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89)화 (90/319)

“결국 도와줄 거면서…….”

“씨잉, 제가 누나 시중들러 온 줄 알아여?! 감시하러 왔지!”

쉼 없이 재잘거리면서도 조롱이가 샤워기를 그녀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조롱아, 저기 샴푸 좀!”

“이씨!”

투덜거리면서도 조롱이는 친절히 병뚜껑까지 따 주는 서비스까지 더하며 샴푸 병을 건넸다. 

덕분에 그녀는 수갑에 묶여 있어도 수월하게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쏴아아, 뜨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지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늙은이처럼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물을 머금기 시작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근데, 중간 지대라더니 정말 신인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나 보네? 이렇게 화려한 옷 가게도 운영하고……. 마담 페니, 대단하다. 대단한 거 맞지?”

“마담 페니는 사교성이 굉장하고 상술에도 능해여. 옷 가게가 아니라도 성공했을 거예여.”

“그러게. 말을 정말 쉴 틈 없이 하던데. 돈도 무지하게 벌겠지? 물 좀 더 뜨겁게!”

이예주의 요구에 조롱이가 또다시 지금 명령질하는 거냐며 떽떽거렸다.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거품이 잔뜩 인 머리를 씻어 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그녀에게, 조롱이가 진이 다 빠진다는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마담 페니에게 막상 남는 건 얼마 없을 거예여.”

“……응? 왜?”

“그거야 동쪽 대륙에 거주하려면 족장에게 많은 거주세를 바쳐야 하니까여. 전쟁 이후에 인간들과 신인류 사이에서 정한 조약이에여. 동쪽 대륙에 머물려면 신인류들은 족장에게 일정 금액을 줘야 해여. 인간들은 참 이상하게도 주인님의 땅을 자기들의 소유라고 엄청 우겨 대거든여.”

“헐. 달란다고 그대로 바쳐? 그리고 마을 족장이 인간이란 말이야? 그 인간도 시간족 뭐 그런 거?”

두 눈을 꼭 감고 박박 머리를 감으면서도 이예주는 입을 쉼 없이 움직였다. 

조롱이는 그녀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녀가 샴푸질을 한 번 더 하기 위해 샴푸 병을 더듬더듬 찾아 대며 ‘조롱아?’ 하고 부를 때쯤에야 그는 ‘에, 에!’ 하고 대답했다. 

깊은 생각을 하다가 깨어난 듯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였다.

“아니여. 마을 족장은 말더듬이 인간이에여. 그리고 신인류들은 뭐, 인간들의 돈 같은 거 모아 봤자 딱히 쓸모 있는 것두 아니구여…….”

“그래도. 텃세 부리는 인간들 꼭 있잖아, 왜. 마담 페니는 생각보다 착해 보이던데 막 물정 모르고 다 뜯기는 거면 어떡해.”

이예주가 마담 페니의 복스러운 돼지 코를 떠올리며 제법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번에도 조롱이의 답은 한참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들려왔다.

“……어쨌든 인간과의 1차 전쟁에 신인류들이 패한 건 맞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여. 오히려 다행이져. 동쪽 대륙을 소유하는 대신에 전쟁에서 패배해서 노예로 가둬 두었던 신인류들을 다 풀어 주기로 했었고. 또…….” 

다시는 인간들이 신인류를 강간하거나 먹지 않겠다는 조약도 만들었으니까여……. 

황조롱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무어라 덧붙였다. 

새 모이만큼 작달막한 소리는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응? 뭐라고? 물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

그러나 조롱이는 작게 덧붙인 뒷말은 다시 한 번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누나, 아직 멀었어여? 팔 아파여!”

“어? 거의 다 된 것 같…….”

그때였다. 

알콩달콩 머리 감기 놀이를 하던 그들의 뒤쪽에서 별안간 문이 거세게 벌컥 열리더니,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샤워실 내부에 텅텅 울려 퍼진 것은.

“지금 뭐 하는 거야?!”

“에, 에…….”

