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2)화 (93/319)

물론 저에게도 명령을 마구마구 내뱉는 남자지만, 황조롱이와 나비 아저씨에게 내린 지시에는 정말로 지켜야 한다는 엄중함이 담겨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가 내뱉은 도둑고양이의 이름인 ‘나비’가 참 다정하다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다정한 어감의 이름.

“해질 무렵 회색 토끼 그레이의 주점에서 만나지. 가라.”

“오호라! 안 그래도 며칠 전 그레이가 새끼를 보아서 당근을 가지고 들를 참이었는데 잘됐로라! 그럼 다녀오겠로라, 주인!”

“다녀올게여, 주인님!”

나비 아저씨와 황조롱이가 람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골목골목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얼마 안 가 희미하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퍼드덕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황조롱이가 새의 모습으로 변해 힘껏 날갯짓을 하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붉은 개.”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가 훌쩍 떠난 한산한 골목길, 람이 문득 붉은 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저도 임무를 주세요, 주인님!”

람이 채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요망한 것이 덥석 그에게 달라붙으며 외쳤다. 

그 모습에 이예주의 눈이 토끼처럼 댕그래졌다가, 곧 요망한 것이 커다란 수박 덩어리들을 뒤흔드는 것을 발견하고 부릅 홉떠졌다.

“저도, 저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요, 주인님!”

“…….”

“제발 저에게도 명령을 주세요. 주인님, 주인니임……!”

남이 들으면 명령을 못 들어서 환장한 것처럼 붉은 개가 람에게 애원하듯 달라붙었다. 

그가 거절의 말이라도 내뱉을라치면 곧바로 울어 버릴 심산인 듯 커다란 눈알에 몽글몽글 눈물이 차올랐다. 

아까 표독스러운 얼굴로 자신에게 막말을 지껄여 대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요망한 계집이렷다! 

이예주가 기가 막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잠시 붉은 개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흘끗 눈을 들어 붉은 개 너머에 서 있는 이예주를 쳐다본 것은.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마치 세균 검열이라도 하듯 이예주를 바라보자마자 그의 동공이 가장자리부터 벌건 핏물에 점점이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본 자체에 열이 뻗쳐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담 페니의 가게 안에서 벌어진 남자의 만행 덕인지, 자신의 시선이 잔뜩 삐딱해지긴 삐딱해졌나 보다. 

그의 눈이 꼭 자신의 의중을 묻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예주는 완전히 시뻘게진 람의 두 동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한두 번 속은 줄 아나. 

마누라 눈치 보는 남편도 아니고 뭘 새삼 날 바라보고 그런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심술궂은 마음에 이예주가 람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럼 붉은 개, 너는 나와 같이 가지. 잠시 거리를 둘러보고 바로 회색 토끼의 주점으로 간다.”

그나마 드문드문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시장 거리를 바라보며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피우던 이예주는,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져 땅을 치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몇 걸음 뒤에서 동태를 살피며 뒤따라오는 것이 네 임무다.”

“네, 주인님! 저 잘할 수 있어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주인님!”

“그래.”

탐스러운 머릿결을 살랑살랑 흔들며 붉은 개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빵빵한 몸매와 다르게, 그녀는 정말 갯과 동물처럼 람 앞에서는 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동그랗게 뜬 눈망울을 깜빡이는 붉은 개의 모습은 누구라도 혼을 쏙 빼 놓고 남을 만큼 요망했다. 

곁눈질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귀여운 척한다.’라고 생각했다. 

귀여운 척이 아니라 진짜 귀엽다는 것만큼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대충 꼴값들을 끝낸 건지 남자가 ‘쩔컥, 쩔컥!’ 두어 번 성의 없이 이예주와 이어져 있는 사슬을 흔들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그만 걷지. 동쪽 대륙은 골목이 복잡해서 길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더니 그녀가 아차 할 새도 없이 휙 돌아 혼자 뚜벅뚜벅 큰 거리로 걸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남자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그녀는 불퉁한 목소리로 말대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데 어떻게 길을 잃어버려요.”

그녀의 불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시늉조차 없었다. 

흘끗 붉은 개를 바라보자 그녀 또한 람이 말한 ‘임무’라는 것을 지킬 심산인지 람과 이예주가 걷기 시작해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예주는 울적한 기분으로 람을 따라 걸었다. 쩔컹쩔컹, 질질 끌려가는 그녀의 심정을 대신해 주듯 람의 손에 들려 있는 사슬이 청량한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       *       * 

남자는 정말 제가 한 말을 지키려는 듯, 하염없이 시장 바닥을 걸어 다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기만 하다 보니 오히려 좀이 쑤신 것은 이예주였다. 

마을 골목과 거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복잡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타고 한 집 건너 한 집, 비슷한 가게와 식당이 죽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길이 나타나는 건 줄 알고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더랬다. 

그녀가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고 깨달은 것은 당과를 파는 가게 앞에 서 있던 몇몇 꼬마 애들을 세 번째로 보았을 때였다. 

한 30분 전, 엄마 손을 잡고 가게 앞에서 떼를 쓰던 파란 옷의 조그만 꼬마 하나가 기어이 원하는 걸 얻었는지 꼬치에 끼워져 있는 빨간색 당과를 쪽쪽 빨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불뚝 울화가 치솟았다. 

그녀는 참지 않고 앞서가는 까만 뒤통수를 불렀다.

