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 다시 이예주에게로 고개를 돌려 어느새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마치 어린아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신인류를 괴롭히지 마라, 인간.”
“괴, 괴롭히다요? 어, 어억!”
저 요망한 것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단 말이야? 지금껏 자신의 도망갈 기색도 모조리 귀신같이 알아채던 놈이?
그러나 그의 말에 얻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람은 다시 한 번 그녀의 혼미한 정신에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그리고 사슬에 연결돼 있으니 길 잃을 일 없다. 네가 꾸물거리지 않고 제때 쫓아오기만 한다면 시간이 지체될 일도 전혀 없겠군.”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이예주의 품에서 팔을 빼냈다.
그러고는 그녀가 원래 사슬을 늘어뜨리고 쫓아오던 뒤를 눈짓하더니 그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뒤로 돌아가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하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이예주가 람의 매정함에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쯤, 붉은 개가 콧방귀를 뀌고는 고고하게 꼬리를 흔들며 람을 쫓아갔다.
그녀는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가 다가와 부를 때까지 충격에 젖은 채 계속해서 우뚝 서 있었다.
“누나, 괜찮아여?”
“괘, 괜찮로라, 이례주? 몸을 떨고 있로라.”
조롱이가 조심스럽게 이예주의 등을 건드릴 무렵, 아래로 향해 있던 그녀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이지란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저 망할 개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예주가 험악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조롱이와 나비 아저씨 모두 헉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그녀는 눈에서 불을 뿜어내며 점점 멀어지는 붉은 개의 꼬랑지를 바라보았다.
당장 비틀어 버려도 시원찮다는 듯 그녀의 두 주먹이 불끈 쥐였다.
“……전쟁이다.”
입을 열고 소리 내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이예주가 겁에 질린 두 신인류를 남겨 두고 앞서가는 두 사람을 따라 쿵쾅쿵쾅 걷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살벌한 모습에 나비 아저씨가 덩달아 그녀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조롱이에 의해 저지되었다.
“저런 때의 예주는 누나 건들지 않는 게 좋아여. 정말 악마가 따로 없거든여. 머릿속에 아마 붉은 개를 어떻게 고문할지에 대한 생각만 수십 가지 차 있을 거예여, 으으.”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양 조롱이가 진저리를 쳤다.
나비 아저씨가 새삼스럽단 눈으로 그런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흉악스러운 기색의 인간 여자보단 오히려 황조롱이의 모습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조롱이. 이름까지 받았로라. 저 인간과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인 것이로라, 황조롱이?”
“에? 에? 예주 누나랑여?”
“그렇로라, 저 이례주 인간 여자 말이로라. 게다가 친근하게 인간 여자를 ‘누나’라고까지 부르다니. 황조롱이 네 누이는 따로 있지 않로라?”
“…….”
“너는 저 인간 여자와 대체 무슨 관계인 것이로라?”
조롱이는 나비 아저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황금안을 굴려 엄청난 기세로 람과 붉은 개를 뒤쫓는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조롱이는 다시 눈알을 굴려 나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신기한 생물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이예주와 조롱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가 또 한 번 물었다.
“저 인간 여자와 무슨 관계인 것이로라? 응?”
이예주와 저 사이가 딱히 정의할 만한 관계인 것이던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황조롱이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을 ‘예주 누나’라고 소개했던 인간 여자일 뿐이고, 자신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조롱이라 불리고 있는 황조롱이 일족의 마지막 황조롱이일 뿐이다.
그 외에 또 뭐가 있을까.
황조롱이는 나비 아저씨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 위해 실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이예주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성질 급한 검은 고양이는 그조차 기다려 주지 않고, 간신히 안정된 황조롱이의 마음을 모래성 부수듯 한순간에 부숴 버렸다.
“조롱이, 조롱이. 거 참, 인간에게서 이름을 다 받다니 너답지 않로라, 황조롱이. 넌 이미 네 누이가 지어 준 이름이 있잖로라, 엘로.”
“…….”
“조롱이와는 전혀 다른 이름이로라. 네 이름이 이미 있다는 것, 저 인간 여자도 알고 있는 것이로라?”
