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람은 마치 전에 와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골목을 꺾어 들어가더니, 커다랗고 현란한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하게 건물 문을 열고 들어서는 람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예주는 외형만큼 화려한 내부를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건물 내벽은 금칠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온통 황금빛이었다.
다른 층 따윈 없이 건물을 통째로 터놓은 듯 엄청나게 높은 천장엔 으리으리한 샹들리에가 3개나 달려 있었다.
샹들리에의 크리스탈이 황금 벽에서 나오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내부를 빛냈다.
빛나는 홀 한가운데에는 사치의 화룡정점을 찍듯 커다란 분수가 놓여 있었다.
분수 안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힌 마네킹이 여러 개 서 있었다.
분수를 기점으로 양옆 공간엔 마치 연예인의 옷장처럼 옷걸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옷은 대충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해 입는 이예주 같은 막눈이 봐도 하나같이 귀하신 분들만 입을 것 같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들이었다.
심지어 전시용으로 보이는 분수 안의 마네킹에게 입혀 놓은 것조차 때깔이 좋았다.
저렇게 분수 안에 있으면 물이 튀어서 천이 상할 텐데.
이예주는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은 데 위치한 얼굴 없는 마네킹들을 바라보며 실없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런 걱정이 기우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분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들은 진짜가 아닌 듯 흘러내리는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홀로그램 같은 건가?
이예주는 곧 추측하는 것을 관뒀다.
어쨌거나 건물 주인이 어지간히도 돈이 남아도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와, 여기 어디예요? 진짜 화려하네.”
다시 한 번 사치스러운 내부를 둘러보며 말하자, 나비 아저씨가 얼른 답해 주었다.
“여기는 마담 페니의 옷 가게이로라.”
“옷 가게요?”
“그렇로라. 근데 이 여편네는 주인님이 오셨는데 옷 가게는 내팽개치고 어딜 싸돌아…….”
“나비! 내가 그딴 식으로 내 갤러리를 폄하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옷 가게라니! 어딜 봐서 내 갤러리가 그런 시장 바닥 가게와 같은 수준이라는 거죠?!”
그때였다.
벼락같은 비명 소리와 함께 분수 뒤편에서 퉁퉁한 중년 여성이 휘황찬란한 분홍 드레스 자락을 질질 끌며 나타났다.
중세에서 갓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차림이었다.
그 뒤를 메이드 복장을 한 젊은 여자 둘이 따라 걸어왔다.
이예주는 호통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등장한 중년 여성을 무심결에 돌아봤다가, ‘푸흡’ 하고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여자는 나비 아저씨 뺨칠 정도로 덩치도 크고 키도 컸다.
억지로 껴입은 듯한 드레스가 팽팽하게 그녀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옷 가게란 말이 굉장한 수치를 남겼는지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었다.
그녀의 얼굴 한가운데에 떡하니 달린 커다란 돼지 코가 그녀를 절대로 일반 인간이라고 볼 수 없게끔 만들었다.
분장 소품이라도 쓴 것처럼 툭 돌출된 돼지 코가 밝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유난히 핑크색으로 번들거렸다.
이예주가 황조롱이를 돌아보며 눈으로 묻자, 그가 입 모양으로 ‘돼지’라고 말해 주었다. 돼지족 신인류였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전갈을 받고 급히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악성 곱슬머리의 중년 여성이 나비에게 눈을 부라리던 것과는 천차만별의 태도로 람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람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붉은 개에게 어울릴 만한 옷이 있나? 당분간 마을에서 묵어야 하니 이목이 쏠리지 않는 것으로. 특히 네가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것만 아니면 된다.”
“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주인님! 주인님께서 제 보잘것없는 옷 가게를 찾아 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여자가 정말로 엄청난 광영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툼한 두 손을 모으고 감격에 가득 차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역시 신인류들은 하나같이 람순이들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예주 옆에서 나비 아저씨가 “언제는 옷 가게라고 부르지 말라더니. 정말 돼지족은 갈대 같로라.” 하며 덩달아 고개를 흔들어 댔다.
“붉은 개, 이쪽 아이들을 따라가서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요. 자기는 바스트가 되니까 조금 달라붙는 스타일이 어울릴 거야, 그치?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니 좀 밝은 계열로…….”
