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나머지 한 손으론 잊지 않고 자신을 옭아맨 사슬 끝을 잡은 채 흔들어 대기까지 했다.
여유가 철철 넘치는 그 모습에 이예주는 당황했다.
그리고 절대 도망 안 갈 테니, 사슬을 들고 있을 바에야 제 품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봉지나 같이 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남자가 뭐라며 그녀의 혈압을 올려 댔더라.
—스읍, 제가 먹을 건 제가 들을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로맨틱은 산산이 부서졌다.
“칫, 이거 사 달라구 주인님께 땡깡 부리느라 이렇게 늦게 온 거져?”
“뭐? 땡깡?!”
그때 그녀를 샐쭉 흘기며 내뱉는 조롱이의 말에 축 처진 파김치처럼 의자 위에 대강 널브러져 있던 이예주가 벌떡 일어났다.
“땡깡은 무슨! 사 달라고 땡깡이라도 부렸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럼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는데여?”
“네 주인 놈이 나를 짐꾼으로……!”
‘부려 먹는 짓거릴 봤으면 그딴 소리 못할걸!’ 하고 외치려던 이예주는 그 주인 놈이 불쑥 안으로 들어온 탓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주점 안의 묘한 기류에 남자가 시뻘건 눈을 형형히 빛내며 내부를 주욱 훑어보다가 이예주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히익!’
그녀는 혹시 자신이 욕하는 것을 그가 들었을까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필사적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안쪽에서 푸근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람을 맞이한 덕에 이예주는 문초를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람의 등장과 동시에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신인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람에게 목례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남자가 확실히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 이예주는 못내 신기했다.
그레이 씨로 추정되는 중년의 남성이 그보다 새파랗게 젊어 보이는 람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부부의 머리 위로 길쭉한 토끼 귀가 봉긋 솟아 올라와 있었다.
그 깜찍한 모습이 이예주의 온 신경을 빼앗았다.
“주인님! 어서 오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레이.”
그레이가 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람 또한 담담히 마주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이예주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기운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드는 서운함에 아랫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저런 남자가 당과 한 번 사 줬다고 헤실헤실하며 화를 모두 푼 아까의 자신이 바보 멍청이 같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탁자 위의 봉지 더미를 툭툭 내리치며 삐쭉거렸다.
칫, 이깟 게 뭐라고.
이딴 설탕 덩어리가 뭐라고 사람 가슴을, 사람 심장을…….
어느새 검은 눈동자로 변한 람이 짐꾼이었던 그녀와는 대비될 정도로 여유롭게 들고 있던 당과 봉지 두 개를 그레이에게 넘겼다.
“아이들에게 전해 주도록. 이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났다던가.”
“어이쿠! 감사합니다, 주인님! 부인, 어서 산티보고 다함이 데리고 나와서 인사드리라고 좀 시키시오.”
이예주는 안쪽에서 그레이의 아내와 함께 나오는 리틀 그레이에게 금세 시선을 강탈당했다.
네다섯 살이나 됐을까.
그레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어린아이가 앙증맞은 토끼 귀를 쫑긋거리며 람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처음 뵈어요. 저는 산티예요. 얘는 이번에 태어난 동생 다함이고요. 아직 너무 어려서 변신을 못해요.”
산티는 품에 강보에 쌓인 토끼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강보 사이로 엄지손가락만 한 아기 토끼의 손이 삐죽 나와 있었다.
그레이 씨의 자식답게 회색 털이었다.
아악, 너무 귀엽잖아!
애기가 애기를 안고 있는 모습에 이예주는 전율했다.
홀린 듯이 그레이 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 단란한 가족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문득 기묘한 느낌에 산티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부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예주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레이 부인의 눈은 충혈되었고 어딘지 모르게 퀭해 보였다.
머리 위로 솟은 앙증맞은 토끼 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이예주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커다란 두 동공이 묘한 기류로 번들거리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싹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만큼.
날 왜 저렇게 바라보는 거지? 뭐 실수한 것이라도 있나?
눈알을 되록되록 굴리며 이예주는 그레이 씨의 주점에 온 후의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딱히 그레이 씨 부부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레이 부인의 시선을 눈치챈 이는 이들 중 저밖에 없는 것 같아 그녀는 왠지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예주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와 부인을 제외한 분위기는 훈훈했다.
람 또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산티가 마음에 드는지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쌍둥이들은 보이지 않는군.”
일순 주위가 싸해졌다.
이예주는 람의 쌍둥이 언급에 토끼 가족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이 단란한 가족에게 무언가 커다란 우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푸근해 보이던 그레이 씨와 아기자기하기 짝이 없던 산티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레이 부인은 여전히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예주는 고개를 움츠리며 그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마침 그레이 씨가 근심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기에 이예주는 송곳처럼 뺨을 찌르는 부인의 시선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레이 씨의 목소리가 전과 다르게 땅을 파고들 것처럼 어둠에 푹 잠겨 있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음울해서 이예주의 기분 또한 축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저희 자손인 산쵸와 칸쵸 쌍둥이들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아이들의 이름을 주인님께서 지어 주셨지요. 그런데 며칠 전, 칸쵸가 크게 앓았습니다. 마을 의원에게 약을 지어다 먹여 보았지만 열이 내리질 않아, 결국 산쵸가 마을 뒤 숲에 있는 약초 언덕 근처로 열꽃을 찾으러 나갔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열이 내린 칸쵸마저 산쵸를 찾는다고 나가서 며칠째 집으로 돌아오질 않고 있습니다, 주인님.”
“야, 약초 언덕……! 거긴 금지된 곳이잖아여!”
그때 옆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깜짝이야.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황금색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새된 비명을 지르는 황조롱이가 보였다.
