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84)화 (85/319)

“주인님, 주인니이임~! 왜 이렇게 우리를 안 불러 주셨어요? 정말 매일 주인님께 전갈이 오기만을 기다렸단 말이에요! 벌써 저를 잊어버리신 거예요?”

“그간 일이 좀 많아서 동쪽 대륙에 들를 틈이 없었다.”

‘이런 요망한 것, 당장 그 발칙한 왕가슴을 치우지 못할까!’

당장이라도 저 여자와 대체 무슨 사이냐고 람의 멱살을 잡고 괴성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그전에 먼저 제 앞의 둘을 잡아떼어 놓고 싶었다.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는 이예주가 이상했던 듯 조롱이가 곁에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누나, 괜찮아여? 왜 이렇게 떨어여?”

조롱이의 물음에 투명 인간 취급당하던 그녀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예주는 그제야 발칙한 붉은 머리 왕가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붉은 머리와는 다르게 오목조목 청순가련한 얼굴이 람의 품에서 쏘옥 얼굴을 내밀었다. 

여우나 고양이 상이 분명할 것이란 추측과는 다르게, 커다란 눈을 댕그랗게 뜬 여자의 얼굴은 영락없이 귀여운 강아지 상이었다. 

여자가 이예주를 바라보며 깜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람에게 물었다.

“이 냄새나는 인간 여자는 누구예요, 주인님?”

뭐? 내, 냄새? 저, 저, 저! 

여자의 말에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힐 지경인 이예주의 입이 곧 다시 조가비처럼 짜악 벌어졌다. 

뭐라고 욕지거리를 하고 싶은데 목에 찹쌀떡이라도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어버버거리는 것을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불쌍히 여긴 건지 조롱이가 속 시원히 이예주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예주 누나예여. 누나는 인간 여자란 말 싫어해여.” 

이예주는 순간 감동 어린 눈으로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밉상이기 짝이 없던 조롱이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예뻐 보였다. 

“웬 인간이로라, 주인님?”

그때, 묵묵히 서 있던 산적 같은 남자가 람에게 공손히 물었다. 

우락부락한 몸통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그녀는 내심 기대에 찬 눈으로 람을 돌아보았다. 

람과 저 붉은 머리 여자가 무슨 사이인진 모르지만, 이예주는 꽤 의기양양했다. 

람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걸? 우린 무려 뽀, 뽀뽀도 하고 키, 키스도……!

“잠깐 일이 생겨 데리고 다니는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러나 람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와장창 부수다 못해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예주가 꽥 소리쳤다.

“뭐요?!”

“…….”

“내, 내가 왜 잠깐 데리고 다니는……!”

잊고 있었다. 

저 남자, 싸가지 없는 대회에 나가면 1등은 물론이고 심사위원 뺨까지 후려칠 만큼 패기 있는 남자였다는 것을. 

그러나 뒷목 잡고 뒤로 넘어갈 심정인 이예주에게 오히려 남자는 적반하장 식으로 불만을 찍어 눌렀다.

“뭐.”

그가 할 말 있음 해 보란 듯이 잡고 있던 사슬을 한 번 격하게 흔들었다. 

짤그락! 

손목이 다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힘에 이예주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아니에요.”

이예주는 사슬에 묶인 제 신세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풉’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조심히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을 때, 조소 어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그 요망한 눈동자는 한때의 애완견이었던 봉구처럼 커다랗고 까맣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속엔 이예주를 향한 비웃음과 우월감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연히 담겨 있었다. 

이예주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비참하고 비굴한 인생아. 진짜 개는 저기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묶여 있는 것이냐. 

그사이 로라, 로라 거리던 근육질 남자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녀와 람을 연결해 주는 사슬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주인님께서 인간을 살려 두시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묶어서 데리고 다니시다니……! 영광이로라, 인간 여자.”

그러더니 이예주가 인간 여자란 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선량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도둑고양이족이로라. 인간들이 붙여 준 이름은 나비라고 하로라. 너도 나비라고 부르로라.” 

나비라니. 이예주는 이런 근육 빵빵 아저씨에게 그런 심한 이름을 지어 준 인간이 대체 누군지 얼굴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인사를 맞받았다.

“전 인간 여자가 아니라 이예주예요.”

“이에주?”

“이예주요.”

“아. 이래주로라!”

이예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나비라는 근육질 남자는 계속해서 “이례주로라, 이로주로라, 이옌주로라.” 하고 노래 부르며 그녀의 신경을 긁어 댔다. 