황조롱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느라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하얘서, 말 그대로 눈앞이 하얘서 대답할 수 없었다.
황조롱이는 한참 동안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던지, 눈치 없기로 유명한 검은 고양이마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시 황조롱이를 툭툭 칠 정도였다.
“엘로?”
검은 고양이가 부른 황조롱이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쥐어 짜내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여.”
“으응?”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여, 제발.”
익숙한 숲길, 어느덧 어린 황조롱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짙은 갈색으로 젖어 있었다.
* * *
마을까지 이어진 울창한 숲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전에 해안을 따라 걸어온 시간이 한나절이다 보니 숲길 같은 거리는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덜 말라서 척척한 청바지를 매만지며 이예주는 생각했다.
왠지 강제로 체력 단련을 받고 있는 것만 같다고.
짤캉짤캉, 그녀의 심란한 마음과는 다르게 람과 길쭉이 이어져 있는 사슬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기실 이예주는 마을 입구에 완전히 들어서기 전에 한 번 더 괴성을 지르며 사슬을 풀어 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아무리 1000년 후의 미쳐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사슬에 묶여 끌려다니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고 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무려 31세기로 바득바득 기어 와 그 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자신의 모습이 노예나 죄인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튼 이예주는 사슬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을 사슬의 주인에게 불같이 토해 내었다.
그래도 남자가 꿈쩍하지 않자 다시는 도망의 ‘도’자조차 생각하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의 손목에 액세서리 걸어 주듯 수갑을 채워 준 남자는 단호박을 맛있게 씹어 드셨는지 그녀의 요구를 단호하게 묵살했다.
보다 못한 나비 아저씨가 “마을에 들어가도 이례주에게 신경 쓰는 인간들은 없을 테니 제발 걱정 말로라!” 하고 좀체 믿기 힘든 말로 이예주를 달래고 나서야, 그녀는 잔뜩 불퉁해진 채로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저 겉치레한 줄 알았던 나비 아저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헐.”
마을의 초입은 어디 시골 농촌 풍경처럼 논과 밭으로 쓰이는 듯한 땅들이 늘어져 있었다.
막상 마을에 들어서니 이예주는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이 마을에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녀를 질질 끌고 가는 람처럼 다른 이를 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예주는 손목에 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목에 사슬이 걸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비 아저씨의 말마따나 정말로 람에게 끌려가는 그녀를 유심히 여겨 보거나 희한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이 흔한 일상인 것처럼.
그것을 알아챈 이예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1000년이 지나며 노예제도가 부활한 것일까?
하지만 그러기엔 사슬에 묶인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들의 얼굴엔 자신의 삶에 대한 피폐나 회한, 혹은 강제로 인한 비참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신종 애완동물 놀이 같은 건가……?
제 앞을 지나가는 목줄 걸린 젊은 남자와 그의 목에서부터 이어진 사슬을 들고 뒤를 따르는 중년 남자를 착잡한 얼굴로 바라볼 쯤이었다.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욱 놀라 까무러칠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중년 남자보다 앞서 걷던 젊은 남자가 밭에 발을 들이자마자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새 소로 변해 ‘음머~!’ 하고 울어 젖히는 것이 아닌가.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거 신인류 맞지?! 그치?”
이 어이없고 황당한 광경에 그녀는 황급히 조롱이를 잡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해 준 것은 나비 아저씨였다.
“맞로라. 소족 신인류로라.”
“뭐야? 뭐야? 신인륜데 어째서 사슬에 묶이고 왜…….”
왜 인간과 같이 지내는 거냐고 물으려 했던 이예주는 순간, 소로 변한 신인류의 등에 쟁기 같은 기구를 메어 주는 중년 남자를 보며 말을 멈췄다.
아니, 할 말을 잃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쟁기를 등에 걸친 소로 변한 젊은 남자가 미친 듯이 밭을 갈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리니 소 신인류가 있는 땅의 옆쪽에서 방금 전까지 밭 한가운데에 서 있던 염소가 별안간에 ‘펑!’ 소리와 함께 늙은 여자로 변하더니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심었다.
그때 앞쪽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읊조림이 들렸다.
“멍청한 것들.”