바스트를 강조하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위로 업해 보이는 그녀의 손짓에, 이예주는 자연히 붉은 개의 알몸을 회상하고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중년 여성이 정신없이 주절대며 붉은 개를 뒤에 있는 메이드 두 명에게 인도했다.
사나운 인상의 붉은 개에게 옷을 입히라는 명령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메이드들은 주춤거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야, 얼른 움직이지 않고 뭐 하니?”
그들의 꾸물거림을 보다 못한 중년 여성이 메이드 한 명을 집어 말하자, 그녀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조심스럽게 붉은 개를 안내했다.
붉은 개는 턱과 꼬리를 쳐들고 귀부인처럼 오만한 태도로 이예주의 앞을 고고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붉은 개의 시선이 슬쩍 이예주의 가슴팍에 머무르는 듯하더니 곧 피식, 조소가 그 눈동자에 어렸다.
의도된 것인지 가슴을 쭉 펴고 걷는 폼이 이예주의 기분을 몹시도 좋지 않게 만들었다.
개 주제에, 개 주제에! 패배감으로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인님. 붉은 개를 깜짝 놀랄 정도로 변신시킬 자신이 있어요. 요즘 마을에서 가장 유행인 것이 바로 가슴 위를 시원하게 깐 모양새의 탑 원피스인데, 보통 아가씨들은 흘러내리지 않게 솜을 잔뜩 넣곤 하지만…… 호호호호! 어머, 나도 참. 자기야.”
중년 여성은 제가 말하고도 민망한 듯 깔깔 웃으며 의미 없는 자기를 찾았다.
로라보다 더 괴악한 말버릇이라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그리고 이쪽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람이 흘끗 이예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중년 여성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이예주가 놀라 그와 중년 여성을 쳐다보았다.
중년 여성 또한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분홍색의 돼지 코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다른 곳은 다 사람 모양인데 왜 코만 그런 건지 묻고 싶을 정도로 복스러운 코였다.
“어머나! 세상에!”
재빨리 이예주를 위아래로 스캔한 중년 여성이 벌어진 입으로 탄성을 쏟아 내었다.
큰 키와 덩치 때문에 그녀의 앞에서 이예주는 한낱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이 귀엽고 아기자기한 인간 아가씨는 누구죠, 주인님? 혹시 이거 주인님의 의복인가요? 세상에, 세상에!”
중년 여성이 연신 박수를 치며 ‘세상에!’를 연발했다.
마치 만지면 깨지는 유리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예주의 근처를 아주 조심스럽게 맴돌던 여자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턱에 묶인 겉옷의 소맷자락을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꼭 아빠 옷을 뒤집어쓴 아이 같은 모양새예요. 주인님의 옷을 이렇게 깜찍하게 묶어 놓다니, 네?”
“아, 예…….”
“그만큼 사랑스럽단 소리예요, 자기. 난 마담 페니예요. 우리 갤러리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어느덧 이예주는 눈 깜짝할 새에 중년 여성의 자기가 되어 버렸다.
정신 사납게 몸을 돌린 마담 페니는 이번에는 람을 향해 수다를 날렸다.
“이 아가씨는 어떤 식으로 꾸며 드릴까요, 주인님? 주인님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묶어 놓으신 걸 보면…… 와우! 이 장난감 같은 사슬 좀 봐요, 자기.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인간 여자의 옷은 완전히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것으로 주어라.”
다행히 람에겐 그녀의 수다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담 페니의 말을 남자가 싸늘하게 끊었다.
마담 페니가 다시 두툼한 두 손을 부여잡고 돼지 코를 벌렁거리며 람의 말을 경청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요. 예 예, 주인님. 바로 준비 가능해요.”
“바닷물에 빠졌으니 닦을 것도 필요하겠군.”
“어머나! 어쩐지 짠 내가 좀 난다 했어요. 아가씨가 물놀이를 하고 온 걸 바로 알아봤죠, 저는. 바로 알아보고말고요! 뒤쪽에 저희 직원들이 간단히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에서 바닷물도 좀 닦아 내고 냄새도 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귀엽고 자그마한 사슬은 어떡하죠? 옷을 갈아입으려면 푸는 것이 좋을 텐데…….”
마담 페니의 두꺼운 손이 이예주의 손목에 걸쳐져 있는 수갑에 닿자 신기하게도 수갑이 정말 귀엽고 자그마해 보였다.