“금지된 곳에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단 말이에여?!”
“그, 그렇지만 열이 너무 많이 올랐다. 열꽃은 그쪽에서밖에 피지 않고, 또 오랫동안 폐쇄됐던 곳이니…….”
조롱이의 날 선 목소리에 그레이 씨가 당황하여 우물우물 거렸다.
뜬금없이 왜 저러는 걸까?
얼굴이 퍼렇게 질린 조롱이는 그답지 않게 치뜬 눈이 꽤 날카로웠다.
침울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예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멍청하게 조롱이와 람, 그레이 씨를 번갈아 보던 사이, 변한 공기의 무게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아기 토끼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흐응, 흐에엥! 산티의 품에 있는 강보 속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와 조용한 주점 내부 안에 울려 퍼졌다.
발버둥 치기 시작하는 아기를 들고 있는 산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묵하는 어른들을 울상을 하고 올려다보았다.
고작 이예주의 허리춤에 닿을락 말락 한 어린애가 아기를 들고 있기엔 너무나도 벅차 보였다.
보다 못한 그녀가 오지랖을 발휘하여 산티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저기, 애기 내가 안고 있을까? 힘들면, 나한테 넘겨 줄…….”
짝—!
그러나 내민 손은 강보에 채 닿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날카롭게 내쳐졌다.
무표정한 람도, 당황한 그레이 씨도, 새된 비명을 지르며 분위기를 차갑게 굳히던 황조롱이 또한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예주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레이 부인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소, 손대지 마!”
이예주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뜨고는 멍하니 내쳐진 제 손과 그레이 부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레이 부인의 눈이 꼭 천적을 바라보는 듯한 경계와 혐오감, 두려움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람과 황조롱이를 만나고, 그들과 일행을 자처하여 다니는 동안 무던히 보고 느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심지어 방금 전 붉은 개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그녀였으니 그 눈빛이 절대로 낯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고 받는 완전한 적의는 언제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이예주의 입이 잠시 열렸다가 다시 닫히며 붕어처럼 소리 없이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저 신인류는 자신과 같은 인간을 싫어하고, 자신은 인간이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부인에게 거세게 내쳐진 손등이 화끈거리며 아팠다.
이예주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셨다.
밀쳐 낸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이를 안고 있는 산티를 완전히 제 등 뒤로 숨기며 그레이 부인이 억척스럽게 외쳤다.
“내 아기에게 더러운 손대지 마, 인간!”
“부인! 이, 이게……! 손님께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산쵸랑 칸쵸가 인간들에게 잡혀간 걸요! 난 알아! 뒤 숲에 우리 아이들 냄새 말고, 인간들의 냄새도 짙게 배어 있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인님! 인간들이에요! 들쥐 놈이 인간들과 결탁해서, 마을 족장 놈들이 주인님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내 아이들을 데려갔다고요!”
“부인!”
“인간들은 다 똑같아! 쥐새끼처럼 하나같이 제 욕심만 채우려고 드는 족속들, 으흐흑! 그때, 들쥐 놈이 돈을 빌려 준다고 했을 때 거절해야 했어요, 여보! 더러운 인간 놈들의 돈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만뒀어야 했다고요!”
“…….”
“우리 잘못이야, 흐흐흑! 주점을 닫는다고 해도 그 더러운 놈들의 돈을 빌리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돈을 못 갚으니까, 인간들이 산쵸와 칸쵸를 잡아서 노예로 부려 먹기 위해 데리고 간 거라고요!”
그레이 부인이 핏발 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주점 내부를 정신 사납게 훑어보더니, 돌연 람의 팔을 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엔 이지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말리는 그레이 씨가 무색하게 그녀는 통곡했다.
아이들을 잃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주인님! 주인님, 제발! 제발 우리 아이들 좀 찾아 주세요. 주인님께서는 찾을 수 있으시잖아요! 저와 계약을 해 주세요! 아이들만 찾는다면, 제 몸도 영혼도 모두 대가로 바치겠어요! 제발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을 좀! 내 아가들을, 내 아가들을…… 으흐흐…….”
“흐, 흐으…… 으아앙!”
제 어미의 기행을 보고 겁을 먹은 건지, 울먹거리던 산티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예주는 난감한 얼굴로 람을 바라보다가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점 안에 있는 몇몇 이들 또한 토끼 가족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신인류들인 듯, 안쓰러운 얼굴로 부인을 바라볼 뿐 딱히 다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흐아앙, 으아앙! 산티가 울자 아이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기 또한 더욱더 커다란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토끼 가족의 모습에 이예주의 얼굴 또한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조롱이와 람을 제외한, 저를 바라보는 주변인의 눈초리들이 꼭 범죄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오히려 손등을 맞은 건 난데,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차오르는 억울함에 이예주는 입술을 꾹 깨물며 불안감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건가?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이 오면 안 되는 곳을 와서, 잘 버티고 있던 이들의 상처를 후벼 판 것인가.
뭘 해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찌푸려진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때까지도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며 오열하는 그레이 부인을 보자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은 그녀의 손목이 강한 힘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차르랑!
주인 잃은 사슬이 바닥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어, 어!”
잠시 비틀거리는 사이, 이예주는 람의 뒤편으로 질질 끌려갔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산티와 그의 엄마를 제외하고 주점 안의 모든 이들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예주의 작은 몸이 어느덧 커다란 남자의 장신 뒤로 쏙 가려졌다.
남자의 등 뒤에 위치한 자신의 상황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건 뭐지?
그녀를 제 등 뒤에 숨긴 람이 그레이에게 말했다.
“그레이, 네 처와 아이는 안으로 돌려보내고 이야기를 나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