붉은 개였다.
그녀는 예의 그 표독스러운 눈으로 소로 변한 사내와 늙은 여인이 하는 꼴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덧 멈춰 선 이예주 때문에 람을 포함한 일행 전체가 덩달아 거리 한가운데에서 정체했다.
이예주는 멍한 시선으로 방금 전 욕설을 내뱉은 붉은 개와 조롱이, 나비 아저씨를 한 번 훑어본 후 다시 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지형이었지만, 밭에서 일하기엔 내리쬐는 뙤약볕이 따가운 편이었다.
소로 변한 젊은 남자는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밭을 갈아 대고 있었고, 인간으로 변한 염소 또한 움칫움칫 걸음을 옮겨 가며 땅에 씨를 심는 행위를 반복했다.
반면에 밭고랑에는 땅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간들이 고개를 쳐들고 앉아 구름 지나가는 것을 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한가해 보였다.
이예주는 이번엔 시선을 들어 그녀의 한 치 앞에 멈춰 서 있는 람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노동을 하고 있는 신인류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 색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확신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가 지금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눈동자 색이다.
자기 합리화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많이 다르다. 너무 많이 달라서 이예주는 문득 가슴이 싸해졌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왜, 왜…….
“신인류라고 다 인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로라.”
“네, 네?!”
불쑥 나비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며 말한 탓에 이예주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비 아저씨는 그녀보다 더 깜짝 놀라 ‘캬옹!’ 하고 몸을 사리며 후다닥 조롱이의 뒤로 숨는 게 아닌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나비 가슴이 놀라잖로라!”
자신보다 덩치가 한참이나 작은 조롱이의 뒤에 선 나비 아저씨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앙큼하게 소리쳤다.
이예주는 그 모습에 눈앞이 아찔해져서 서둘러 사과했다.
“아…… 예. 미안합니다.”
나비 아저씨가 “큼큼, 알면 됐로라.” 하며 관대하게도 그녀의 사과를 받아넘겼다.
그때, 이제껏 말이 없던 조롱이가 입을 열었다.
“동쪽 대륙은 중간 지대예여. 인간도 신인류도 이곳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거든여.”
“응? 중간 지대……?”
“그렇로라. 몇십 년 전 인간과 신인류 간에 일어났던 두 번의 전쟁 끝에 이곳을 중간 지대로 정했로라. 비록 마을의 족장도 인간이고,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도 모조리 인간이며 신인류보다는 인간들이 훨씬 더 많이 살고 있지만 말이로라. 그래도 동쪽 대륙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신인류도 꽤 많로라.”
조롱이의 설명에 이어 나비 아저씨가 마저 말을 끝냈다.
이예주는 잠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느라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을 들어 밭을 갈고 있는 소를 가리켰다.
“……그럼 저 신인류들은요?”
“그게 말이로라. 저 신인류들은…….”
“저것들을 신인류에 포함하지 마! 긍지도 자존심도 없이 인간에게 붙어먹는 놈들이니까!”
그 순간, 살벌한 고함 소리가 나비 아저씨와 이예주의 사이를 날카롭게 갈랐다.
이예주도 나비 아저씨도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휙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밭에 있는 신인류들을 바라보며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은 붉은 개가 이번에는 나비 아저씨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저 똥개는 왜 자꾸 사사건건 시비질이야, 시비질은?
행패와도 같은 붉은 개의 행동에 이예주는 있는 대로 눈살을 그러모아 찌푸렸다.
나비 아저씨를 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붉은 개의 일갈에 겁이 난 것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덩치 큰 남자가 하얗게 질린 채 몸을 사리는 모습이라니, 참 보면 볼수록 새로운 신인류였다.
이예주는 힐끗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소와 늙은 여자는 일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붉은 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대신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던 인간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지.”
그것을 눈치챈 것은 비단 이예주뿐이 아닌지, 때마침 람이 짤캉짤캉하고 그녀와 연결된 사슬을 두어 번 잡아당겼다.
손목을 타고 울리는 감각에 이예주는 이딴 식으로 의사 표현 하지 말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다시 한 번 참을 인(忍) 자를 새기며 빠드득 이를 갈곤 따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