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1)화 (92/319)

자고 일어나니 머리 손질도, 화장도 끝나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사람 또한 달라져 있었다.

“어서 나와여, 누나! 뭐 해여!”

조롱이의 짜증스러운 재촉에 이예주는 꾸물꾸물 벽 뒤에서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구두도 아니건만 굽이 있는 실용화가 대리석에 맞닿으며 커다란 소리를 만들어 내어 괜히 민망해졌다. 

그 소리에 잠시 주춤거리던 그녀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겨 분수가 있는 홀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에게서 동시 다발적으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헤엑?!”

“오호, 이례주로라?”

“어머나, 세상에! 정말 너무너무너무 귀엽고 깜찍하잖아요!”

그들의 소리에 이예주가 부끄러운 듯 답지 않게 볼을 붉혔다. 

볼터치를 해서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두 볼이 탐스러운 분홍빛을 띠었다. 

컬이 들어간 고동색 단발머리가 목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손질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불에 그슬려 강화되었던 머리카락에 윤기가 도는 것을 보면. 

“정말, 생각보다 더 사랑스럽지 않나요? 이 아기 같은 원피스 좀 봐요, 어쩜 취향도 이렇게 귀여운지.”

마담이 이예주를 번뜩이는 눈으로 스캔하고는 흥분에 가득 차 돼지 코를 심하게 벌렁거렸다.

“한쪽은 이렇게 섹시하고 한쪽은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정말 비교하는 맛도 쏠쏠하네요. 호호호, 나도 참. 자기야.”

그녀의 의미 없는 자기 타령에 메이드가 맞장구를 쳐 주며 웃어 주었다. 

마담 페니의 말에 잠시 람의 곁에 붙어 있는 붉은 개를 슬쩍 돌아본 이예주는 헉 하고 신음과 함께 눈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아까는 화가 나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붉은 개의 인상이 180도로 변해 있었다. 

환한 빛 아래, 깊게 파인 채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베이지 색 옷을 입고 있는 붉은 개는 같은 여자가 봐도 침 나올 정도로 끝내줬다. 

별로 튈 것 없는 옷 색과는 반전되는 화려하게 구불거리는 붉은색 머리가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게다가 강아지상 얼굴은 어찌나 청순한지! 

아까는 그래도 개의 모습이라 ‘개 주제에’라고 비웃을 수 있었으나 이젠 그럴 수도 없어졌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그것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메이드가 옆에서 립스틱 지워진다고 속삭였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니임~!”

저 요망한 것이 옷을 주워 입고도 요기를 풀풀 풍기며 람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이예주의 눈에 번쩍 레이저가 쏟아져 나왔다.

“람!”

저도 모르는 사이 쪼르르 달려간 이예주가 요망한 것이 잡고 있는 람의 반대편 팔을 턱 하니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법 수줍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 어때요?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했는데…….”

람이 무심하게 고개를 들어 이예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곧바로 시뻘겋게 변했다. 

그 눈을 보자니 일순 마음이 따끔해졌지만, 그녀는 이내 기대로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그가 이예주를 내려다보는 사이 똥줄이 탄 붉은 개가 콧소리를 내며 람을 불러 대었다.

“주인니임! 저도요. 저도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했어요. 주인님! 저도 봐 주세요.”

저 요망한 것이 누구한테 자꾸 봐 달라는 거야! 

솟아오르는 짜증에 붉은 개를 한 번 세게 노려본 이예주가 람이 채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확 잡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짤그랑! 

사슬이 시끄럽게 공중에서 울었다.

“저! 옷 갈아입었어요! 저 먼저 봐야죠! 어떻냐고요!”

이예주의 무례한 행동에 람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그가 요망한 것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힘을 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이예주의 손을 차갑게 잡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짧군.”

“좀 그렇죠? 그래도 다른 옷 중에선 가장 무난한 거였어요.”

이예주는 람이 그래도 저를 봐 준 것 같아 조금 감동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었다.

“벗어.”

“헉! 버, 벗으라뇨? 여, 여기서요?”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는 대신,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뚜벅뚜벅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이예주와 붉은 개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남자가 도착한 곳은 분수대 양옆으로 늘어진 옷걸이 앞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옷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고 뒤로 돌아 이예주에게 그것을 휙 던졌다.

“어, 어!”

얼떨결에 남자가 던진 것을 받은 이예주는 멍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기다란 옷은, 그의 겉옷과 비슷한 검은색의 후드였다. 

