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82)화 (83/319)

이게 과연 옳은 걸까. 

지,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불까. 

사실은, 저는 예지몽을 꾸고 미래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제가 왔다는 과거는 1000년 전입니다. 이렇게 그냥 털어놓고 말까. 

하지만 이미 해 놓은 거짓말이 있는데 이제 와서. 

그러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두 가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유분방한 이예주의 입은 주인의 의지에 반해 제멋대로 떠벌리고 있었다.

“아, 알량한 능력, 들어 볼 필요도 없다고 한 건 누군데요. 나도 도망만 칠 줄 아는 이딴 능력 말고 다른 능력 있었으면 좋겠어요. 있지도 않은 능력 가지고 사람 속상하게 뭐 속이냐고 자꾸 그러고…… 그런 거 없어요. 진짜요.”

되는 대로 내뱉는 변명에 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자신을 쏘아보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따가워서 이예주는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슬쩍 그 눈을 피했다. 

이윽고 람이 입을 떼었다.

“확실한 거겠지.”

그저 확실하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이예주는 가슴이 쿵 하고 밑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자의 그 말이 꼭 마지막 기회이니 지금이라도 불라는 것처럼 들렸다. 

입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에 그녀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래서 남 속이고는 못 산다더니. 서툰 거짓말을 들킨 후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 그녀였다.

“그, 그럼요! 속이는 것 없어요. 후불이라고 그랬으니까 이왕 계약한 거, 저한테도 조롱이처럼 특별한 힘이나 주시면 안 돼요?”

“…….”

남자는 이예주의 이어지는 주절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속아 넘어간 것일까. 어느덧 그녀를 향해 내리 쪼듯 레이저를 쏘아 대던 남자의 눈초리가 거둬졌다. 

생각보다 참 순박한 사람이구나. 이런 사람을 속여 먹다니, 왠지 모르게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헛소리 그만하고, 손.”

“……예? 손요? 손은 왜요?”

“한 번 말할 때 들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이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제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남자의 품에서 전에도 한 번 본 적 있는 징글맞은 것이 ‘차르륵’ 쇳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반응할 새도 없이 이예주의 오른쪽 손목이 묵직해졌다.

철컥, 자물쇠가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들리자 그녀는 멍하니 눈을 내려 제 손목을 차갑게 겁박한 것을 쳐다보았다. 사슬이었다.

“……이,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이예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뭐하긴. 사슬을 채운 것이지.”

“그, 그니까 사슬은 왜, 왜…….”

남자는 말없이 사슬을 늘어뜨려 그 끝을 잡았다. 

그러더니 잔말 말고 일어나라는 듯 그 끝을 두어 번 성의 없이 흔들어 대는 게 아닌가. 

이예주가 황당한 얼굴로 그에게 반박했다.

“트, 특별한 때가 아니면 안 채운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이 그 특별한 때다.”

남자가 특별한 때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선포했다. 이예주는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히는 것을 느끼며 입을 벌린 채 어버버 거렸다. 

그녀가 알아서 일어날 기미가 없다 판단한 람이 이번에는 사슬이 팽팽해질 만큼 세게 잡아당기며 채근했다.

“이, 이, 이러고 어떻게 가라고! 풀고 가요! 진짜 이게 뭐예요!”

“떼쓰지 말고 그만 일어나. 네가 자초한 일이다.”

“떼쓰는 게 아니라! 이러고 가냐고요! 이, 이게! 내가 노예도 아니고 무슨 사슬에 묶여서 끌려가야……!”

“스읍― 열쇠, 돌려받기 싫은 건가?”

열쇠 얘기에 이예주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나 좀체 분이 풀리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못생긴 홍당무처럼 잔뜩 붉어졌다. 

이예주는 별 수 없이 남자가 사슬을 잡아당기는 대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다문 그녀가 마음에 드는 건지 서슬 퍼런 시선을 거두고 남자가 칭찬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조롱보다 더 무서운 소리로만 들렸다. 

“옳지. 앞으로도 그렇게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예쁘게 굴도록.”