이예주는 사실 나비 아저씨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따위엔 티끌만치도 관심 없었다. 

당장 신경 쓰이는 건 저 요망한 것이 아직까지도 람에게 철썩 붙어 있다는 것뿐. 

주인님, 주인님 호호호. 여자가 람을 부르며 살살 눈웃음을 쳐 댔고 람은 그녀를 검은색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주인니임~ 저 너무 춥고 배고픈데. 흐응, 저도 옷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고 보니, 인간 마을로 들어가려면 옷부터 사야겠군.”

“아잉~ 인간들이 만든 옷은 싫어요. 저도 주인님의 옷이 필요해요. 주인님 옷 주세요, 네?”

겉옷을 이미 이예주에게 넘겼기 때문에 람은 더 이상 벗을 옷이 없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붉은 머리는 커다란 가슴을 흔들어 대며 람에게 옷을 요구했다. 

이예주가 뒷목 잡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예주의 심정을 알 턱이 없는 람은 요망한 것의 칭얼거림에 현혹되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은색의 동공이 이예주를 향하자마자 순식간에 가장자리부터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간극에 채 적응하기 전에, 이예주는 남자의 눈이 자신이 덮어쓰고 있는 겉옷에 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금방이라도 다가와 겉옷을 빼앗아 가서 빨간 머리에게 덮어 줄 것만 같았다. 

멋대가리 없이 뒤집어쓴 모양새였지만, 도로 빼앗기기는 절대로 싫었다. 더군다나 저 요망한 것을 덮어 줄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만하고 내놓으라는 것처럼 지그시 시선을 보내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턱밑에 묶여 있는 소맷자락을 교차하여 꼭 붙잡고 고개를 격하게 뒤흔들었다.

“싫어! 이건 내 거잖아요!”

줬다 뺏어서 저 요망한 것에게 주기만 해 봐. 

정말 바람피우는 것들의 최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직접 보여 주겠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예주는 여전히 소매를 꾹 부여잡고 있기를 고수했다. 

그녀의 ‘내 거’라는 발언에 주위는 모두 침묵에 잠겼다. 

정확히는 람의 것이었으나 그까짓 사실이야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이예주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람을 마주 쏘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서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보았을까. 

이윽고 람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어쩔 수 없군. 그 꼴로 돌아다닐 순 없으니 인간 마을에서 옷을 사기 전까진 본체로 돌아가 있도록, 붉은 개.” 

“주인니임!”

요망한 것이 항의하듯 콧소리로 불평했지만, 람은 번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숲의 입구라는 곳으로 무뚝뚝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슬이 팽팽해지자 얼떨결에 람을 따라 걸어가며 이예주는 입꼬리가 근질거려 혼이 났다. 

이겼다. 저 요망한 것을 퇴치한 것이다! 

이예주는 붉은 머리를 훑어보며 의기양양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한층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본 붉은 머리 여자는 정말이지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로 예뻤다. 

탐스럽고 강렬한 붉은 머리에 비해 크고 동그란 눈망울은 그 어떤 이라도 반할 만큼 청순해 보였다. 

그리고 패배감이 들 정도로 가슴도 컸다. 

막상 가까이서 그녀의 외모를 접하고 보니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의기양양했던 마음이 조금 식어 버렸다. 

아니, 사실은 완전히 의기소침해졌다. 이렇게 예쁘다면 아무리 람이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금세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는 사실 외면보단 내면을 보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뽀뽀도 하고 키스도……. 

그렇지만 다른 여자랑도 이미 해 버린 후면 어떡하지? 생각해 보니 자신 또한 어장관리 당하고 있는 중이니까 람은 이 요망한 것과도 썸을 타고 있을지도! 

이예주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발가벗은 요망한 여자를 뜯어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잠시 망연자실한 태도로 먼저 가는 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이예주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비린내 나고 더러운 인간 계집 주제에. 감히, 감히……!”

그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미처 듣지 못하고 넘겼을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적나라한 적의가 그 속에 명백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이예주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돌아보자 붉은 머리는 ‘펑!’ 하는 커다란 소음과 함께 붉은색의 개로 변해 버렸다. 

그 모습으로도 이예주를 노려보는 것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동물적인 감각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노려보는 눈에 섬뜩한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붉은 개가 이어서 꽤 정확한 발음으로 죽음을 예고했다.

