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90)화 (91/319)

“자꾸 이러면 주인님 부를 수밖에 없어여, 붉은 개.”

“왜? 물어뜯게 놔둬, 놔둬!”

조롱이의 뒤에 교묘하게 몸을 숨긴 상태로 이예주가 깐족댔다. 

붉은 개가 다시 이를 드러내자 조롱이가 재빠르게 소리쳤다.

“누나도 마찬가지예여! 그만두지 않으면 진짜 주인님을 부를 거예여. 주인님! 누나랑 붉은 개 싸워여! 주인…… 우웁!”

조롱이가 정말로 람을 부를 듯 목소리를 높이자 이예주가 당황하여 황급히 거품 묻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쓰고 짠 그녀의 손맛을 본 조롱이가 발악했다.

“나가.”

이예주가 붉은 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못내 분을 삭이기 힘든 듯 여전히 독 오른 눈으로 이예주를 노려볼 뿐이었다. 

조롱이가 여전히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며 제 주인을 필사적으로 불러 젖히려고 노력했다.

“우웁, 우우웁! 주인! 우우웁!”

“나가라고, 빨리!”

결국 주인 소리가 이예주의 손아귀 사이에서 흩어져 나오고 나서야 붉은 개는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샤워실을 휙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서릿발 같던 샤워실 내부의 공기가 깨졌다. 

완전히 닫힌 문을 확인한 이예주가 조롱이를 틀어막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는 재빠르게 세면대로 달려가 입을 헹궜다.

“에퉤, 에퉤퉤! 아고 써! 아구구! 쓰고 짜! 말로 하면 되지, 왜 남의 입에 손은 집어넣구 그래여!”

이예주는 아직도 바닥에 떨어진 채 쫄쫄쫄 물을 뿜어 대는 샤워기를 주워 들며 대꾸했다.

“너야말로 안 끝내려고 했잖아. 네 주인을 부르려고 들어? 미쳤어, 미쳤어.”

“그, 그건…… 그렇게 안 했으면 누나랑 붉은 개랑 정말 싸울 것 같으니 그런 거져…….”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조롱이가 있는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돌려 잠갔다. 

오랫동안 바닥에 샤워기를 방치해 둔 탓에 대리석 바닥이 온통 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물론 샤워실이니 물에 젖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했던 처음 샤워실을 생각하니, 마담 페니와 그녀의 메이드들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머리만 대충 감으려 했던 이예주는 세면대 옆쪽으로 죽 늘어져 있는 샤워 부스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 탓에 사슬을 놓친 황조롱이가 ‘어, 어!’ 하고 당황하더니 따라붙으려 들었다.

“어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샤워할 거야!” 

이예주가 눈을 부라리자 조롱이는 결국 더 따라붙지 못하고 세면대 근처에 섰다. 

샤워 부스는 다행히도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내 나가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려는 조롱이에게 무서운 얼굴로 당부했다.

“보면 죽을 줄 알아.”

“보라고 해도 안 볼 거거든여!”

황조롱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 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사슬을 단 채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쏴아아―. 

천장에 달린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물에 닿으면 쇠가 녹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제발 녹이 슬다 못해 부서졌으면 하는 심정으로 손목을 감싼 수갑에 신나게 물을 뿌려 대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그녀는 샤워 부스 안의 수납장에 놓여 있는 커다란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리고 나왔다. 

바닷물에 푹 절어 있는 옷을 다시 입기가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지 한 톨 없던 대리석 바닥은 이제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조금 야시시한 차림 탓인지 조롱이가 수증기와 함께 샤워 부스에서 빠져나오는 이예주를 보자마자 ‘헙!’ 하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으악! 눈 아프니까 빨리 옷 갈아입으러 가여!”

“이게 죽을라고! 나 그럼 옷 갈아입으러 갈 테니까 아까 일은 네 주인한테 절대 이르면 안 돼.”

그녀가 작은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쭉 짜내며 말했다. 

황조롱이는 바로 답하지 않고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주, 주인님이 누나에 관한 건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했는데여…….”

“그게 왜 나만 관련된 일이야! 너도 관련된 일이잖아!”

자신과는 관계없는 싸움이라는 듯 슬쩍 빠지려 드는 태도에 이예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악해졌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주먹을 들어 보이며 조롱이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래서 기어이 일러바치시겠다?”

