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들 손이 없을 정도로 손안 가득 꼬치 더미를 든 이예주는, 제일 먹음직스러운 빠알간 사과 당과부터 입에 쑤셔 넣었다.
설탕물 때문에 겉모습은 꼭 딱딱한 사탕 같았으나, 탁구공만 한 사과는 씹자마자 거짓말처럼 와삭 부서졌다.
코가 따가울 정도로 단맛이 입안에 퍼지더니, 이어서 향긋한 사과의 상큼함이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가끔 명동 거리에서 사 먹었던 설탕 덩어리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대박, 이거 진짜 맛있잖아?
잠시 감탄 어린 눈으로 꼬치를 내려다보던 이예주가 이내 다른 과일과 채소들도 허겁지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와그작와그작, 달달한 당과들이 입에서 부서질 때마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정신없이 볼에 단것들을 밀어 넣던 이예주는 한참 후가 지나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경악 어린 시뻘건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음 우까여?”
적나라한 그의 시선에 이예주가 남자에게 아직 손대지 않은 당근 당과 꼬치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물었다.
남자는 정색하고 그녀를 외면했다.
이예주는 굉장히 민망스러운 마음에 내민 꼬치를 거두고, 대신 제가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웅얼거렸다.
“……나 어인애 아이에여. 무으은 어인애더 아이거 당가을 사우구…….”
“입에 묻히지나 말고 먹었으면 좋겠군.”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 잔뜩 한심함을 담고 남자가 일갈했다.
흥, 싸늘한 그의 태도에 이예주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워낙에 볼이 퉁퉁하게 불어 터져 있었기에 그 입모양은 명확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예주가 당과에 빠져 정신없이 우걱우걱 씹어 먹을 때였다.
“비, 비, 비켜라! 비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그녀를 거칠게 밀치고 지나갔다.
어억. 이예주가 비틀거렸다.
람이 넘어지려던 그녀의 허리를 재빨리 잡아채지 않았다면, 양손에 꼬치들을 한 묶음씩 든 채 대자로 엎어지는 낭패를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은 그녀는 벌떡 고개를 쳐들고 자신을 치고 지나간 무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 저! 치고 지나갔으면 사과를 해야……!”
“쉿, 입.”
“웁, 웁!”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람이 그녀의 입을 사납게 틀어막았다.
이예주가 댕그랗게 눈을 치켜뜨고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입을 막은 손을 풀어 주지 않았다.
“……장로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물건을 찾습니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더 이상의 검은 안개 공급은 없다고…….”
“소, 소, 소리를 낮춰라. 드, 드, 듣는 귀가 많지 않는가.”
무리의 중심에 서서 걷고 있는 작고 뚱뚱한 중년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자신을 치고 지나간 남자가 분명했다.
말더듬이인가?
그 주변의 일행들 모두가 마담 페니의 가게에 있던 것들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하여간 있는 것들이란.
이예주가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한껏 노려보았다.
또 다른 남자가 말더듬이 중년에게 말을 걸었다.
“마을 외곽을 다 뒤졌지만 그런 신인류는 찾지 못했습니다.”
“차, 차, 찾아야지. 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리 와.”
그들의 대화를 듣는 듯하던 람이 불현듯 이예주의 입을 풀어 주며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사슬이 아닌 손목이 잡혔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한산한 거리 한쪽으로 반항 한번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거센 악력 때문에 그가 사 준 당과 꼬치들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왜 그래요?”
당과 가게 옆, 거리 안쪽에 이예주를 몰아세우며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해 뭘 찾는 거냐고 또다시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놓지 않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당과 가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이봐.”
람이 당과 가게 주인을 부르더니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한가득 들려 있는 것들은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덩어리였다.
정확히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더 큰 크기의 금화들이었다.
람이 그것을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다.
가게 주인과 이예주, 둘 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이 커진 것은 당연했다.
“줄 테니 어디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고 있어라.”
“예, 예? 이, 이쪽 분 말씀이신가요?”
가게 주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예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거래 대상임을 공고히 했다.