그것을 확인한 이예주가 다시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람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명령했다.

“그걸로 갈아입고 와.”

“네에?!”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지? 

얼굴에 덕지덕지 칠하는 걸 질색하는 자신이 기껏 저 때문에 화장도 곱게 하고 나왔더니,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그것도 이런 괴상한 옷으로? 

람이 준 옷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칭칭 둘러싸고도 남을 만한 펑퍼짐함이 존재했다! 

이예주는 심각하게 그의 심미안을 걱정했다.

“장난이죠? 그쵸? 장난하는 거죠? 하, 하하. 무슨 이런 줘도 안 입을 옷을…….”

“내가 지금 너랑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걸로 보이나?”

“그, 그럼 진짜 이 미친 포대 자루 같은 걸로 갈아입으라고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보아 긍정임이 확실했다. 

이예주는 다시 한 번 놈이 제정신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싫어요! 그냥 이 옷 입으면 되지, 왜 갈아입어요!”

“짧다고 했다.”

“이게 뭐가 짧아요! 그럼 붉은 개는요! 쟤는 저렇게 가슴골도 다 보이고 완전 난리 났는데 왜 쟤한텐 뭐라 안 하고 나한테만 뭐라 하는데요!”

이예주가 불쑥 붉은 개를 손가락질하며 끌어들이자, 남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붉은 개와 무슨 상관이지? 난 너보고 갈아입으라는 것이지, 붉은 개에게 갈아입으라곤 안 했다.”

“아악! 그러니까!”

이 말 안 통하는 구닥다리 같은 놈아! 이예주가 답답하다는 제 가슴을 퍽퍽 내리치고는 애써 심신을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짓씹듯 말했다.

“됐어요. 됐고요! 난 절대 안 갈아입을 거야! 저는 그냥 이 옷 입고 싶다구요!”

“입고 싶으면 입어. 값을 지불할 능력이 된다면 말이지.”

이예주의 말에 람이 오만하게 웃으며 마담 페니에게 가격을 물었다. 

마담 페니가 그녀답지 않게 흠칫 눈치를 보며 “금화 50개인데 자기에겐 특별히 할인해서 45개로 내려 줄게요. 할부는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현대에서 쓰던 지갑이 있어도 돈을 낼 방도가 여의치 않을 마당에, 이예주의 수중에 금화 50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저놈이 어쩐지 곱게 옷을 사 주더라. 그럴 리가 없지, 없고말고. 

친절하신 람 덕에 이예주는 오늘도 뚜껑이 열리면 정말 온 세상이 붉게 보인다는 진귀한 경험할 수 있었다. 

옷을 찢을 듯이 쥐고 잠시 바르르 몸을 떨던 그녀가 결국 터덜터덜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시 탈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홀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에 나비는 이미 한쪽 구석에서 이를 딱딱딱 부딪치며 벌벌 떨고 있었고, 마담 페니는 변신이 풀려 어느덧 머리 위로 핑크빛의 돼지 귀가 솟은 상태였다. 

목을 짓누르는 묵직한 살기에 담담한 것은 오직 황조롱이와 붉은 개뿐이었다.

“분명 완전히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것으로 입히라고 했을 텐데.”

“주, 주인님! 그, 그것이……!”

“명령을 듣지 않는 것도 모자라, 감히 저런 넝마 조각을 입혀? 다시 인간들의 발밑에서 구르는 미물 따위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보군, 돼지.”

주인의 말에 마담 페니가 허옇게 들뜬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곧바로 맨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빌었다.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주인님이 소, 손님을…… 그, 그것도 어린 인간을 데려온 적은 처음인지라 미천한 것이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마지막 기회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누구도 알아볼 수 없도록 싸매라. 속살 하나라도 노출된 부분이 있다면 그 부위만큼 네 신체도 포기하는 것으로 알아듣지.”

“예,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기듯 뛰듯 허겁지겁 멀어지는 마담 페니의 뒷모습을 보며 황조롱이는 생각했다. 

인간 여자에 대한 감시를 조금도 허투루 해선 안 되겠다고. 

어쩐지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와 목 뒷부분을 뻐근하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       *       *

번쩍번쩍한 마담 페니의 옷 가게 건물에서 검은색 장포를 입은 장신의 남자와 황조롱이, 나비, 그리고 썩은 표정의 붉은 개가 차례대로 나왔다. 

나비의 말처럼 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장날치곤 너무나도 한산했다. 

람의 시뻘건 눈이 날카롭게 빛을 내며 거리를 샅샅이 훑었다. 

