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5)화 (96/319)

뒷목이 뻐근하게 당기고 쉭쉭 소리가 날 정도로 내뿜는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지 말이 없던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군.”

“……뭐, 뭐라고요?”

“한눈이라도 팔면 사고를 쳐 대니 도대체 혼자 둘 수가 없잖아. 응?”

턱, 남자가 손을 들어 잔뜩 흐트러진 그녀의 후드를 정리해 주었다. 

마치 아이라도 달래는 투다. 

그것에 이예주는 화가 가라앉긴커녕 억울함에 눈두덩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억울했다. 

너무 서럽고 억울한 나머지, 울음이 다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자신이다. 

울면 지는 거다. 울면 지는 거야, 예주야. 어린애도 아니고, 울면, 울면…….

“내가…… 내가 우스워요?”

그러나 말투에 묻어나는 울음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괴상한 얼굴로 제 앞의 시뻘건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날 우습게 만드니까 좋아요?”

“그런 적 없다.”

“날 어린애 취급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붉은 개 앞에서 날 무시하고! 이게 우습게 만드는 게 아니면 대체 뭔데요?” 

이예주는 분명 최선을 다해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사실만 말하려고 했다. 

꾹꾹 눌러서 감정 한 점 안 내보이게. 남자처럼 언제나 이성적일 수 있게.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기어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물줄기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쟤 때문에 난 수레에 치여 죽을 뻔했어요! 당신이 준 당과도 다 떨어졌다고요! 아니 아니, 이건 됐어요. 다 됐고! 난 당신 여자 친구한테 너 때문에 떨어진 당과나 주우라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외엔 아무 소리도 안 했어!”

“…….”

“근데 왜! 왜 날 이렇게 만드냐고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왜 이렇게 날…….”

“…….”

“왜 이렇게 날 비참하게 만드냐고요. 흐어엉…….”

결국 왈칵 눈물을 터뜨리며 이예주가 울었다. 

시야를 뿌옇게 만들 만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안을 때였다. 

강한 힘이 그녀를 훅 끌어당겼다. 

사태 파악을 하기도 전에 몸이 휘청이더니, 그녀는 억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퍽 처박았다. 

등허리 뒤로 사슬보다 더 두꺼운 남자의 두 팔이 이예주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예주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자신의 몸뚱이가 남자의 품에 가득 끌어안겨진 후였다.

“울지 마.”

원래 달래 주면 더 울기 마련이지 않은가. 

이예주를 끌어안은 채 내려다보는 남자의 두 동공은 아직도 시뻘겠다. 

그러나 그 동공만큼 붉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소름 끼칠 만큼 다정한 목소리여서 다시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 흐으. 이, 이게 뭐야?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난 완전히 우스운 꼴이 됐잖아. 흑, 흐흑. 붉은 개가 얼마나 비웃겠어. 나도 당과도 완전히…….”

“안 우스워. 안 우스우니 그만 울어라. 그렇게 우니까 못생긴 홍당무 같잖아.”

“으허엉! 지금 그딴 농담이 나와요? 내가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흐, 흐윽.” 

이예주가 손을 들어 퍽퍽 그의 가슴을 내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그 소리에 묻혀 “농담 아니다.”라는 남자의 말은 그녀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인간 여자의 주먹 때문에 가슴이 점점 알싸하게 아파 오자 람은 그녀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세게 끌어안고는 머리 위에 턱을 가져다 대었다. 

당연하게도 이예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람은 문득 인간 여자의 얼굴 부분이 닿아 있는 가슴께가 간질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놔요! 답답해요!”

“붉은 개 릴리는 인간들에게 고문당하면서 제 일족이 하나하나 처참히 죽어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깊다. 붉은 개 일족은 다리족만큼이나 달리기에 능해서 한 번 도망치면 다시 잡기가 꽤 까다롭지.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잔인한 인간들은 붉은 개들의 등을 뚫고 척추에 사슬을 연결해 놓곤 했다. 너도 보았지 않으냐, 등 뒤의 흉터를.”

