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83)화 (84/319)

“우리 근데 어디 가는데 계속 걷기만 하는 거예요?”

실제로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체력이 바닥난 이예주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노인처럼 힘겹게 물었다. 벌써 두 번째 물음이었다. 

물에 옷이 푹 젖은 것을 떠나 그녀는 몸이 원치 않아도 축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문’을 넘고서도 바닷물에 떠내려가던 열쇠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죽다 살아났는데, 멀쩡하다면 그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작은 투정에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대체 어떤 보양식을 혼자 드셨기에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힘이 솟아나는 건지, 미천한 인간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숲에서 사막까지 먹고 마신 건 자신과 별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 저 혼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콘푸로스트라도 먹은 건가. 

이예주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비척비척 걷고 있을 때였다. 

피곤하고 지치는 건 비단 그녀뿐이 아닌지, 조롱이가 아까보다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곧 마을에 도착한다고 했잖아여…….”

“그니까 그 곧이 언젠데?”

“쩌―어기 숲이 시작하는 곳이 마을의 시작이에여.”

조롱이가 아직도 까마득하기만 한 어느 지점을 손가락질했다. 

무성한 나무들이 자리한 그곳은 거의 해안선의 끝이었다. 아무리 봐도 마을의 시작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저게 무슨 마을이야? 저긴 숲이잖아.”

“동쪽 대륙은 해안 도시예여. 앞에는 바다고 뒤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여. 마을이랑 숲의 입구는 같구여. 입구에서 마을이랑 숲으로 길이 또 나뉘어여.”

조롱이가 나름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지만, 이예주의 귀에는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끝도 없이 걷다 보니, 람의 무릎 위에 앉아 사막을 날아가는 건 천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참 이기적인 게 이렇게 몸이 고단하고 나서야 도움을 줬던 존재의 부재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막에서의 이동 수단을 떠올리던 이예주는 그제야 대왕 바퀴벌레의 행방을 물었다. 

“그런데 그…… 그 바퀴는?”

“에?”

“그 있잖아. 대왕 더…… 더듬이, 으으!”

그녀가 그 거대하고 흉물스러웠던 검은색 대왕 벌레를 떠올리다가 사색이 되어 진저리를 쳤다. 

새삼 2017년은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년 전에도 사람들을 심각하게 위협했던 해충이 이제는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커져 버렸다. 

에프킬라를 가지고는 죽이긴커녕 괜히 설쳐 대었다가 되레 역으로 죽을 수도 있단 소리였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세야 말세. 늙은이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는 이예주를 바라보던 조롱이가 대왕 바퀴벌레의 행방에 대해 밝혔다.

“해안가에서 모래 파헤치고 들어가서 자고 있어여. 곧 산란기라 서쪽에 있는 암컷한테 빨리 가 봐야 된대여.”

“사, 산란기…….”

창백해진 얼굴로 조롱이의 말을 따라 하던 이예주가 애써 드는 끔찍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일전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파리채로 때려잡았는데 알이 팍 터져서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는…….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조롱아?”

재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반전시키기 위해 그녀가 애써 화제를 돌렸다. 

말을 하고 보니 정말로 조롱이의 상태가 평소와 매우 다르다는 것이 눈에 확 띄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먼저 시비를 걸 녀석이 이상하게도 마을 입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걸음도 처지고 어깨도 축 늘어졌다. 

단순히 기운이 없어서 그렇다고 보기엔 꼭 사형 전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죄인처럼 표정도 매우 좋지 않았다. 

진짜 포승줄에 묶인 것은 이예주 자신인데도 말이다.

“어디 아파?”

“누나 때문이잖아여.”

“응? 내가 뭐?”

“누나가 바보같이 여기로 와서……!”

답답해 죽겠다는 듯 전에 없던 신경질을 버럭 내던 조롱이는 휘둥그레진 이예주의 두 눈을 보고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 아니에여.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걸어여.”

그러더니 그녀보다 앞서서 휑 걸어가 버렸다. 

이씨, 저게 아까부터 왜 저렇게 승질이야. 조롱이의 냉대에 울컥 억울함이 솟은 이예주는 ‘내가 오고 싶어서 왔냐.’ 하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 싶었으나 지은 죄가 있기에 그저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이런 소란이 있든 말든 그 와중에도 람은 일정한 걸음으로 제 갈 길만 걸어가기 바빴다. 

물론 먼저 나서서 자신의 역성을 들어 주는 건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어쩜 저렇게 얄밉게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구는지. 

이럴 거면 겉옷은 왜 벗어서 묶어 주고 난리야, 사람 가슴만 싱숭생숭하게. 괜히 엄한 남자에게 불똥이 튀었다. 

서럽다, 서러워. 팔족 땅을 떠나올 때부터 그들과 자신이 다른 생물이라는 확실한 자각 때문인지 격렬한 우울함이 그녀를 덮쳤다. 

이예주와 조롱이가 입을 다무니 그들 일행은 썰렁한 침묵에 잠겼다. 

쏴아아, 파도가 몰려오는 소리와 일행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이예주는 과거 서울에 있던 자신의 원룸이 아련하게 그리워졌다.

*       *       *

그들 일행이 멈춰 선 건 마을 입구라는 정체 모를 숲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크고 장성한 나무들이 일정하게 늘어서 있던 북쪽 대륙 동물의 숲과 다르게, 해안가 근처의 나무들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았다. 

또 얇은 가지가 휘어져 귀신처럼 아래로 축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져 있으니 당연히 분위기 또한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숲의 입구가 당장이라도 괴악한 소리를 내며 이예주를 삼킬 것처럼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었다. 

