉으며 황조롱이에게 속삭였다.
“야…… 네 주인 말 한번 살벌하게 한다. 나 진짜 저 쥐 죽이는 줄 알았잖아.”
정말 장난 아니었다.
소멸이라느니 어쩌니, 진짜로 눈앞에서 살인, 아니 살생 나는 줄 알고 내심 달달 떨었다.
그녀는 그것이 다 들쥐를 심문하기 위한 하나의 연기에 불과함을 알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러나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듯 돌아오는 조롱이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진짜로 죽이지, 가짜로 죽이는 것도 있어여?”
“……응?”
“배신은 소멸이에여! 들었잖아여, 주인님께서 ‘잠깐’ 자리에 앉히라고 하신 거여. ‘잠깐’이 지나면 곧 다시 죽을 목숨이에여. 어차피 소멸될 거 그냥 빨리 죽지, 왜 자꾸 토는 달구 그런대.”
그러면서 조롱이는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덧붙였다.
“씨잉, 아깝다. 오랜만에 들쥐 먹는다고 신났는데. 굶주린 인간들이 들쥐 같은 작은 동물들을 깡그리 잡아먹어 대서 이제 설치류는 거의 멸종된 거나 마찬가지거든여.”
조롱이가 또 한 번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예주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3000년대 미래에는 정말 미친놈들 천지인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