살벌한 목소리에 황조롱이가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넓은 샤워실 공기가 누군가로 인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거품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이예주만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제 머리를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누, 누구야? 누군데…… 아악! 눈 따가워!”

두 번째로 샴푸 거품을 씻어 내던 그녀가 불현듯 괴성을 지르며 눈을 마구 비벼 댔다. 

이예주의 비명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황조롱이가 허둥지둥 샤워기를 마구 쏴 댔다. 

“괘, 괜찮아여?”

“아악! 눈에 들어갔나 봐! 잘 좀 들어 봐!”

“잘 들고 있어여! 누나가 머리를 자꾸 이상한 데로 옮기잖아여!”

“앗, 뜨거! 차갑게, 차갑게!”

“수도꼭지 돌렸어여! 돌렸어여!”

“아, 차거! 얼굴에! 얼굴에 쏴! 조롱아, 얼굴에 쏘라……!”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뚜벅뚜벅 빠르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당장 집어치워!”

철썩. 누군가의 살을 사납게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샤워기가 공중으로 유려하게 물살을 흩뿌리며 챙그랑, 바닥에 떨어졌다. 

덕분에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을 홀딱 맞은 이예주가 ‘어푸풉’ 하고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벌게진 눈동자를 떴다. 

싸늘한 정적과 함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난감한 얼굴로 황금안을 굴리고 있는 조롱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새빨간 머리카락에 가슴 빵빵한 미인이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서 있는 것 또한. 

바스트를 강조하던 마담 페니의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는지, 여자는 연예인 시상식에서나 볼 법한, 쫙 달라붙는 탑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 지수를 드러내듯 깊게 드러난 가슴골이 빨간 머리털만큼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엘로!”

붉은 개가 다시 빨간 입술을 벌려 조롱이에게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바닥을 바라보길 고수하던 조롱이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고개를 번쩍 쳐들고 또 한 번 ‘에, 에?’ 하며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이내 죄지은 아이처럼 우물쭈물 답했다.

“예, 예주 누나 샤워기 들어 줬는데여.”

엘로? 생소한 이름에 갸웃거리던 이예주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샤워실 분위기를 서서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조롱이가 들어 주던 샤워기가 여전히 뜨뜻한 물을 내뿜으며 대리석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망할 개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조롱이의 팔을 내리쳐 샤워기를 던지게 한 거 맞지, 지금? 

이예주는 붉은 개에게 지금 당장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물론 마음은 벌써 훤히 드러난 요망한 것의 왕가슴에 챱(Chop)을 날리고 있었지만, 워낙 조롱이를 노려보는 붉은 개의 기세가 살기등등한 탓에 막상 나서기가 좀 난처했다.

그러고 보니 붉은 개는 자신이 아닌 조롱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쳤어. 정말 돌았구나, 엘로. 잠시 주인님을 따라다니는 동안 정신이 나간 거야!”

“에…….”

“왜 네가 이 인간 계집년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거야? 왜!”

“시, 시중은 아닌데여…… 그냥 예주 누나는 사슬 때문에 팔도 불편하니까 도와줄 겸…….”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엘로. 이딴 인간 따위가 뭐라고! 이 인간 계집이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설마 친구라도 먹었어? 신인류와 인간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냐고! 대답해!”

이예주는 내심 조롱이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그래도 꽤 긴 시간을 같이 붙어 다니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온갖 정은 다 들지 않았던가. 

누군가 그녀에게 조롱이와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면 친한 동생 자리쯤은 관대하게 내려 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조롱이를 바라보았는지 조롱이가 난감한 얼굴로 흘끗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이예주로서는 기가 막혀 뒷목 잡을 만한 발칙한 소리를 지껄여 댔다.

“친구는 아니구여…….”

어억! 저, 저게! 

순간 눈앞에서 불똥이 튀는 것만 같았다. 

이예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조롱이를 쏘아봤다. 

제 양옆에서 쌍으로 눈을 부라리는 두 여자 때문에 조롱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한층 더 부지런히 흔들렸다.

“그럼 뭔데?”

“그럼 뭐야!”