음침한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문득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무가 많이 죽었네…….”

조롱이가 가까이 있는 나무로 다가가 축 늘어진 나뭇가지 중 하나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예주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해 줬다. 자신과는 더는 말도 안 섞을 것처럼 굴더니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까 팽 하고 냈던 성질이 좀 가라앉은 듯싶었다.

“이 숲의 식물들은 해수가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담수로 자랐거든여. 인간들 때문에 물이 끊겼나 봐여.”

조롱이의 말에 이예주는 유심히 근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바다 근처 식물의 특징인 줄로만 알았던 누런 나뭇잎들이 하나같이 가을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죽어 가는 나무를 바라보는 조롱이의 황금색 눈동자도 물기 하나 없이 버석하게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귀여운 외형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해안 근처까진 안 그래도 물이 내려오기 힘들어서 따로 물길도 내줬었는데…… 이제 숲을 돌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봐여.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순서를 정해 가지고 돌아가면서 관리했었는데여.”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조롱이의 모습에 호기심이 돋은 이예주가 되물었다.

“여기도 와 봤어?”

“아니여. 떠난 후로 몇십 년 만에 다시 온 거예여.”

“떠났다가 다시 왔다고?”

그럼 여기서 산 적이 있단 말인가? 이예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조롱이는 여전히 나뭇가지를 매만졌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 그의 손길 아래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기어이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마을에서 살 땐, 이 입구 너머까지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어여.”

“……왜?”

“항상 누이 등에 업혀서 딱 입구까지만 산책 왔었거든여. 그 이상은 못 갔어여. 누이가 몸 건강해지면 다시 오자고 했는데.”

제 손에 부스러진 나뭇잎처럼 조롱이가 아스라이 웃었다. 

답지 않은 조롱이의 모습에 이예주는 내심 마을은 왜 나왔냐, 누이는 지금 어디 있냐 등을 더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조롱이의 얼굴에서 꼭 울지 못해 웃는 것 같은 비애가 묻어 나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인간과 관련된 어떤 것임을 예측했다.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조롱이에게서 고개를 돌리던 이예주는 그 순간 람과 눈이 마주쳤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지 람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예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겠다는 듯. 

이예주는 시험대에 올라 피부 한 조각, 장기 하나, 세포 하나까지 낱낱이 관찰당하는 것 같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지레 놀라 먼저 시선을 피했을 그녀가 어쩐지 홀린 것처럼 시뻘건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롱이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남자의 눈초리가 꼭 죄인을 바라보는 듯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예주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냐고. 왜 날 그렇게 새빨간 눈으로 바라보는 거냐고 묻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생각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의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왈왈왈―! 미야옹―! 

시끄러운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숲의 입구 쪽에서 커다란 개와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왈왈왈왈! 미야옹!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더 목청 높여 짖어 대던 개와 고양이가 한달음에 일행의 앞에 도달했다. 

람의 눈동자만큼 붉은 털을 가진 커다란 대형견과 새까만 털을 가진 작은 검은 고양이었다. 

“웬 개랑 고양이가…….”

이예주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 두 눈을 치켜떴다. 

그때 붉고 커다란 개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물어뜯을 것처럼 크르르르, 이를 드러냈다. 

원룸에 살 때 흔히 봤던 동네 유기견과는 차원이 다른 때깔과 덩치에 이예주가 헉 하고 겁먹으며 뒷걸음질 쳤다. 

“훠이― 저리 가. 저리 가!”

뭐야. 혹시 야생 들개 그런 거야? 

그러나 이예주가 움직일수록 개의 입에서 더욱 험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던 그녀가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뜻으로 람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남자가 그제야 이예주를 지나쳐 걸어가 붉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진작 해결해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당황하여 버벅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런, 썩을! 이예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가 채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펑! 펑!’ 하는 커다란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개와 고양이 주변에 자욱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주인니임!”

그 연기 사이로 발가벗은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람에게 찰싹 달라붙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주인님!”

붉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그 사이로 달덩이같이 커다란 여자의 가슴이 출렁거리며 람의 가슴과 맞닿았다. 

팔족 땅에서 만났던 일리야와 맞먹을 만큼 커다란 가슴이었다. 

이예주는 뜬금없이 나타난 여자의 엄청난 개방 문화에 경악하면서도 멍하니 고개를 내려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곧바로 지저분한 자신의 운동화가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람과 그에게 달라붙은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방금 전 발가벗은 여자가 튀어나와 람을 껴안았을 때보다 더욱더 충격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여자를 내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람이,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한 눈으로 자애롭게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붉은 개.”

그것도 모자라 여자에게 인사도 해 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바라보며 시뻘건 눈을 흉흉히 빛내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절했다. 

어, 어억! 이예주가 알싸하게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저 망할 어장 관리남이!

“오랜만이로라, 주인님. 오신다는 전갈을 늦게 받아서 급하게 채비하느라 좀 늦었로라.”

그때 여자의 뒤에서 연기를 헤치고 나온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옷을 주섬주섬 껴입으며 람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허.”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광경에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헛웃음을 짓자 우락부락한 남자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와 말투로 그녀를 향해 ‘왜 웃로라?’라고 물었다. 

그녀는 소름이 쫙 끼쳐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이놈의 세상은 어째서 제대로 된 생물이 하나도 없는 거야? 어디 가서 작은 덩치라고 할 수 없는 람이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남자가 로라, ‘로라’라니!’

람이 남자의 말에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동공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그사이 발가벗은 여자가 요망하게 가슴을 뒤흔들며 람에게 칭얼거렸다. 

그 발칙한 짓거리에 이예주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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