“너 까짓것 주인님께서 곧 죽여 버릴 거야.”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적대감에 이예주가 우뚝 굳었을 무렵, 붉은 개는 곧바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주인니임~ 같이 가요!” 

붉은 개는 그녀를 협박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간드러지고 곱다란 목소리를 내며 훌쩍 람의 곁으로 뛰어갔다. 

이예주는 붉은 개의 이중성에 한참 동안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사슬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후에서야 넘어질 듯 휘청거리다가 기계적으로 따라 걸었다. 

그러나 걷는 내내 뒤통수 한쪽이 쭈뼛 섰던 찜찜한 느낌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라고 치기엔 너무나도 살벌했다. 개의 눈에 담긴 것은 순수한 적의와 살의. 

그래 놓고 한순간에 돌변한 태도로 람에게 들러붙는다. 

“주인님, 이번엔 오래 계실 거죠? 그렇죠?”

보아하니 람은 별로 대답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웃는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커다란 개의 모습임에도 교태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다. 

이예주는 자상한 검은색 눈으로 붉은 개를 내려다보는 람을 바라보며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저, 저거. 저거…….”

완전 미친 거 아냐? 

방금 전만 해도 살벌한 기세로 자신에게 이를 갈더니 람 앞에선 한순간에 얼굴을 바꾸고 재롱을 피우고 있다. 

자신도 한 이중인격 한다고 생각했지만 저만큼 한순간에 페이스를 바꿀 순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개, 개, 개 주제에. 개 주제에…….”

“이해해여, 누나. 붉은 개는 신인류 중에서도 인간을 유독 싫어해여.”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떠는 이예주의 곁으로 다가선 조롱이가 붉은 개에 대해 해명하듯 말을 걸었다. 

나비 아저씨 또한 잇따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그렇로라. 붉은 개는 인간을 싫어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도 주인님 앞에서만 하로라. 인간의 모습이 여러모로 편한데도 붉은 개는 계속 변신을 하지 않고 지내로라.”

요망한 것이 인간으로 변신했을 때 발가벗고 있는 것에 대해 짜증이 치솟았던 이예주는 나비 아저씨의 말을 듣고 그제야 조금 납득을 했다. 

하지만 납득은 납득이고 짜증 나는 것은 여전히 짜증 나는 것이다. 

그녀는 람을 향해 꽁무니를 살랑살랑 흔드는 붉은 개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고양이도 아니고 개 주제에 저렇게 요망할 수가 있다니.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쟤 이름은 붉은 개야? 이름 없어?”

부르는 호칭조차 짜증이 나는 붉은 개 때문에 이예주가 좋지 않은 목소리로 조롱이에게 물었다. 

조롱이는 황금안을 되록되록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옛날에 붉은 개도 인간에게서 받았던 이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여. 랄라였던가 룰루였던가…….”

“릴리였로라.”

“아! 맞아여. 릴리.”

정정해 주는 나비 아저씨 덕에 조롱이가 기억났다는 듯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그러나 금세 시들해진 얼굴로 말을 잇는 바람에 이예주는 비꼴 틈이 없었다.

“그치만 붉은 개는 인간에게 배신당한 후로 그 이름을 혐오하는걸여. 예전엔 그 이름으로 부르기만 해도 물려고 했어여. 지금은 그냥 붉은 개로 불러여. 어차피 그렇게 불러도 겹치는 다른 개체도 없구여.”

“왜 없어? 붉은 개가 얼마나 많은데.”

이예주가 제가 살던 현대를 떠올리며 별생각 없이 불퉁하게 답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새삼 붉은 털을 가진 개가 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에서 붉은색의 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곰곰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붉은 털의 늑대나 사나운 불도그 따위를 떠올렸다. 

저 앞에 걸어가는 붉은 개는 못생긴 불도그나 핏불테리어 종보다는 셰퍼드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조롱이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붉은 개는 붉은 개 일족의 마지막 일원이니까여. 호칭이 겹칠 리가여.”

“……마지막?”

“네, 마지막여. 붉은 개 일족은 인간한테 몰살당했는걸여.”

“뭐? 왜?”

“에?”

“왜 몰살당했는데?”

이예주가 아까와는 다른 심각한 표정으로 조롱이에게 반문했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듯 눈알을 굴리던 조롱이가 이내 설명하기 애매했는지 괜히 코를 긁적였다.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신인류라고 오해받았기 때문이로라.”

조롱이를 대신해 이예주의 질문에 답한 것은 근육질의 나비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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