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 먼저 걷고 그 옆을 붉은 개가, 그 뒤를 이예주가 잇따르자 멈춰 서 있던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도 발걸음을 떼었다.
이예주보다 조금 더 늦게 출발한 탓에 뒤에 있던 나비 아저씨는 붉은 개가 완전히 등을 돌려 걷자 그제야 조르르 옆에 따라붙어 속삭였다.
“……긍지도 자존심도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로라. 마을에는 다른 이에게 큰 빚을 지고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채주(債主) 집의 종살이를 해서 빚을 갚아 나가는 규칙이 있로라.”
붉은 개에게 들리지 않도록 딱 붙어 이야기하는 탓에 이예주는 어쩐지 귀가 간지러웠다.
때마침 또 다른 사슬을 든 중년 여자와 목에 사슬을 건 조롱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짝을 지은 것처럼 사이좋게 반대편에서 걸어와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뒤로는 온통 논과 밭이니 그들 또한 농사일을 하러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슬에 묶인 사람들은 다 신인류예요?”
나비 아저씨에게 이예주가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나비 아저씨는 뜻밖에도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로라, 아니로라. 오히려 마을 안에 더 깊이 가면 인간들이 신인류에게 돈을 빌려 종살이를 하는 것도 볼 수 있로라. 그러나 보통 이런 농사일은 인간들이 할 수 없으니 신인류들이 대신하는 것이 대부분일 뿐이로라.”
나비 아저씨의 말에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인간은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사막에서 한 차례 겪었음에도 멀게만 느껴졌었다.
인간들만의 고유 행위가 정말로 금지되었다는 것을 실제로 보고 나서야, 피부로 생생하게 와 닿는 것 같다.
기분이 약간 얼떨떨해지는 느낌이다. 사실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었기에 농사를 금지당한 게 어떤 건지 짐작하기는 좀 힘들었다.
새삼 학창 시절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웠던 국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석기 혁명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 실로 엄청난 것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3년 내내 시험을 볼 때마다 1번 문제로 질리도록 출제될 정도였다.
농경문화를 이룩하지 못했더라면 인간들은 지금에도 동물과 같이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해서 먹고 살아갔을 것이다.
밥 한 번 먹기 위해 원룸에서 나와 길거리에 떨어진 은행을 줍거나 뒷산에 올라 칡뿌리 같은 것을 캐고, 토끼, 노루 따위의 동물을 쫓아 온 산을 헤집으며 다녀야 할지도.
걷는 것과 뛰는 것이라곤 질색인 이예주는 연상되는 끔찍한 삶에 잠시 침묵하다가 애써 생각을 환기했다.
“그럼 왜 쟤는 긍지도 자존심도 없다고 그러는 건데요? 인간들이랑 같이 살아서? 쳇, 말만 들으면 인간들은 엄청 더럽고 지는 엄청 깨끗한 줄 알겠네.”
이예주가 앞서 걷는 붉은 개를 흘겨보며 비죽거렸다.
나비 아저씨가 그녀의 비꼬는 어투를 듣곤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신인류가 인간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까 말했로라. 야생에서 직접 먹이를 구하며 살기에는 생각보다 나약한 신인류들도 있기 마련이로라. 새로 태어나는 모든 신인류들이 주인님과 계약하는 건 아니니 말이로라. 그들은 인간들의 곁에서 살면서, 적당히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 준 후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로라.”
“그치만 람은 화나지 않을까요?”
“으잉?”
“신인류는 람이랑 동물이 계약을 해서 생긴 인류라면서요? 동물들이 신인류가 되기 전에 인간들에게 사육당하던 것처럼, 신인류가 되고 난 후에도 그렇게 사는 것을 보면 람이…….”
이예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앞서 걷고 있는 남자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쟁기질을 해 대는 소를 바라보던 람의 눈빛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지만, 사실 그가 화가 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껏 보아 왔던 그의 분노한 모습은 언제나 시뻘건 눈을 하고 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간 보아온 결과 그는 신인류들에게만큼은 굉장한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팔족 땅에서 람이 스치듯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검은 파편의 조각은 인간에게 핍박당하고 힘없이 죽어 가는 것들이 쉽게 죽지 않도록 내린 힘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힘을 내렸음에도 외면적으로 변한 것이 별로 없다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요.”
이예주가 자신 없이 웅얼댔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용케도 알아들은 듯 나비 아저씨가 ‘흠’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나지막이 내었다.
