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7)화 (98/319)

신인류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인간을 감싸는 주인의 행동에 그레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분께서는…….”

그레이가 주인의 뒤에 숨은 꼴이 되어 버린 인간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며 의중을 물었으나, 람은 이예주에 대한 설명은 않고 재차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네 식솔부터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군.”

“주인님, 그렇지만 요즘 제 아내가 인간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는 탓에 인간은…….”

“그만.”

더 이상의 변명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람이 짧게 그레이의 말을 막았다. 

굳은 얼굴로 잠시 서 있던 그레이 씨는 이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람의 명령에 수긍했다.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급하게 객실을 비워 두었습니다. 일단 자리에 먼저 앉으시지요. 곧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가씨께도 실례를 저질러 미안합니다.”

람에게만 인사를 했어도 되었는데 괜히 그의 뒤에 있다가 덩달아 사과를 받은 이예주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정중하게 허리까지 굽혀 사과를 전한 그레이 씨는 바닥에 실신하듯 엎어져 있는 그의 부인을 힘들게 일으켜 세우고는 위층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산티가 코를 훌쩍이며 쫓아갔다. 

우울한 토끼 가족이 사라지자 얼어붙었던 내부 공기가 다소 풀어졌다. 

이예주는 긴장하여 몸에 잔뜩 준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여전히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늘어져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앉아.”

남자가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끌어당겨 의자에 앉혀 주었다. 

이예주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반항 한 번 못하고 자리에 고이 앉았다. 

떨어져 있는 사슬 끝을 주워 올리며 남자가 수갑이 채워져 있는 이예주의 오른쪽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갑자기 옆에 앉은 남자가 의식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방금 전, 나 감싸 준 거 맞지? 

감싸 주고, 또 그레이 부인에게서 지켜 주고……. 

그녀가 왠지 발그레해진 얼굴로 당과와 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당과도 사 주고. 오늘따라 이 남자 왜 이래? 왜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어느덧 남자의 하얀 얼굴에 못 박힌 이예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매일같이 얄미운 소리만 하는 것치고는 입술도 빨가니 예쁘고. 아까부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께가 꼭 깃털로 살살 간질이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수백 마리의 개미가 피부 위를 꼬물꼬물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온몸이 근질근질 거리는 기분에 이예주가 ‘으으으’ 하고 잠시 몸을 떨었다. 

자꾸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꼬리 근처가 간지러웠다. 

토끼 부인으로 인해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표정이 봄바람 일듯 해사하게 풀어질 때였다. 

털썩, 왼쪽에서도 누군가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토끼 부인의 소란으로 인해 자신과 같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조롱이가 옆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쏟아져 있는 당과 봉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웃을 듯 말듯 말랑거리던 이예주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오! 고구마도 있네여!”

황조롱이는 고구마뿐만 아니라 당근, 사과 그리고 다른 꼬치들마저 한가득 손에 쥐더니 여러 꼬치들을 한 번에 입으로 가져가려 들었다. 

이예주가 기함했다. 

나도 아까워서 아껴 먹고 있건만, 이게!

“야! 하나씩 하나씩 아껴 먹어!”

“뭐 어때여? 어떻게 먹든 먹는 건 다 똑같잖아여.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단 말이에여.”

“절대 안 돼. 이게 어떻게 얻은 당과인데!” 

그럼, 그럼! 목숨과 바꾼 당과다. 게다가 네 주인이 몇 개월간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처음 사 준 것!

“한 번에 먹으면 어디가 덧나여!”

“그럼! 덧나지! 그리고! 사과는 다 내 거야.”

이예주는 꼬치들이 잔뜩 들린 황조롱이의 손에서 어렵지 않게 사과 꼬치를 빼내어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동글동글 예쁜 사과가 순식간에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치사 똥구멍!”

황조롱이가 쪼잔하다니 뭐니 구시렁거리다가 결국 이예주와 같이 꼬치에 꽂힌 당과를 하나씩 빼어 먹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여상한 얼굴로 당과를 씹어 먹던 이예주는 문득 볼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시뻘건 눈동자의 남자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 이런 한심한 것이 다 있느냐는 듯한 그 따가운 눈초리에 그녀는 괜히 민망해져서 먹던 당과를 봉지 위에 내려놓으려 했다. 