“저기요.”

“…….”

“저기요. 저기요!”

한 번만 무시한 것이면 못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니다. 

이예주는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람 때문에 벌컥 열이 받아 이번엔 제가 쩔컹쩔컹 사슬을 잡아당겼다.

“이봐요! 람! 람!”

인내력이 다 타서 없어질 때쯤이 돼서야 그가 드디어 그녀의 애탄 부름에 돌아보아 주었다. 

“왜.”

“저기요,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예주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별 질문을 다 받겠다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짧게 대꾸했다.

“뭐 하긴. 마을 구경 중이다.”

“……예? 뭐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예주는 순간 제 귀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있잖아요, 마을 구경을 대체 왜요? 왜 하는 건데요? 누구 찾는 사람 있어요?”

“……다른 대륙보단 동쪽 대륙에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지.”

“예엑?!”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은 마을 구경을 한다는 것보다 더 환장할 소리였다. 

볼거리가 많다니? 

그럼 관광이라도 하기 위해 이러고 있다는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싶어 재빨리 람의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혹시 그가 자신에게 농담을 거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운 미간을 좁힌 채 되레 반문하듯 그녀를 한껏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예주는 깨달았다. 

이 자식, 장난 아니구나. 

그사이 남자가 찌푸렸던 미간을 다시 쭉 펴고 한 번만 더 관용을 베풀어 준다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동쪽 대륙에 다시 장이 서려면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곧 떠날 테니 인간 구경을 할 수 있는 날은 오늘밖에 없을 텐데.”

“그래요. 인간 구경하는 건 좋아요. 좋은데요. 근데 생각보다 사람들도 없고요. 아니, 이게 아니라. 대체 왜…… 왜 인간 구경을 해야 하는데요?”

“마음에 안 드나?”

“아, 그러니까 왜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왜!”

왜 같은 곳을 빙빙 돌아야 하냐고, 이 자식아!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어 이예주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 들었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더 답답한 듯한 남자의 기세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봐도 자신처럼 검은색 천 뭉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을 남자 뒤만 졸졸 따라 걸었더니 정말 더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이 남자는 참으로 태평한 소리를 지껄여 댔다. 

마을 구경 중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화내는 것도 잊은 채 멍청하게 남자의 얼굴만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아까부터 왜 계속 그런 표정이지?”

“…….”

“꼭 심통 난 아이 같군.”

그걸 몰라서 묻냐? 

이예주는 진심으로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남자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지만 않았어도 물어보았을 것이다. 

허탈한 심정으로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덥고 배고프고 다리 아프고 짜증 났다. 

어디선가 솔솔 달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피어났다. 휙 곁눈질을 하니, 그들이 서 있는 가게에서 새 과자를 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엄마를 졸라 당과를 얻어 낸 아이가 이번에는 새것을 들고 신나게 이예주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 단내를 폴폴 풍기는 투명한 시럽들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아련한 표정으로 저거라도 핥아 먹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뒤흔들 때였다. 

그녀의 머리맡에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 자락이 조금 펄럭였다.

“……어린것에겐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면 된다고 그러던데.”

고개를 드니 남자가 짐짓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어린 인간 주제에 다루기가 까다롭군.”

“……뭐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거 혹시 나에 대해 말하는 거냐고 채 물어보기도 전에 남자가 사슬도 놓고 휙 멀어졌다. 

“어, 어디 가요!”

예상치 못한 남자의 돌발 행동에 이예주가 당황하여 버벅거리는 사이, 남자는 기다란 다리를 휙휙 움직여 순식간에 당과 가게 앞에 당도했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놀라서 자빠질 지경인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판대에서 열심히 과일과 채소 따위를 튀기던 가게 주인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람이 건넨 무언가를 받은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바로 헤실헤실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얼마 후 그는 양손 가득 미어터져라 당과 꼬치를 들고, 휘적휘적 이예주의 앞으로 걸어왔다. 

“자, 들어.”

남자는 손에 든 것을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남자가 사슬을 잡고 있지 않으니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이예주는 제 앞에 달큼 새큼한 냄새를 퐁퐁 풍기는 당과 다발을 얼뜨기처럼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투명한 설탕 시럽을 잔뜩 끼얹어 반질반질한 과일들이 먹기 좋게 잘린 채 꼬치에 차례대로 끼어 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당과들이 색색이 모여 있으니 꼭 꽃다발 같았다. 

미끌미끌한 시럽이 과일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려 람의 손을 적셨다. 

끈적거릴 텐데. 

설탕물로 젖어 들어가는 그의 손등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왠지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안 들고 뭐 하지?”

“왜…….”

남자가 한 번 더 당과 다발들을 휘이 흔들자 달큼한 냄새가 훅 올라와 콧속을 메웠다. 

너무 달아서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다. 

이예주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 왜…… 왜 줘요?”

그녀의 말에 남자가 별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먹고 싶어서 그렇게 침을 질질 흘렸던 것이 아닌가?”

“내가 언제……!”

“받아. 먹기 싫으면 버리든가.”

버린다는 말에 이예주가 냉큼 남자의 손에서 낚아채듯 당과 꼬치들을 빼앗아 왔다. 

그러는 동안, 시럽이 떨어져 끈적끈적하게 젖은 남자의 손과 그녀의 손이 스치듯이 맞닿았다. 

그 탓에 그녀의 손도 금세 끈적하게 젖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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