“나비는 주인님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로라. 그래도 주인님은 그렇게 화나지 않을 것 같로라.”
그는 제가 말하고도 또 한 번 확신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주인님의 덕에 우리 동물들도 인간처럼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개체마다 천성이란 게 있지 않로라? 인간이 하지 못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인류도 있는 것이로라. 암, 그렇로라. 그나저나…….”
“…….”
“이례주는 생각보단 다정한 인간인 것 같로라. 하하, 황조롱이는 이례주가 악마이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신인류에 대한 생각은 보통 인간들과는 다르게…….”
“아, 말하면 어떡해여!”
뜨악한 표정의 조롱이를 모르고 나비 아저씨의 입을 통해서 물처럼 폭로가 좔좔 쏟아졌다.
조롱이가 뒤늦게 막으려 들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맞는 말이에요.”
이예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악마한테 처맞는 말.”
그녀는 조롱이를 향해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두 존재가 만난 이래, 드물게 본 환한 웃음이었다.
잠시 후, 마빡이 벌겋게 부어오른 갈색 머리 소년에게서 “아구구구! 황조롱이 죽네! 아구구구!”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례주는 주인님을 너무 함부로 부르는 것 같로라.”
제 이마빡을 감싸 안은 채 울상을 짓고 있는 황조롱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 나비 아저씨는 여전히 악마처럼 웃고 있는 이예주로부터 황조롱이를 구해 주기 위해 황급히 말을 붙였다.
다행히 그녀는 금방 황조롱이로 향해 있던 관심을 껐다.
람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치 못한 타박이었던 듯 이예주가 좋지 않은 얼굴로 나비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보, 보아하니 이례주도 주인님과 계약을 맺은 것 같은데, 주인님의 호칭에 주의할 필요가 있로라. 주인님은 이례주가 부르는 ‘그것’을 싫어하로라!”
“람이 부르라고 알려 준 건데요.”
이예주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방금 한 결심이 무색하게 나비 아저씨가 바로 눈을 내리깔며 소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거야 시간족 놈들이 제멋대로 지었지만 인간들이 주인님을 부르는 유일한 호칭이니까…….”
“…….”
“하지만 그것의 뜻이 아주 고약하로라. 글쎄, 우리 주인님을 자신들이 믿는 신의 아이라고, 신에게서 파생된 파편이라 칭하는 게 아니로라?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로라! 오호통재로라, 오호통재!”
흡사 절규라도 하는 것처럼 애절한 얼굴로 나비 아저씨가 “오호통재!”를 외쳤다.
아무리 봐도 우락부락한 근육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녀 감성이었다.
그녀가 여전히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뭐라 부르는데요. 람느님? 람 교주? 아니면 람 오빠?”
“허헛! 그, 그런 외설스러운…….”
이예주의 말에 나비 아저씨가 창백한 얼굴로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마른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고는 천기누설이라도 하는 양 그녀에게 바싹 붙어 조심스레 속삭거렸다.
“……주인님은 주인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좋아하시로라.”
나비 아저씨의 대단하신 비밀에 이예주는 “미친.”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조롱이도 나비 아저씨도, 요망한 붉은 개도 모두 람의 지독한 추종자들이다.
람을 향한 그들의 엄청난 애정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다 날 지경이었다. 이런 람순이들.
이예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람밖에 모르는 신인류들의 정신 상태에 “오호통재라!” 하고 작게 탄식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나비 아저씨가 ‘이례주, 왜 대답이 없로라?’ 하고 몇 차례 더 물었다.
그러나 이예주의 대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진짜 무슨 놈의 마을이 이렇게 생겨 먹었냐.”
이예주가 광장 너머 해안선까지 쭈욱 이어진 마을의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사실 ‘무슨 놈의 마을’이라기보단 ‘무슨 놈의 세상’ 이란 말이 더 적합했다.
‘문’을 넘어 처음 굴러떨어진 망할 숲에서부터 온갖 기이한 지형이란 지형은 싹 다 여행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동쪽 대륙은 앞은 해안이고 뒤쪽은 숲이라고 말했잖아여.”
그녀의 옆에 다가서며 조롱이가 조잘거렸다. 확실히 동쪽 대륙의 외형은 조롱이의 말과 완벽히 일치했다.
마을은 부지가 엄청나게 넓었다.
마을 외곽인 입구 쪽은 대부분이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평야였고, 그곳을 지나 한참을 더 내리막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 집이라고 부를 만한 오두막이 나왔다.