남자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저건 악마야. 

짤캉짤캉, 사슬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가면서 이예주는 잠시나마 저 남자를 순박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       *       *

“에, 에, 엣취―!”

거하게 재채기를 하자 격렬하게 몸이 떨렸다. 그 격한 진동이 사슬을 타고 람에게까지 전해졌다. 

해안가라 그런지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유난히 거셌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닷물로 쫄딱 젖어 있는 이예주가 바람을 한 번 맞을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콧물을 찔찔 흘리는 것은 당연했다.

“어흐으! 추워.”

“추워여, 누나?”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자 조롱이가 곁에 다가서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재채기 소리를 들었음에도 매정하게 제 갈 길만 가는 람의 검은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예주가 짧게 대답했다.

“어. 추워 죽을 것 같아.”

짤캉, 짤캉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는 사슬과 남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그의 귓구멍에도 들리도록 최대한 크게 ‘크헝!’ 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그러자 조롱이가 비꼬며 놀렸다.

“난 안 추운데. 그러게 누가 물놀이 하러 들어가래여?”

그놈의 물놀이 소리에 이예주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당장에 ‘너!’ 하고 괴성을 지르려던 그녀는, 이런 사소한 감정 소모에 힘을 빼느니 차라리 체온을 유지하는 데 힘을 아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후 씹듯이 내뱉었다.

“너는 말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제발 말 걸지 마.”

“흥, 쌤통.”

그러나 이예주로 인해 동쪽 대륙까지 달려오며 개인적으로 쌓인 것이 많았던 조롱이는 기어이 ‘베―’ 하고 혀를 내밀어 그녀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그러고는 씩씩대는 이예주를 남겨 두고 앞서가는 제 주인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저게……!”

두 주먹을 움켜쥐고 조롱이를 뒤쫓으려던 이예주는 제 분수를 알려 주듯 짤캉하고 손을 압박하는 수갑의 서늘한 느낌에 몸에 잔뜩 주었던 힘을 탁 풀었다. 

조롱이도 자유롭게 제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죄인처럼 포박하여 질질 끌려가는 자신이 화를 내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리라. 

손목에 추를 매단 듯 무겁게 느껴지는 검은색 수갑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예주가 급속도로 우울해질 때였다. 

다시금 휘잉, 썰렁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가련한 몸뚱이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아흐, 춥잖아.”

자신과도 같은 가녀린 여성이 이렇게 추워하고 있는데 남자는 단 한 번도, 그저 스치듯이라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있던 정마저 모조리 떨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가히 박수 쳐 줄 만했다. 으으! 

잠시 이를 갈던 이예주가 누구 들으라는 식으로 이번에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해서 내뱉었다.

“아! 춥다!”

“…….”

“너무 추워서 겨울도 아닌데 얼어 죽겠네!”

“…….”

“얼어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누가 좀 묻어 줘요! 죽었는데도 사슬로 끌고 가지 말고. 그래도 사람 취급을…… 헙!”

듣거나 말거나 제멋대로 마구 지껄여 대던 이예주는 앞서가던 남자가 뒤돌아 다가오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시뻘건 눈동자가 좋지 않은 기세로 그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지레 찔린 이예주가 목을 움츠렸다.

“왜, 왜요? 다, 당신한테 하는 소리 절대 아닌…… 에, 에, 에……!”

당황하여 뒷걸음질 치던 이예주는 다시금 코를 찡하게 울리는 재채기의 기운에 흉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람이 채 피하기도 전에 ‘푸에취-!’ 하고 분무기처럼 엄청난 파편들을 흩뿌렸다. 

매운 코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개를 든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제가 내뱉은 모든 것들을 뒤집어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람이었다.

“헉.”

제 입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침방울들을 람의 턱 근처에서 발견한 그녀가 기겁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미간이 그녀의 신변을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구겨졌다. 

그냥 있어도 미친 것 같은 남자에게 침을 뱉다니. 이예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저, 저기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요. 다, 당신이 갑자기 다가와 가지고 가릴 새도 없이…….”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달달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하얀 얼굴 군데군데 튀어 있는 것들을 서둘러서 닦아 냈다. 