한데 괜한 오기가 솟아 다른 꼬치까지 꺼내 들었다. 

볼이 미어터져라 열심히 우물우물 먹고 있는데,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가슴이 지레 찔린 이예주가 별수 없이 먼저 선수를 쳤다.

“왜요? 왜 그렇게 보는데요?”

“너는…….”

남자가 이예주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떼다가 푸욱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칫, 잔뜩 먹고 사 달라고 하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입을 삐죽거리던 그녀는 불현듯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넌지시 말을 던졌다.

“저기, 그런데 있잖아요.”

“…….”

“저 여기 나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남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이예주는 방금 전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토끼 가족과 신인류들을 떠올렸다. 

그레이 씨는 주점에 인간들을 받지 않는다고 람에게 이야기하려 들었다. 

그녀를 막아선 람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쫓겨났을 터였다.

아직도 핏발이 숭숭하게 선 채 자신을 바라보며 울부짖던 토끼 부인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것은 새끼를 잃고 제정신이 아닌 어미의 눈이었다. 

자식 한 명이 없어져도 미쳐 버릴 것 같은 심정일 텐데, 한 명도 아닌 쌍둥이 두 명을 모두 다. 

물론 이예주라고 근거 없는 유괴범 취급이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아이가 없어진 심정을, 연애도 제대로 못해 본 자신이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절박하게 일그러진 그레이 부부를 생각하며 그녀는 울적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냥요. 여긴 저를 환영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편하니까 차라리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길거리에서 노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예주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녀가 펄쩍 뛰며 강력히 거부했다.

“아니요! 노숙은 무슨!”

“그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먹던 거나 마저 먹지.”

허. 이예주는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 또한 능력으로 인해 좁은 선택지의 삶을 살아오느라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 오랜 생각을 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지만, 이 남자는 자신보다 더했다. 

거참, 세상에 흑백만 있다고 우겨 댈 인간일세. 

어떻게 이곳에 있거나 노숙을 하거나 둘밖엔 답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가 있지?

“노숙 말고 다른 답은 없어요? 예를 들면 다른 주점을 찾아본다든지요.”

하지만 그녀의 간절함이 담긴 말은 남자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대답 따윈 들려주지 않는 남자로 인해 안달복달하던 이예주는 꽤 한참이 지나서야 제가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왜! 왜 노숙 말고 답은 없는 건데! 부아가 치밀어 오른 그녀가 전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또 다른 방법을 찾으려던 그때였다.

쾅! 

정적을 깨부수듯 별안간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익숙한 인물이 힘차게 등장했다

“왔로라!” 

주점 내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확 쏠렸다. 

커다란 덩치의 나비가 위풍당당한 모양새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어린아이 들듯 옆구리에 가볍게 누군가를 끼고 있었다. 

“이, 이거 놔라! 찍! 이거 놓으래도, 찍찍!”

옆구리에 철썩 끼어 있는 작은 인영이 애처롭게 공중에 팔다리를 휘저어 댔지만, 힘줄이 부득부득 솟은 나비의 팔뚝에 짓눌려 금방 ‘켁!’ 하고 늘어졌다. 

그사이 람과 이예주가 앉아 있는 탁자까지 당도한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들쥐를 데려왔로라!”

이예주는 나비 아저씨의 말에 그제야 그의 팔에 짓눌려 캑캑대고 있는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들쥐라고 하더니, 정말로 설치류 신인류인 듯 인간의 몸에 쥐 대가리가 붙어 있었다. 

나비 아저씨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릴 때마다 코에 달린 길쭉한 수염이 흔들렸다. 

이예주는 순간 제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다시 봐도 멀쩡한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의 몸에 머리만 쥐인 모습이었다. 그것도 인간의 평균 머리 크기만 한. 

헐, 진짜 쥐 대가리잖아. 

팔족 땅에서 대왕 바퀴벌레를 만났던 때 느꼈던 끔찍함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조롱이가 순진한 눈동자로 “왜 그래여, 누나? 쥐 처음 봐여?” 하고 물었지만, 그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쫘악 소름이 돋았다. 

“오랜만이군, 들쥐.”