혹시 잠깐이라도 사슬을 풀어 줄까 싶어 이예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람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박살 내듯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사슬을 풀어 주면 또 도망칠 계집이니 여지를 남길 순 없지.”
“도, 도망이라뇨? 도망 안 쳐요. 정말, 진짜요! 그리고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연쇄적으로 탈출을 감행한 죄인이라도 된 듯한 취급에 울컥 억울해진 이예주가 곧바로 항의했다.
그러나 남자는 황조롱이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그녀의 항의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황조롱이, 따라가서 감시해라. 필요하다면 사슬로 압박해도 좋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은 네게 전적으로 사슬을 위임하지.”
“옙, 주인님.”
“허허, 참!”
이예주가 너무나도 기가 막혀 연신 ‘허허’ 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주인과 애완동물은 북 치고 장구 치고 저들끼리 아주 죽이 착착 잘 맞아 말을 끝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람에게 풀어 달라고 떼를 쓰려고 들 즈음에는 이미 사슬이 황조롱이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어차피 안 풀려여, 누나. 그냥 빨리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여.”
이젠 하다못해 조롱이 손에 질질 끌려가며, 이예주는 어쩌다 자신의 인권이 이렇게 바닥을 치게 되었는지 자못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 쓴 휴지처럼 구겨진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 건지 그녀의 뒤에서 마담 페니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지금도 귀여워 미치겠는데 옷을 갈아입히고 나면 얼마나 깜찍할지 기대돼 죽겠어요! 그쵸, 주인님?”
람이 마담 페니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했다.
그러나 황조롱이에게 이끌려 가며 떨어진 인권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예주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 * *
“여기 수건입니다, 아가씨. 물은 온수이니 바로 틀어 사용하셔도 됩니다. 용무를 끝내고 나오시면 탈의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깔끔하게 접힌 수건을 건네받으며 이예주가 대충 감사 인사를 웅얼거렸다.
여자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녀가 안내해 준 곳은 정말로 직원들이 쓸 법한 간이 샤워실이었다.
팔족 땅은 시간이 멈췄으니 그렇다 쳐도, 1000년 후임에도 샤워 시설이나 수도 시설은 현대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못 신기했다.
간이 샤워실이라고는 하지만, 웬만한 호텔 욕실 뺨칠 정도로 번쩍번쩍 광이 났다.
티 하나 묻어 있지 않은 대리석 바닥 위로, 바닷물이 찍찍 새어 나오는 자신의 더러운 운동화를 대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뭐예여, 안 닦고? 이왕 온 김에 대충 얼굴이라도 씻어여, 누나.”
그때 이예주와 같이 샤워실에 들어온 조롱이가 차랑차랑, 사슬을 흔들어 대며 그녀를 재촉했다.
노동하러 가는 길에 잠시 쉬는 노예라도 된 기분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흔들지 마!”
“힝, 씻으라 해도 뭐라 그래.”
조롱이가 입을 삐쭉이며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이예주는 조심스레 대리석 위로 발걸음을 옮겨 세면대에 다가갔다.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거울에 람의 검은 옷을 저승사자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꾀죄죄한 자신의 몰골이 비쳤다.
턱밑에 묶어 둔 소매의 매듭을 끄른 그녀는 커다란 람의 옷을 옆쪽 벽에 붙어 있는 걸이에 대충 걸어 놓고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메이드 언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수도를 돌리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 퐁퐁퐁 수도관을 타고 쏟아져 나왔다.
이예주는 물 온도를 맞춘 후, 거울 옆에 걸려 있는 샤워기를 들어 조롱이에게 건넸다.
“받아.”
얼떨결에 이예주로부터 샤워기를 건네받은 조롱이가 황금색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곤 요구했다.
“머리 좀 감게 옆에서 샤워기 좀 들고 있어.”
“에엑?! 그냥 얼굴만 대충 씻고 젖은 몸이나 닦지, 갑자기 뭔 머리를 감아여!”
“머리에서 냄새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그 붉은 개가 나보고 냄새난다 그랬잖아.”
“그래도여! 이따 숙소 잡은 후에 가서 씻으면 되지, 왜 여기서여!”
“아, 좀 도와줘!”
강압 아닌 강압에 입을 댓 발 내밀면서 안 올 것처럼 굴던 조롱이는 결국 터덜터덜 그녀의 곁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