이예주와 붉은 개가 동시에 물었다. 

조롱이가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하는 것이 고역인 사람처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예, 예주 누나는 그냥 여행 동료인데여…….”

“동료? 예주 누나? 하! 예주 누나?”

그러나 고심 끝에 내뱉은 조롱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붉은 개가 바로 말꼬리를 부여잡고 늘어지기를 시전했다.

“누가 네 누나야? 네 누이는 따로 있어, 엘로! 인간들에게 뜯어 먹히고 죽어 버린 네 불쌍한 누이 말이야!”

“…….”

“게다가, 너 이 인간 계집한테서 이름도 받았다며? 정신 나간 짓거리 당장 집어치워! 네 누이를 생각하란 말이야! 네 누이! 이딴 인간 계집 말고 네 진짜 가족!” 

붉은 개가 ‘누이’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조롱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낯빛이 한순간에 하얗게 질려 갔다. 

너무나도 적나라한 표정 변화에 오히려 제3자인 이예주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지금껏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조롱이를 봐 오면서, 저렇게 새파랗게 얼어붙은 조롱이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같은 신인류인 포니의 참혹한 살해 현장에서도 그녀에게 보지 말라고 권할 정도로 덤덤했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타난 팔다리가 몇천 개씩 달린 끔찍한 괴물을 보고도 별다른 동요조차 없었던 조롱이였다.

자신과의 수도 없는 다툼에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어 대던 그 영악한 새가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조롱이의 모습에 이예주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직감했다. 

조롱이에게 ‘누이’는 이예주에게 엄마 혹은 봉구, 또는 수학여행과도 흡사하다는 것을. 

“벌써 잊어버린 거야? 엘로! 네 이름은 엘로야!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 인간들은 우리의 평생 숙적……!”

새하얀 얼굴로 굳어 있는 조롱이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심산인지, 붉은 개가 흡사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조롱이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순전히 흔들리는 조롱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였다.

“그만해!”

또 다른 이가 제 앞을 막아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붉은 개가 놀란 눈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인간 여자라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표독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넌 뭐야?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꺼져!”

“내가 먼저 조롱이랑 여기서 머리 감고 있었거든? 너야말로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꺼져!”

“이, 이게……!”

이예주의 우렁찬 목소리에 붉은 개가 가슴에서 목까지, 그리고 목을 넘어 얼굴까지 점점 시뻘겋게 물들었다. 

원래 잘잘못을 떠나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지! 

이예주는 기세를 몰아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더욱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조롱이 얼굴 안 보여? 너 때문에 애가 하얗게 질린 게 꼭 경기 일으킬 것 같잖아!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인간 계집년 주제에! 인간 계집년 주제에 뭘 안다고! 네가 뭘 안다고!”

“몰라!”

이예주가 당당히 무지를 선포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치만 알아도 너처럼 싸가지 없이 말 안 해!”

“뭐, 뭐? 싸가지?!”

“그래! 그리고 노크 몰라? 예의 없이 막 쳐들어와서 이게 무슨 행패야!”

“이, 이런 냄새나는 인간 계집이……!”

정말로 화가 난 건지 붉은 개의 송곳니가 순간 날카롭게 빛이 나더니 점점 길쭉해졌다. 

혹시 개로 변하려고 그러는 건가? 

사나운 사냥개로 변해서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무시무시한 붉은 개의 살기에 이예주는 싸우던 것도 잊고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차라리 이성을 잃은 개에게 물려서 람에게 이 요망한 것의 실체를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아플 테지만. 아닌가? 아주 많이 아프려나? 

으르르르. 

고운 여자의 얼굴에서 개의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물어라, 물어!

“그만! 그만해여!”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예주가 물리는 꼴은 볼 수 없었는지 어느덧 제정신을 차린 조롱이가 붉은 개에게 악담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로 두 여자 사이를 막아섰다. 

감았던 눈을 뜨며 이예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붉은 개는 아직 성에 차지 않은 듯 사납게 일갈했다.

“으르르르, 비켜! 너도 물어뜯는다, 황조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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