첫 번째 오두막을 지나친 이후로는 드문드문 다 쓰러져 가는 폐가 같은 집이 여러 채 나왔다.
불규칙하던 집들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질서 정연해졌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이 살 법한 주택이 나오더니, 마을의 중앙 광장이라는 곳부터는 그럴듯한 빌딩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끝인 해안에 다다를수록 건물들의 외형은 더 화려하고 거대해졌다.
논과 밭을 지나며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짐작했던 이예주는 생각보다 굉장히 큰 마을, 아니 도시라고 불러도 될 만한 곳을 빙 둘러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
이 마을은 한눈에 봐도 빈부 격차가 어마어마해 보였다.
마을 초입을 지나면서 보았던 흉가 같은 집터와 눈앞에 있는 뻔지르르한 건물을 겹쳐 보자니 참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이 마침 장날이였로라. 일주일에 한 번밖에 장이 안 열려서 중앙 광장이 발 디딜 틈도 없어야 할 때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사람이 없로라. 저기서 파는 고구마 당과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아주 그만이로라, 이례주.”
문득 나비 아저씨가 한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서 정말로 달큼한 설탕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음식 냄새를 맡자 이예주의 배 속이 요란하게 고동쳤다.
그러고 보니, 팔족 땅에서 나온 이후에 뭘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입에서 절로 군침이 돌았다.
잠시 갈망을 담아 람을 바라보았으나, 이예주의 유일한 물주는 그녀를 보기는커녕 먼 해안선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계셨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당과든 뭐든 닥치는 대로 사 먹고 싶었으나, 그녀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서 쓰는 화폐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굶주리다 못해 쓰라린 배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그곳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었다.
조금만 기다리렴, 당과야. 누나가 어떻게 해서든 곧 구하러 갈게.
나비 아저씨의 말처럼 중앙 광장은 시장 용도로 쓰이는 듯 건물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멍한 얼굴로 천막 하나하나를 훑어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팽팽해진 사슬에 의해 ‘어, 어!’ 하고 균형을 잃었다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끌려갔다.
방금 전만 해도 나 심각하니 말 걸지 말라는 아우라를 풀풀 풍기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여 대는 람 때문에 이예주의 불만 지수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아, 말 좀 하고 가라고요!”
“길눈도 어두운 주제에 한눈 팔 여력은 있나 보군.”
마을 어귀를 지나올 때와는 다르게 꽤 빠른 속도로 그녀를 끌어 대며 남자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제가 뱉은 말을 그대로 상기시켜 주는 그 때문에 잠시 말을 잃었던 그녀가 정신을 재정비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길눈이 어두운 건 어두운 거고! 사람 넘어질 뻔했잖아요. 왜 말도 없이 갑자기 움직이고 그래, 진짜.”
“시간이 지체되지 않게 친히 도와주었다고는 생각 못하나?”
“…….”
이예주가 입을 다문 것은 순전히 입을 열면 쌍욕이 걸쭉하게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으, 저 싸가지, 바가지! 이 빌어먹을 1000년 후로 와서 이예주가 유일하게 확실히 아는 것은 저놈이 재수 없다는 사실뿐일 것이다.
꽉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쿵쾅 발을 구르며 람의 뒤를 빠른 속도로 바짝 붙어 따라 걸었다.
또다시 사슬에 잡아당겨져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걷는 이예주 때문에 람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콩 하고 그의 등에 이마를 부딪치며 멈춘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흉흉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라보자니 남자가 돌연 손을 뻗어 이예주의 미간를 꾹 눌렀다.
“뭐 하는 거예요?”
“찌푸리니까 더 못난이 같군.”
엄지손가락을 놀려 남자가 억지로 이예주의 미간을 폈다.
미간의 주름이 강제로 펴지자 그는 캬악 거리는 그녀 따윈 내버리고 제 볼일 다 봤다는 양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이예주는 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그사이, 람과의 거리가 벌어져 사슬이 다시 팽팽해졌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지막이 명령했다.
“걷지.”
이예주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얼굴만 잘생긴 재수, 저 왕 재수.
쉬지 않고 투덜거리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는 다시 벌어진 사슬의 격차를 줄이지 않고 마지못해 걸었다.
느슨해지는 사슬의 느낌에 앞서가던 왕재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것을 이예주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붉은색 털의 개 한 마리가 익숙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창백한 낯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또한 당연히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