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익, 이예주의 몸이 젖은 땅을 파헤치며 한 차례 끌려가다 멈췄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남자의 말처럼 문어가 내뱉은 염산에 따끔따끔 살이 녹아내리면서 잡아먹힐 것이다.
이예주가 두려움에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람을 절박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하라는 대로 할게요! 으, 으흐으,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진짜! 살려 주세요, 제발.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흐, 으흑.”
“물론 그 말도 신뢰하지 못하는 대상에 포함된다. 네 혀가 간사하다는 것쯤은 애초에 파악했지. 좀 더 참신한 거 없나?”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질리기까지 한다는 듯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예주는 말문이 막혔다.
잘못했다는 말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역시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타임 오버라는 듯 그녀를 향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없으면.”
그 말과 동시에 이예주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정말로 곧바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느슨해진 손목의 압박감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을 붙잡는 그 손마저 떼어 내려는 듯 억세게 이예주의 손을 잡았다.
“이, 이러지 마요. 장난이죠? 놓지 마요. 왜 이래요, 람. 왜 이래요!”
“여기서 그만 인사할까.”
“아, 아악! 이러지 마요! 잘못했어요! 제발,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흐헉! 끌려, 끌려가!”
“황조롱이가 그동안 즐거웠다고 안부 전해 달라 하더군.”
남자가 이예주의 손을 털고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정말로 저를 버리고 가 버릴 것처럼 구는 람에게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주절댄 건 생존을 향한 이예주의 본능이었다. 그랬을 뿐인데.
“주인님!”
그것이 통한 듯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주인님! 우, 우리 계약했잖아요!”
“…….”
“내, 내가 당신이 날 특별하게 여겨 살려 주었던 이유도 찾아 주기로 하고! 당신이 다른 놈들 앞에서 요망한 짓거리를 하면 죽인다고도 했었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 이제 당신 거라고도 했었고!”
“…….”
“우, 우리 그런 조건으로 계약했으니까 당신이 내 주인이잖아요! 이렇게 버리고 가면 어떡해!”
저 비루한 몸뚱이를 특별하게 살려 주었고, 또 그것을 제가 가진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었던가.
람은 서쪽 대륙에서 인간 여자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망발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자 이예주가 다시 외쳤다.
“순진한 처녀 꼬드겨서 사, 상 준다고 뽀,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고 막, 막 그랬으면서!”
“에엑? 뽀…… 뽀뽀…… 키, 키스도 했다구여?!”
멀리서 조롱이가 경악한 목소리로 꽥 소리쳤다.
그러나 죽네, 사네 하는 이예주의 귓구멍에 그 목소리가 들어올 리 없었다.
“이렇게 가면 천벌 받아요, 당신! 아니, 아니, 주인님! 살려 줘요! 제발 흐으, 제발 놓지 마요!”
그녀가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울며불며 호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는 미동이 없었다.
그사이 다리를 휘감은 것은 다리뼈를 부숴 먹을 것처럼 알통을 거세게 압박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그녀를 바다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훅 잡아끄는 힘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미끄러지듯 이예주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대로 끌려간다. 바다로.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지는 느낌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악―! 엄마! 예주 죽어! 살려 줘어억!”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주르륵 끌려 바다로 들어가던 이예주의 손목이 턱 하니 붙잡혔다.
그녀의 몸뚱이는 다시금 하체까지만 바닷속에 잠긴 채 간신히 멈췄다.
이예주의 입에서 ‘억!’ 하고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잡힌 손목이 억 소리 나게 아팠기 때문이다.
아까 잡았던 건 애들 장난이었다는 양 엄청난 아귀힘이 그녀의 손목을 끊어 먹을 듯 조여 댔다.
그녀는 꾹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시뻘건 눈동자가 그녀를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세게 잡아 줄 수 있으면서 왜 그 망할 짓거리를 해서 사람 애간장을 다 태웠는지,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남자였다.