“그래. 귀하신 몸이니 잘 감시하고 있으면 갔다 와서 이만큼의 금화들을 더 주지.”
“예! 예, 손님! 알겠습니다! 귀한 분 잘 모시고 있고말고요!”
“뭐, 뭐 하는 거예요?!”
챠르릉. 수많은 금화들이 람의 손을 떠나 가게 주인이 공손히 내민 두 손 안으로 떨어졌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뻔히 바라보고 있는 제 앞에서, 저를 사고파는 거래가 끝이 났다.
이예주가 황당함에 말까지 더듬으며 람을 돌아보자 그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사슬 묶을 곳이 없다.”
“예?! 지금 그게……!”
“잠시 들를 데가 있으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10분도 걸리지 않아 금방 온다. 그사이 도망가기라도 했다간…….”
람이 말끝을 잠시 흐리며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지 그의 입에서 으득,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쪽 대륙 전체를 다 때려 부숴서라도 찾아낼 테니, 얌전히 말 듣고 있도록.”
“아니요. 저기, 잠시만! 이대로 가요? 저기…….”
“부탁하지. 혹여나 도망가도록 뒀다간 이 가게부터 없앤다.”
람이 드물게 ‘부탁’이란 말까지 꺼내며 주인을 협박하자 선량한 마을 주민이 두려움에 질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이예주의 말을 듣지도 않고 휙 뒤를 돌아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잡을 틈조차 없었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을 확인하니, 방금 전 그녀를 치고 지나간 무리들이 사라진 쪽이 분명했다.
설마 그 남자들을 쫓아가서 다 때려 부수고 어쩌고 하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숲에서 자랑스럽게 인간 박멸이 꿈이라고 지껄여 대던 남자가 떠올라, 이예주는 덜컥 겁이 났다.
“저기요! 잠시만요! 람…… 저기……!”
‘고작 어깨 부딪힌 걸로 때려죽이면 안 돼요!’ 하고 외치며 그의 뒤를 쫓아가려던 이예주는, 불쑥 자신의 앞길을 막는 누군가 때문에 미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어허! 거, 주인 말씀 잘 듣게, 아가씨. 보아하니 손님께서 급한 용무가 있나 본데, 괜히 갔다 와서 봉변당하지 말고. 노예 생활을 하던 도중 계약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도망쳤다가 되레 영구 노예 계약을 맺은 이들을 내 여럿 보았네.”
가게 주인이었다. ????춘향전????의 변 사또처럼 얄팍한 콧수염을 기른 당과 가게 주인이 단내를 풀풀 풍기며 이예주의 앞을 막아섰다.
주인이나 노예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그녀는 아연해졌다.
“하, 주인 말을 들어…… 누가 주인이에요? 그리고 누가 노예고요?”
“크흠, 좋은 사슬을 손목에 칭칭 감은 것을 보아하니 아가씨 주인은 좋은 분인 모양이군. 싸구려 사슬을 매단 탓에 쇳독이 들어 피부가 퍼렇게 상한 이들도 내 여럿 보았네.”
“허, 허허. 나 참.”
그녀가 기가 막혀 답도 못하고 영혼 없는 웃음을 짓는 것을 뿔이라도 난 것이라 착각한 모양인지, 가게 주인이 방금 막 튀긴 빨간 사과 당과를 내밀며 달래는 어투로 말했다.
“이거 먹고 얌전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으면 곧 데리러 올 거야, 아가씨.”
“됐어요. 저도 많이 가지고 있거든요?”
또다시 언급된 주인이라는 말에 이예주는 쌀쌀맞게 대답하며 용케도 흘리지 않고 쥐고 있던 당과 꼬치들을 보여 주었다.
가게 주인이 멋쩍은지 샐쭉 웃음을 짓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예의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예주는 다시 한 번 람이 사라진 거리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발이 빠른 건지 뒤꽁무니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이번에는 제 뒤로 펼쳐진 또 다른 골목을 바라보았다.