그런 행동이 면전에 재채기를 해 댄 것만큼 버릇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됐다.”

“예, 예?!”

이제 그만 더듬어 대라는 소리에 이예주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가볍게 그녀의 손을 제 얼굴에서 쳐 냈다. 

찰싹, 이예주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휙 떨어졌다. 

남자는 불현듯 입고 있던 검은색 겉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이예주가 움찔 몸을 빼려 들자 남자가 손에 들었던 자신의 겉옷을 아예 그녀의 머리 위로 덮어씌웠다. 

“뭐, 뭐, 뭐하는……!”

하지만 옷이 너무 커서 그런지 그녀의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어린애가 수녀 놀이 한답시고 아빠 옷을 뒤집어쓴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으나 그녀는 그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자꾸만 뒤로 빼는 머리를 억세게 잡아챈 남자가 허리를 숙여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그녀의 턱밑에 소매 두 짝을 묶어서 옷을 고정시켰다. 

그사이 이미 몇 번 겪어 본 남자의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이듯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다 돋는 기분에 이예주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아직도 추워하는 줄 알았던지 남자가 손을 뻗어 턱밑에 고정된 매듭을 세게 한 번 더 묶었다. 

훅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에 이예주는 떨던 몸도 멈추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미쳤나 봐. 왜 이래, 이 남자? 왜, 왜 갑자기 자기 옷을 막 벗어서.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이거 너무, 너무 가깝잖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가까이서 보니 새삼 남자의 얼굴에 전율이 일었다. 

일부러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이목구비를 훑어보던 이예주의 시선이 문득 남자의 모양 좋은 붉은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팔족 땅에서의 과거가 떠올랐다. 

저 섹시한 입술이 막무가내로 다가와 제 입술을 물고 빨고 그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와 혀를 막, 막, 막……! 

그녀가 홀린 듯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사이, 그의 미간이 스리슬쩍 다시금 좁혀졌다.

“춥다고 난리를 치더니, 그사이 또 변덕이 생긴 건가.”

생각보다 더욱더 가까이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예주는 퍼뜩 경련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시뻘건 눈동자가 눈앞을 점령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군. 더 이상 안 춥나 보지.”

“…….”

“변덕이 일어서 이젠 덥다고 떼를 써도 소용없다. 다 떠나서…….”

남자가 다시 한 번 매듭을 꽈악 묶으며 말했다. 너무 세게 묶은 나머지 이예주는 목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불평할 수 없었다. 

남자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기분 좋다는 듯 슬쩍 웃었다. 그러고는 소름 돋는 소리를 지껄여 댔기 때문이다.

“풀면.”

“…….”

“죽는다.”

쿵. 이예주는 그 순간, 갈비뼈가 와르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누군가 심장을 쥐어 끌고 발끝까지 내던졌던지. 이상하게 자꾸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죽이겠다는 협박을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건만, 폭언이라도 들은 듯이 가슴이 턱 막혔다. 

이건 갑에게 차마 대들 수 없는 을의 분노인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이윽고 남자가 허리를 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이예주는 제가 숨을 완전히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쫑알대고 걸어.”

남자가 시뻘건 눈동자를 거두며 홱 돌아섰다. 

쩔컹쩔컹, 남자와 이어진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얼빠진 숙맥처럼 따라가지 않은 채 팽팽히 사슬 줄만 잡아당기던 이예주는 그녀가 오든 말든 억세게 잡아끌고 전진하는 남자 때문에 ‘어, 어!’ 하고 버둥대다가 강제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넘어져서 진짜 가축 꼴이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정한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뜻밖인 행동에 너무 당황해서인지, 혹은 남자가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건지, 신기하게 그의 겉옷을 뒤집어씀과 동시에 더 이상 쌩쌩 부는 바람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듭을 짓고도 한참 길이가 남는 남자의 겉옷 소매가 턱밑에서 덜렁덜렁했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터덜터덜 걷던 이예주는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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