람은 버둥거리는 쥐가 징그럽지도 않은지 태평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털을 날려 대던 들쥐가 단박에 움직임을 멈추고 람을 바라보았다. 

들쥐 신인류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털이 짙은 회색이라 낯빛을 알아보는 것도 미묘했지만, 하여간 느낌이 그랬다. 

톡 튀어나온 새까만 눈이 크게 확장되어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다.

“주, 주인님……!”

“분명 동쪽 대륙으로 가고 있으니 마중을 나오라는 전갈을 받았을 텐데. 쥐새끼라 그런지 숨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더군.”

“주인님! 그것이 아닙니다! 찍! 수, 숨다니요!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찌찍!”

람의 말에 들쥐가 현란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의 코에 달린 수염이 달랑달랑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허공에 포물선을 만들었다.

이예주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나비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숨은 적이 없다니!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네 냄새를 쫓느라 코가 다 헐었로라!”

“찌찍! 네 이놈! 도둑고양이 주제에 다, 닥치지 못할까! 찍!”

나비 아저씨의 짜증스러운 어투에 들쥐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나비 아저씨의 눈이 세모꼴로 찢어졌다. 

“뭐로라! 더러운 시궁창에서 굴러먹던 쥐 놈이 감히 이 나비에게 뭐라 지껄이는 것이로라?!”

“찍, 내가 뭐 틀린 말 했느냐? 찍, 찍. 인간들의 눈을 살살 피해 음식을 훔쳐 먹는 주제에, 찌찍!”

“적어도 네놈처럼 일족을 배신하고 인간들에게 붙어서 연명하지는 않로라!”

“그만.”

들쥐와 고양이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싸움은 람이 손을 들어 보이며 짧게 명령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의 한 마디에 나비와 들쥐 모두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예주는 입을 다물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앙칼지게 노려보고 있는 나비 아저씨와 들쥐를 보고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를 떠올렸다. 

나비 아저씨의 억센 팔 아래 몸을 딱 붙이고도 으르렁거리는 쥐의 꼴이 조금 웃겼다. 

그때 람이 다시 명령했다.

“나비, 그것 내려놓도록.”

나비가 람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재빠르게 한쪽 발로 근처에 놓여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쥐를 그 위에 앉혔다. 

아니, 그것은 앉혔다기보다는 패대기쳤다는 것이 더 옳았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나비의 손아귀에서 의자 위로 내던져진 들쥐에게서 ‘찍!’ 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놓으려던 들쥐를 나비가 다시 거세게 잡아 앉혔다.

“찍찍! 이거 놔라, 놔!”

“가만있로라!”

자꾸만 몸을 꿈틀대는 들쥐의 왜소한 어깨를 내리누르며 나비가 거칠게 소리쳤다. 

처음 보는 그의 박력에 이예주는 내심 놀랐다. 

로라체로 박력이라니.

문득 도리질을 해 대는 들쥐에게 뻗어지는 손이 보였다. 

누구의 손인가 눈치챌 새도 없이 조용하게 다가온 손아귀가 들쥐의 머리털을 잡아 꺾었다. 

컥,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들쥐의 목이 뒤로 꺾였다. 

나비 아저씨도 놀라 주춤거릴 정도로 거센 힘이었다. 

이예주 또한 놀란 눈으로 손을 타고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오만한 지배자로 변한 남자가 딱딱한 표정으로 들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것은 비단 남자가 신인류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뻘겋던 남자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빨간색이 빠졌다. 

그리고 들쥐를 바라보는 그 두 동공에는 온전한 검정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죄는 네가 잘 알겠지.”

“주, 주인님! 전 정말 전갈을 못 받았습니다, 찍! 제, 제가 전갈을 받았으면 왜 주인님의 명령도 무시하고 수, 숨었겠습니까!”

“그것 말고.”

“컥!”

들쥐의 털을 잡은 람의 악력이 더욱 거세졌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준다면 그대로 목이 부러질 만큼 쥐의 신체가 위태롭게 꺾여 있었다. 

언제 ‘뿌각’ 하는 끔찍한 소리가 날지 몰라 이예주도 덩달아 겁이 났다.

“그것 말고 더 있을 텐데.”

“그, 그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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