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요, 뭘. 무서운 신인류의 저주 때문에 족장님은 말더듬이 병신을 아들로 두게 되었잖아요. 게다가 그 아들마저 매일같이 술과 검은 안개나 빨아 대는 망나니인데, 신인류와의 전쟁 이후로 평생을 저택에 갇혀서 일만 하다 죽은 우리 족장님이 얼마나 불쌍해요?”
때마침 검은 상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 두 명이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으며 이예주의 앞을 지나쳤다.
저주? 검은 안개? 신인류와의 전쟁? 족장?
그들의 말을 엿듣자니 알쏭달쏭한 키워드들이 머리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황조롱이가 말하길, 신인류들은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동쪽 대륙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또한 동쪽 대륙 마을의 ‘족장’이란 사람은 시간족이 아닌 그냥 일반 사람이라고.
그럼 저주는 또 뭘까?
혹시 신인류들이랑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분노한 람이 저주를 내렸나?
그럼 검은 안개는?
시간족이 먹었다는 검은 안개를 빨아?
이예주가 문어발처럼 생각을 떠듬떠듬 이어 가는 사이, 음울한 곡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이고, 족장님. 아이고, 우리 불쌍하고 위대한 족장님.
그녀는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마을 사람들에게 족장이란 사람의 신망은 굉장히 두터운 것 같다고.
오죽하면 ‘위대한 족장’이라는 말을 쓸까.
이곳 족장은 팔족 족장과 같은 미친놈은 아닌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때, 수레 가득 꽃과 관을 실은 상여가 그녀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꽃향기가 얼굴로 훅 끼쳐 와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장례식이니 국화나 백합 같은 꽃을 떠올리던 이예주는 생전 처음 보는 꽃 모양이 신기했다.
새하얀색의 꽃은 활짝 개화하지 않은 채, 둥근 꽃봉오리 형태로 축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은방울꽃보다 크기가 커서 꼭 전구라도 단 것 같은 모양새가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비록 냄새는 지독했지만, 조문 꽃이라고 보기엔 굉장히 발랄한 외형이었다.
“……귀엽네.”
이예주가 중얼거렸다.
야생화인 듯 시큼털털한 풀 냄새를 가득 풍기며 상여가 그녀의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 순간 바퀴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덜컹하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덩달아 한참 높은 곳에 있는 황금색 관의 뚜껑이 덜컥덜컥 흔들리는 것이 보일 때쯤, 누군가 뒤에서 이예주의 몸을 거칠게 떠밀었다.
“우악!”
당과 꼬치를 양손에 잔뜩 쥔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녀는 중심을 잡지도 못하고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확 엎어졌다.
그녀의 손에서 당과 꼬치들이 와르르 쏟아져 흙바닥을 뒹굴었다.
쿵.
바닥과 세게 충돌하는 바람에 격렬하게 몰려오는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이예주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덜커덩하고 코앞에서 커다란 수레바퀴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손가락 두세 마디 차이였다. 둔중한 바퀴에 람이 쥐여 준 당과들이 짓눌려 산산조각이 났다.
하마터면 수레 밑에 깔린 것이 당과 조각들이 아닌, 자신이 될 뻔했다.
정말로 죽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가슴이 선뜩해졌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그대로 엎어져 있을 때였다.
“이봐! 수레에 치이고 싶어 환장했어?! 그렇게 엎어져 있으면 어떡해! 어서 일어나!”
누군가 머리맡에서 호되게 꾸짖듯 소리 질렀다.
일어나란 소리에 이예주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넘어졌던 자리 앞에 당과들이 완전히 으스러져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은 것들 또한 흙바닥에 실컷 나뒹군 후라 먹을 수는 없는 상태였다.
이예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람이 사 준 건데. 람이, 람이 사 준 내 건데.
어떤 망할 놈이 밀쳐서, 내 당과들을……!
그녀는 황조롱이를 처음 만나 그에게 사정없이 쪼였을 때와 비등한 분노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활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머리 위가 뜨거워졌다.
살기 어린 눈을 한 이예주가 득달같이 뒤로 돌았다.
그녀의 거센 움직임에 손목에서부터 바닥에 줄줄 똬리를 틀고 있던 사슬이 ‘쩔컹!’ 하고 시끄럽게 쇳소리를 내었다.