“어, 어…….”

“어?!”

“마, 말 안 할게여! 이것만 비밀로 할게여!”

당황하여 버벅거리던 조롱이가 뒤늦게 ‘악마야, 악마!’ 하고 무어라 저주를 내리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한 번 후비적거릴 뿐이었다. 

결국 확답을 받은 이예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어 번 두드린 후 벗어 놓았던 람의 겉옷을 몸 위에 걸친 채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누나.”

조롱이가 조금은 다른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것은, 문 앞에 다다라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댈 쯤이었다. 

“……왜?”

그의 부름에 그녀가 반 정도만 몸을 돌리고 느릿하게 답했다. 

몸을 반만 돌려서 그런지 조롱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둔한 이예주라도 그 목소리가 전과 다르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있잖아여.”

“…….”

“안…… 물어봐여?”

뭘? 붉은 개는 왜 널 엘로라고 불렀는지? 또 네 누이는 대체 어쩌다가 인간들에게 잡아먹힌 건지? 

이예주는 황조롱이가 말한 ‘물어봄’의 범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사실 내뱉기도 전에 황조롱이가 먼저 가로챈 탓도 컸지만.

“왜 붉은 개가 그렇게…….”

“말하지 마.”

머릿속에 엄마, 봉구, 수학여행 따위의 단어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그래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먼저 나서서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조롱이의 말을 막은 것은. 

딱히 이유를 꼽으려 해도 말할 수 없었다. 

이건 그냥. 그래, 그냥…….

“그냥…….”

“…….”

“……그냥 기억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이예주는 다시 몸을 돌려 힘차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완전히 샤워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황조롱이는 한마디도 없이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예주에게 묻고 싶은 게 있던 것은 오히려 그였지만 끝내 물을 수 없었다. 

과거가 들춰져 슬프고 난감한 건 자신인데, 왜 그녀가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텅 빈 샤워실엔 조롱이만이 우두커니 남겨졌다.

*       *       *

샤워실 밖으로 나오니, 아까 전 샤워실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던 예의 그 메이드 언니가 이예주를 반겼다. 

그녀를 따라 탈의실이라는 거대한 거울 방에 도착했다. 

사방팔방이 거울로 도배되어 있어 괜스레 민망해졌다. 

이미 이예주가 오기 전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방 안에는 옷들이 빽빽이 걸려 있는 이동식 옷걸이와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 두 명이 있었다. 

그녀를 안내해 준 메이드는 그들이 머리와 화장 담당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은 의상 담당이라고 소개했다. 

팔족 땅에서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같아 이예주는 시작도 전에 머리가 아파 왔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머리랑 얼굴은 그다음에…….”

마담 페니가 없으니 이번엔 메이드가 그녀의 흉내를 내며 이예주를 서둘러 옷걸이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대체 그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걸려 있는 옷들이 죄다 짧은 원피스 종류였다. 

치마들은 하나같이 다 괴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괴상한 해골 문양부터 시작해서 리본 레이스가 가슴 부분에 잔뜩 달려 있는 것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치마 뒷부분에 호피 무늬 꼬리가 달려 있었다. 

메이드가 그것을 바라보는 이예주에게 세트라며 호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건넸다. 

기겁을 하자 이번에는 다른 괴상한 것을 추천했다.

“아가씨는 사랑스러운 스타일이니까…….”

내뱉은 말에 충실하듯, 메이드가 하트 모양의 천이 가슴 부분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민소매 원피스를 권유했다. 

“아니에요! 제가 고를게요!”

꼼짝없이 여자가 건네는 끔찍한 것들을 입어야 한다는 무서운 확신이 들자, 이예주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옷가지를 헤쳤다. 

한참을 뒤진 후에야 그녀는 옷걸이의 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청색의 무난한 데님 원피스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옷들은 하나같이 민소매에 괴상한 문양, 허리께부터 펑퍼짐하게 퍼지는 플레어 스커트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무난한 검은색 자수가 놓여 있는 일자의 반팔 원피스를 찾았을 땐 거의 환호할 지경이었다. 

보기 드물게 현대에서 입는 디자인이었는데,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었으나 어깨 부분에 셔링(주름 장식)이 잡혀 있어서 나름 발랄한 맛이 있었다.

“이걸로 할게요!”