분명 붉은 개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왔던 것 같은데, 그 요망한 것은 그사이 제 주인을 따라나섰는지 역시나 머리카락 한 가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람이 사라진 쪽을 향해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려 있는 당과 하나를 씹어 먹었다.
와사삭. 굳은 설탕 시럽 때문에 입안에서 부서지는 당과 조각들이 아까보다 딱딱했다.
나름 맛있게 먹고 있던 포도였는데 이제는 지독히도 달아서 오히려 쓰게만 느껴졌다.
이예주는 그럼에도 포도 알 6개를 모조리 먹어 치웠다.
이 세상 온갖 짜증을 담은 얼굴로 험악하게 우걱우걱 파편들을 씹던 그녀는, 마지막 조각 하나까지 모조리 꿀떡 삼킨 후 ‘에이 씨!’ 하며 빈 꼬챙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맛없어.
맛없어 죽겠다는 것이 문제인데, 아직 손아귀에 꽤 많이 들려 있는 것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풀 죽은 강아지처럼 중얼거렸다.
“씨이…… 이렇게 나만 또 두고 가면 어떡해!”
설탕이 흘러 굳은 손이 잔뜩 찐득거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당과들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이예주는 끈적임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그것들을 쥐고 있는 것을 택했다.
* * *
처음엔 이예주가 조금만 자리에서 뒤척여도 눈을 빛내며 쏘아보던 가게 주인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금방 그녀에게 관심을 끄고 몰려오는 손님을 받았다.
그렇게 금화를 잔뜩 받아 놓은 주제에 정말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태평한 그 모습에 그녀가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예주는 ‘문’을 넘자마자 바로 바닷가에서 잡혀 버린 탓에 도망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도망치면 동쪽 대륙을 때려 부순다며 이를 갈던 남자의 말이 이제는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람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한산하던 길거리가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나비 아저씨가 여러 번 이상하다고 중얼댔던 것처럼 정말 무슨 날인지, 상복처럼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거리 한복판을 뛰어다녔다.
지나가면서 하도 먼지를 피워 대는 탓에 이예주는 결국 원래 있던 당과 가게의 옆자리에서 조금 떨어졌다.
한산한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서리 틈에 기대 앉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심심풀이로 다디단 당과들을 끊임없이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희한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족장님! 동쪽 대륙의 위대한 족장님!”
“동쪽 대륙의 위대한 족장님! 우리들에게 바다를 주시고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괴상한 노랫말의 곡소리였다.
이예주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호기심 가득한 눈을 돌렸다.
부유한 주택들이 세워져 있는 바닷가 부근으로부터 한 무리의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2층 높이의 커다란 수레를 끌며 거리 한가운데를 따라 걷고 있었다.
수레 위에는 수많은 꽃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맨 꼭대기 층에는 화려한 금으로 덧씌워진 네모난 관이 놓여 있었다.
황금색 관도 빛났지만, 꽃에도 뭔가를 바른 듯 반짝거려 멀리서 봐도 눈이 부셨다.
점점 다가오는 그것은 목을 한껏 빼 들어야 그 끝이 간신히 보일 만큼 장성하고 성대했다.
“……상여?”
그래, 꼭 한국의 상여 같은 모양새였다.
아이고, 아이고.
상여를 끌며 다가오는 검은 상복 무리의 곡소리가 한층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열심히 장사를 하던 상인들, 그리고 그 가게 앞을 지나가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심지어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쫓아 나와 모두들 ‘족장님!’을 외치며 거리에 절을 하고는 엉엉 울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비통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며 숙연해졌다.
모두들 엎어져서 우는 바람에 이예주는 저 혼자 당과를 먹고 있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에 가져다 대던 당과 꼬치를 슬쩍 내리며 덩달아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몸도 조심스레 일으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어앉았다.
“정말 너무 안됐지 뭐야.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족장님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산에서 내려와 신인류들을 몰아내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건데. 족장님이 죽으면 과연 그 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차기 족장이 되어 마을을 잘 이끌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예끼, 이 사람아! 누가 들으니 그런 소린 하덜 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