“…….”

뜬금없는 붉은 개에 대한 설명에 이예주가 잠시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잠자코 그의 품에 안겨 있자니, 몸이 터지도록 세게 끌어안던 그의 두 팔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이예주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개의 등 뒤 상처는 그녀 또한 보았다. 

람이 힘을 써서 되살려 준 듯 검게 빛나던 흉터는, 부상을 입었을 당시의 상태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어 보였다. 

그치만 그게 뭐?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서요? 그거 봤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그럼 걔가 일방적으로 화내고 난리 치는 걸 받아 주고 이해해 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예주는 또다시 울컥하는 마음에 나오는 대로 마구 쏟아 뱉었다.

“난 그렇게 속이 안 넓어요. 성자도 아니고요! 별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러라고 강요해도 안 해요. 아니, 못해! 걔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는데, 걔 사정이 어쩌고 자시고 이해할 마음 따윈 추호도 없다구요!”

“이해하는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받아 줄 필요도 없다.”

“그럼 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요? 왜요?”

남자가 하, 짧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냥 조금만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

“릴리는 이제 뛰지 못한다. 척추를 뚫으면서 폐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폐활량이 늘어나면 큰일이지. 호흡을 하다가도 언제 폐가 터져 버릴지 몰라 항상 두려움에 질려 있으니, 가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곤 한다.” 

이예주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빨갛다. 

그 눈과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처럼 따끔따끔 거렸다. 

조금쯤은 익숙해질 때가 된 것 같은데, 신인류를 향할 때마다 검게 변하는 것을 보고 매번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거리를 쉬이 찾을 수 없었다. 

피해자는 자신인데 반박조차 못하다니.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그래도 걔 때문에 당과가 다 떨어졌잖아요. 다 산산조각 나서 씻어 먹지도 못하구. 씨잉, 당신이 사 준 건데. 당신이…….”

“동쪽 대륙에 있는 동안 물려서 못 먹을 만큼 사 주마. 아니, 아예 당과 가게를 통째로 사다 주지.”

“칫, 됐어요! 내가 뭐 당과 못 먹어서 떼쓰는 어린애인 줄 알아요?”

괜히 한 번 튕기면서도 삐죽대던 이예주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녀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린 것을 짐작한 듯, 남자가 다시 민감한 사항을 입에 담았다.

“릴리는 내가 알아서 하지. 앞으로 그녀가 네게 해되는 짓거리를 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인간.” 

릴리. 남자의 입에서 붉은 개의 이름이 쏟아져 나오자 이예주는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다시 쑥 내렸다. 

나비 아저씨를 부를 때도 그랬지만, 이름을 부를 때의 그는 너무나도 다정한 어감이다. 

그녀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도 이름 있어요.”

“……뭐?”

“나도 이름 있으니까 ‘인간, 인간’ 거리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요.”

생뚱맞은 이예주의 요구에 남자가 고운 미간을 완전히 찌푸렸다. 

그러더니 지금껏 잘만 끌어안고 있던 그녀를 품에서 확 떼어 내었다. 

“헛소리.”

이예주가 크게 눈을 치켜뜨며 당황하는 사이, 남자가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등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주워 든 건지 그의 손엔 땅바닥에 쩔그럭거리며 질질 끌리던 사슬이 들려 있었다. 

퇴로 차단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

“아, 왜요! 뭐가 헛소리인데요! 나도 이름 불러 줘요!”

이예주가 남자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이름 좀 불러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당과 가게로 가, 아까부터 그들이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던 가게 주인에게 묵직한 꾸러미를 건넸다.

“약속했던 금화다.”

가게 주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연신 람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

람이 품에서 한 주먹의 금화를 더 꺼내어 내밀었다. 

가게 주인이 거절하는 법도 모르고 열심히 받아 챙기는 모습에, 오히려 이예주가 나서서 “그만 줘요, 그만! 이 아저씨 솔직히 제대로 감시 안 했단 말이에요!” 하고 외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고 람이 요구한 것은, 생각보다 충격적인 것이었다.