“그런 건 아무도 찾지 않는 건데…….”

“아니에요! 전 이게 좋아요!”

이예주가 그것을 들고 강력히 요구했다. 

어찌나 강력하고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는지, 등과 배 앞뒤에 괴기스러운 녹색 토끼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를 밀던 메이드도 끝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그녀의 말 때문에 이예주는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옴을 느꼈다.

“그럼 구두는 뭘로 준비할까요? 원피스가 파랑색이니 신발은 빨간색 하이힐로…….”

“아니요! 제가 신고 왔던 운동화 같은 건 없을까요? 발 아파서 구두는 신기 싫은데.”

“운동화요? 그게 뭐…… 아! 실용화 말씀하시는 거구나! 잠시만요.”

다행히 이 세상에도 운동화는 존재하는 듯, 메이드는 금방 신발이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이예주는 간신히 태극기 패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건 마담 페니표 수제 실용화예요.”

마담 페니표임을 강조하며 여자가 보여 준 신발은 하얀색 단화였다. 

단화라고 단정 짓기엔 신발 끈 구멍이 지나치게 많고 굽이 꽤 있었다. 

마담 페니표라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신발 뒷부분에 엄지손톱만 한 분홍색의 돼지 코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원피스들에 비하면 훨씬 무난한 디자인이었기에 이예주는 분홍 돼지 코 따윈 감수하기로 했다. 

“그럼 이쪽에서 갈아입도록 하세요.”

거울 방 중앙에는 마치 소극장 무대처럼 천막이 쳐져 있는 동그란 돔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탈의실이었다. 

천막 안에 들어가서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돔의 천장 부분에 커다란 조명이 달려 있었다. 

설마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젖히면 스포트라이트라도 켜지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를 불안함에 이예주는 좋지 않은 얼굴로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설마가 사람 잡았다.

속옷까지 새것으로 싹 다 갈아입고, 신발을 신자마자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자동으로 커튼이 쳐졌다. 

그리고 머리 위에 달린 조명이 눈을 파멸시킬 만큼 ‘팟’ 하고 강하게 켜졌다.

“어머나! 너무 귀여워요, 아가씨! 걱정했는데 파란색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눈! 눈 아프니까 불이나 좀 꺼 줘요!”

아까 전 샤워실에서 눈에 거품이 들어간 여파인지 금세 눈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조명을 꺼 주기는커녕, 그런 이예주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여자들이 까르르 웃으며 저들끼리 떠들어 댔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착용감은 어때요? 신발은 맞고요? 한번 돌아다녀 보세요!”

메이드 여자의 말마따나 이예주는 몇 걸음 걸어 다니면서 신발이 맞는지 확인했다. 

굽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신발은 현대의 운동화처럼 가볍고 푹신했다. 

다만 생각보다 치마가 짧아 허벅지 위로 뎅강 올라와서 그게 조금 민망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치마란 학창 시절 입었던 교복이 전부였는데, 그것조차 모두 무릎 위를 넘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짧은 치마가 어색해서 자꾸 손으로 끌어 내리는 이예주를 보고 메이드가 걱정스레 말했다.

“다리도 예쁜데 왜 그러세요? 지금 얼마나 잘 어울리시는데요! 혹시 옷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옷을 준비할까요? 아까 꼬리 달린 옷도 귀엽긴…….”

“아니요! 이 옷으로 할게요! 절대요.” 

고개를 세게 휘저으며 이예주는 옷이 마음에 든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치마에 손도 대지 않고 뻣뻣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런 이예주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메이드가 이내 그녀를 다른 메이드에게 양도했다.

“머리랑 화장을 마저 손보고 나가요.”

그냥 머리만 말리면 된다고 거절했으나 몇 번이고 앉히는 바람에 결국 이예주는 거울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자 노릇을 하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구나. 

평소에도 머리를 잘 감지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게 일상이었던 이예주는 이 모든 것이 다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다른 이가 머리를 매만지니 슬슬 잠이 쏟아졌다. 

그냥 대충 하고 잠 좀 잤으면 좋겠는데. 

꾸벅꾸벅. 병든 닭처럼 졸다 깨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그녀는 머리 손질이 끝나고 간질거리는 붓이 얼굴 가죽에 닿을 때쯤에는 아예 꿀잠을 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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