범인이 벌써 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행히 불발로 그쳤다.
뒤로 돌자마자 방금 전 넘어졌던 자신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파르르 떨고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다.
눈이 뒤집히는 심정을 절감하며 이예주가 그쪽을 향해 사납게 외쳤다.
“너!”
“나, 난…….”
갓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험악한 이예주의 기세에 놀랐는지 여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붉은색 머리가 살랑살랑 춤을 췄다.
람을 쫓아간 줄 알았던 붉은 개였다.
밀쳐져 수레에 치일 뻔한 것은 저인데, 마치 제가 피해자라도 되는 양 요망한 것이 퍼들퍼들 몸을 떨었다.
이예주는 더욱 흉악한 표정으로 저를 밀친 범인에게로 다가갔다.
“너! 죽고 싶냐?!”
“나, 나는…….”
“진짜 나랑 맞짱 뜨고 싶냐고!”
“…….”
“하다 하다 이젠 수레에 치여 죽이려고? 왜! 더 세게 밀지! 진짜 뭐 이런 미친……!”
“난, 난 네가 싫어!”
쌍욕을 읊조리는 이예주에게 붉은 개는 저가 밀쳤던 행위보다 더 황당한 소리를 지껄여 댔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이건 무슨 막장 같은 일일까.
여전히 바닥에 나뒹구는 당과들이 보였다.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다 보니 두피까지 띵하게 아파 왔다.
“네가 날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내 알 바 아니고! 당장 주워.”
“……뭐, 뭐?”
이예주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당과들을 손가락질하며 답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화가 치솟을 대로 치솟아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마담 페니의 가게에서와는 사뭇 다른 이예주의 모습에 붉은 개가 꽤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었다.
“내 당과들. 당장 주우라고.”
“내, 내가 왜?”
“너 때문에 람이 사 준 거 다 떨어뜨렸으니까, 당장 주우라고!”
이예주가 분노로 인해 눈을 까뒤집으며 꽥 소리를 지르자, 붉은 개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걸음을 멈추고 수군대었다.
순식간에 쏠리는 이목에 붉은 개가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당당하게 턱을 쳐들었다.
“싫어!”
“왜? 네가 떨어뜨린 거 주우라는 게 왜 싫은데?”
이예주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그녀의 인내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었다.
“네가 싫으니까! 난 너까짓 인간 계집,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
“아, 글쎄. 싫다는 소린 조금 있다 하고, 당장 줍기부터 해!”
“……너 같은 거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열심히 붉은 개에게 맞받아칠 말을 생각하던 이예주는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소리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 붉은 개를 쳐다보았다.
제가 말하고도 놀랐는지 붉은 개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실수라 치부할 생각은 전혀 없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버텼다.
이예주는 가만히 붉은 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수군거리던 주위가 일순 조용해졌다. 붉은 개는 자신에게 쏟아진 책망하는 듯한 눈빛들에 제가 더 상처받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왜…… 왜 너 같은 인간 계집 따위에…… 왜 주인님이 너 같은 인간 계집 따위를…….”
“…….”
“너 같은 거…… 너 같은 거 진짜 주,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진짜로…….”
“나도 너 싫어!”
이예주가 붉은 개의 말을 잘라먹으며 커다랗게 내질렀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붉은 개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랗게 홉떠졌다.
이예주는 붉은 개가, 그리고 그녀가 만든 이 상황이 진심으로 진저리 나게 싫었다.
“나도 너 싫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아까 조롱이한테 뭐라고 소리 지를 때도, 네가 날 밀쳐서 내 당과들을 다 떨어뜨린 지금도! 싫어, 완전 싫어! 너 짜증 나 죽겠어! 너무너무 싫어서 미치고 팔짝 뛸 만큼! 환장할 정도로 네가 싫다고!”
이예주는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듯 치를 떨며 내뱉었다.
그녀의 살벌한 말에 주위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누구는 싫지 않아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줄 아나.
누구는 입이 없어서 싫다는 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나.
자신도 처음부터 싫었다.
자신은 화가 나서 막말할 때가 아니면 말을 걸기도 어려운 람에게 친근한 사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것도, 그에게 예쁨받기 위해 애교를 피우는 것도, 그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도 모조리 싫어!