“여기 있는 당과들, 모조리 사도록 하지.”

“하, 아이고! 아이고, 나으리!”

이제 가게 주인은 흡사 졸도라도 할 것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나으리를 찾아 대었다. 

잠시 후 이예주는 터질 만큼 당과가 가득가득 들어 있는 종이 봉지를 넘겨받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람이 이것들을 모두 다 사 젖힐 때부터 무엇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훌륭한 연인을 두어서 좋으시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참지 않고 이예주에게까지 쉴 새 없이 아첨을 해 댔다. 

그 소리에 그녀는 아니라는 부인도 못하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산 사람은 저리도 무표정한데, 왜 제가 이리도 흥분되고 가슴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참 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단순히 당과를 사 주는 것뿐인데, 왜 자꾸 가슴이……. 

“이, 이렇게 많이 사도 돼요?”

이예주가 어렵사리 떨어뜨리지 않고 종이 봉지들을 끌어안으며 람에게 물었다. 

그의 양손에도 당과가 가득 담긴 봉지가 있었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어도 남을 양이었다. 

이예주의 말에 람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실컷 먹고 더 사 달라는 소리나 하지 마.”

그렇게 그들은 달달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레이의 건물까지 걸어갔다.

*       *       *

그레이의 주점은 특별할 것 없는 일반 숙박 시설이었다. 

맨 아래층은 식당 겸 주점으로 쓰이고 그 위층부터는 투숙을 할 수 있는,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업소였다. 

신인류가 운영하는 주점이라기에 뭐 대단한 술집일 거라 기대했던 이예주는 어쩐지 맥이 빠졌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기 때문인지 주점 안은 한산했다. 

드문드문 커다란 컵을 홀짝이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인류가 운영하는 주점인데 인간들도 이용하는 건가?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청년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그녀는 청년이 앉아 있는 의자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말 꼬리를 보고 곧바로 그런 생각을 접었다. 

“에엑?! 뭔 당과를 이렇게 많이 사 왔어여? 당과 못 먹구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어여?!”

코가 아릴 정도의 달달한 설탕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도착한 이예주를 맞이한 것은 황조롱이였다. 

들쥐를 데리러 간다던 나비 아저씨와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간 장본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주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이렇게 많은 거 누가 다 먹으려구여! 으으, 설탕 냄새!”

“됐고, 좀 받아.”

“으헉!”

이예주는 어렵사리 들고 있던 당과 봉지들의 일부를 조롱이에게 와락 넘기고 나머지들은 그냥 주변에 있는 탁자 위에 우르르 쏟았다. 

한가득 들고 있던 당과 봉지를 내려놓고 나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하…… 팔 빠지는 줄 알았잖아.”

그녀가 커다란 봉지 더미를 바라보며 울상을 하고 중얼거렸다. 

아직 채 식지 않은 당과 덩이들에서 단내가 훅 끼쳤지만 아까처럼 달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뿐인가. 

람이 가게에 있는 당과를 모조리 사 주었을 때 느꼈던 간질거리던 기분은 한 톨도 남지 않고 증발한 지 오래였다. 

사실 남성한테 무언가를 받은 것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이었기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나름 로맨틱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꽤 많이 설레었다 이거야! 

이예주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건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올랐을 때였다. 

묵직한 봉지들을 한 아름이나 들고 걷느라 자꾸만 속도가 느려졌다. 

그런 그녀를 남자가 자꾸 채근했다. 

아니, 저 인간은 대체 자신도 모르게 산삼을 삶아 먹었나. 

뭐 이리 무거운 걸 들고도 잘만 걸어갈까 싶어 바라보았던 이예주는, 남자의 손안에 들려 있는 당과 봉지가 고작 두어 개밖에 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려 다섯 개나 힘겹게 들고 있는 자신과 달리 너무나도 가뿐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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