마을 전체의 공기가 무거웠다.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그뿐이 아니었는지 나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거 참 이상하로라. 다른 때 같으면 당과 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어린 인간들이 저쪽에 발 디딜 틈 없이 꼬물꼬물 모여 있을 텐데…….”

그가 가리킨 고구마 당과 가게에는 몇몇 어린아이들만 있을 뿐, 그 외의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비는 “실로 이상하로라.” 하고 근심 어린 투로 덧붙이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한 ‘어린 인간’의 범주에 속해 있는 인간이 아직도 건물 입구에서 미적거리며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철저히 둘러싸여 있는 인간은, 자칫 잘못 보면 그냥 커다란 검은색 덩어리 같았다. 

펑퍼짐하고 커다란 겉옷이 그녀의 몸에 잘 맞지 않은지, 거리 바닥에 그 끝이 닿아 질질 끌렸다. 

후드 또한 머리 전체를 푹 덮고도 자꾸만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그것을 연신 머리 위로 치켜 올리는 인간 여자의 손길이 어린 인간치고는 굉장히 거칠었다. 

올려도 흘러내리고, 다시 쳐올려도 또 흘러내리는 후드 때문에 인간 여자가 끝내 “망할, 망할!” 하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은 양발을 쿵쿵 굴렀다. 

나비는 가슴이 선득해질 정도로 거친 욕설을 내뱉는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후드 사이로 흘끗흘끗 보이는 얼굴이 더위와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동쪽 대륙은 해안가와 밀접해 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아, 여름에도 선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꺼운 옷으로 꽁꽁 싸맬 수준까지는 절대 아니었다. 

초여름인 지금, 인간 여자의 차림은 좋게 봐주려고 해도 쪄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깨를 모두 훤히 드러내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 붉은 개와 확연히 대조되는 차림이었다.

인간 여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휙 걷었다. 

붉게 상기된 뺨을 선선한 공기에 노출하여 잠깐이라도 식히기 위해서였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다.

쩔컹, 쩔컹! 

주인이 거칠게 사슬을 잡아당기자, 아직도 건물 입구 안쪽에 서 있던 이예주가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끌려 나왔다.

“아악! 얘기 없이 잡아당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너야말로 뭉그적거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지? 그리고 모자 뒤집어써.”

람이 이예주의 머리통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재수 없게 명령했다. 

그녀는 곧바로 항의했다.

“더워서 쪄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제발 모자는 봐주면 안 돼요? 제에발요.”

“잘 때도 사슬에 묶여 자고 싶으면 벗고 있든지.”

그들은 나오기 전부터 꽥꽥 언성을 높여 한바탕 거나하게 협상했다. 

물론 꽥꽥댄 쪽은 이예주뿐이었다. 

람은 그저 발악하며 떼를 쓰는 아이에게 사슬이란 미끼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었고, 미끼란 것을 알고도 덥석 문 건 그녀였으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그래도 잘 때는 사슬을 풀어 주겠다는 소리에 이예주는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뒤집어썼다. 

두꺼운 천 속에 다시 열기가 훅 들어찼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야한 차림새의 붉은 개와 사슬을 들고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면서, 보이지 않게 욕을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제 욕하는 건 어찌나 귀신같이 알아채는지, 남자가 휙 하고 뒤를 돌아 시뻘건 눈동자를 부라린 탓에 다시 ‘헙’ 하고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입을 다문 인간 여자를 확인한 람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거리로 시선을 향했다. 

본디 표정이 별로 드러나지 않던 그의 얼굴이 고개를 돌리는 즉시 무섭고 딱딱하게 굳었다. 

그 좋지 않은 기세에 이예주를 뺀 나머지 신인류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상하군.”

람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동쪽 대륙 계약자의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에? 생명의 기척 말이로라? 그, 그렇지만 동쪽 대륙 족장은 주인님과의 계약으로 인해 수명을 많이 늘렸지 않로라? 그, 그런데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나비가 람의 말에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롱이가 황금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왜여? 시, 심각한 거예여?” 하고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황조롱이.”

“예? 예?!”

“가서 현재 동쪽 대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고 오도록.”

“에에, 예옙! 주인님!”

“나비는 가서 동쪽 대륙 족장의 저택에 숨은 들쥐를 데려와라.”

짧고 요연하게 명령을 내리는 람의 말투에서 명령에 익숙한 윗사람의 태도가 묻어나 이예주는 새삼 놀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