너무 싫고 화가 나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람과 그의 일행에게 자신은 이방인이었고, 이예주는 그것을 막 사막에서 깨닫고 온 참이었으니까.
경멸 어린 붉은 개의 시선에 울컥 짜증이 치솟아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참은 제가 이 계집애에게 그토록 큰 잘못을 했던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렇게 큰 잘못을 했던가?
어이없음과 억울함, 짜증과 혐오감 등 온갖 감정이 마구 뒤섞이며 휘몰아쳤다.
불현듯 이예주를 죽이려 들었던 가해자가 정말 예고도 없이 히끅, 히끅 숨을 몰아쉬더니 눈물방울들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
이예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갑자기 왜 처울고 그러는데?”
“…….”
“잘못한 건 넌데, 왜 네가 울고 있느냐고! 진짜…… 어억!”
‘울고 싶은 건 난데!’라고 외치려던 이예주는 순간, 누군가가 입고 있던 겉옷의 후드를 위로 잡아당긴 탓에 목이 턱 막혀 강제로 말을 멈췄다.
“그만.”
익숙한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이예주는 퍼뜩 제 후드를 잡은 미친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뻘건 두 동공에 쓰다 버린 휴지 조각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자신이 비쳐 있었다.
금방 온다더니, 퍽이나 금방 왔다.
상황이 엉망진창 난장판으로 변한 후에야 드디어.
그 기가 막힌 순간, 그녀의 앞에서 더욱 기가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
“흐, 흐흑…… 주, 주인님…….”
앞을 바라보니 붉은 개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이예주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는 람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 독기가 가득 서린 눈으로 자신을 향해 죽어 버리라고 저주를 퍼붓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흐느끼며 내뱉는 말이 더욱더 가관이었다.
“미,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으니 그만 노여움 푸세요, 인간 여자분. 흐, 흐흡,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주인님…….”
“무슨 일이지.”
“거리에 커다란 수레가 지나가는데 인간 여자분께서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보시기에, 제가 말리다가 그만 인간 여자분의 심기를 거슬렀어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 용서해 주세요, 흐윽…….”
이예주는 조금 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던 자신을 뜯어말리던 사람이 있었는지, 머리를 쥐어짜며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자신의 몸뚱이가 차디찬 땅바닥에 밀쳐졌던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붉은 개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말이었으니까.
이예주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을 붉은 개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상황을 바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야! 갑자기 왜 우냐고! 그리고 네가 언제 날 말렸어? 너 때문에 괜히 당과만…… 으헉.”
“스읍, 그만하라고 했다.”
남자가 자신의 후드를 다시 한 번 틀어쥐고 압박하지만 않았다면.
옷자락이 턱 밑에 걸려 숨이 막혔다.
“붉은 개, 먼저 그레이의 건물로 가 있어라.”
“가긴 어딜 가! 이, 이거 놔 봐요! 아, 놔 보라고요!”
이예주가 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사이 남자가 붉은 개를 향해 짧게 명령했다.
그러자 붉은 개가 잽싸게 눈물을 닦으며 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아 빠르게 사라졌다.
살랑살랑 우아하게 움직이던 붉은 머리가 어쩐지 거세게 뒤흔들렸다.
순간, 길고 풍성한 머리에 가려져 있던 붉은 개의 목뒤와 등이 훤히 드러났다.
입고 있는 옷이 앞만 파인 것이 아니라 뒤도 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머리가 치워진 붉은 개의 등에는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가 아닌, 거무튀튀하고 흉측한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빛이 나고 있었다.
그래, 엑스 자로 흉하게 파인 커다란 흉터에서 검은빛이 나고 있었다.
마치 남자로 인해 변색된 이예주의 손목처럼.
붉은 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람은 잡고 있던 그녀의 후드를 놔주었다.
얼마나 거세게 잡고 있었는지 천에 졸린 목이 다 시큰했다.
그러나 제 목을 채 돌아볼 새도 없이 이예주는 번뜩 뒤로 돌아 저를 막은 남자에게 소리쳤다.
“왜 보내요?”
“…….”
“왜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보내냐고요!”
그녀는 붉은 개와 네가 싫니, 내가 싫니 실랑이를 할 때보다 더 열이 뻗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