“놔라.”
남자가 짧게 명령했다. 그러자 그녀의 다리를 옥죄던 촉수 같은 것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풀렸다.
이예주는 그것이 채 풀리기도 전에 괴성을 지르며 다다다닥 육지로 재빠르게 기어 올라왔다.
바다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한참이나 더 기듯 뛰듯 달린 이예주는 젖은 땅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막처럼 모래가 풀썩 날리는 백사장에 다다라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내려 정체 모를 그것이 옥죄던 다리를 내려다보니 끈끈한 점액질 같은 게 청바지에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이 소름끼쳐서 그녀는 다리를 허공에 발작적으로 털어 댔다.
“두 번이나 알고도 날 속아 넘어가게 만들다니.”
“…….”
“역시 혀가 간사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로군.”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람이 짧게 혀를 찼다.
간사한 혀를 가진 계집이란 말에 매우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이예주의 신경을 더욱 박박 긁는 행동을 개시했다.
바로 눈앞에서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을 들고 약 올리듯 짤랑짤랑 흔들어 대는 게 아닌가.
“내 열쇠!”
대체 어느 틈에 가져간 건지 이예주의 십만 원짜리 열쇠가 남자의 손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털어 대는 것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 열쇠를 낚아채기 위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채 닿기도 전에 리락쿠마가 위로 휙 들어 올려졌다.
이예주로선 절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윗세계였다.
“돌려줘요! 중요한 거란 말이에요!”
“이건 압수다.”
“뭐요?!”
“도무지 한 번 말하면 들어 처먹질 않으니, 이런 거라도 담보로 삼을 수밖에.”
“안 돼엑!”
그녀가 있는 힘껏 폴짝 뛰어 남자가 들어 올린 열쇠를 낚아채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남자는 이예주의 그런 행동을 고양이 재롱 보듯 하며 여유롭게 열쇠를 흔들어 댔다.
“왜 이래요, 나한테! 다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핸드폰도 뺏어 가더니 이젠 열쇠까지 가져가고 흐, 흐흑…….”
결국 이예주는 제 풀에 지쳐 백사장에 주저앉으며 울먹였다.
람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말 잘 들으면 돌려주마.”
“먼저 돌려주면 말 잘 들을게요.”
“너에 관해선 뭐든지 후불이다.”
그게 뭐야, 이 자식아!
이예주는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건 다 계획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그녀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문어도, 열쇠도 모두 다 남자가 계획한 일이었단 말이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문’을 넘자마자 자신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 뒤통수가 당기다 못해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예주의 심란하고 복잡스러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품에 그녀의 열쇠를 쏙 집어넣은 남자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래서.”
“…….”
“사막에서 도망은 왜 친 건지 이제 대화 좀 나눠 볼까.”
“헉.”
남자가 잊고 있었던 주제에 대해서 꺼내자, 이예주가 짧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가 왜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꼴로 문어 밥이 될 뻔하다 간신히 살아난 건지.
자신은 사막에서 도망을 쳤다. 무려 이 미친놈을 코앞에 두고 도망을.
그런데 기어코 도망쳐 ‘문’을 넘자마자 만난 게 다시 그 당사자라니, 이 얼마나 살 떨리는 상황인가.
하필 그가 있는 곳인지도 모르고 ‘문’을 넘다니. 실수도 이런 멍청한 실수가 따로 없다.
이예주는 ‘문’ 안의 광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넘어 버린 과거의 저에게 욕을 퍼부었다.
“대답.”
그러나 과거를 떠올리며 청승을 떠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남자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재촉했다.
이예주는 움찔 몸을 떨며 남자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그게요. 그, 그게 있잖아요…….”
그녀가 우물쭈물 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도망을 치려고 친 게 아니라요…… 어……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막 끌고 가려고 하고, 바퀴벌레는 또 저를 막 집어 던지고…… 그리고 군인들이 막 마구잡이로 총을 쏴 대고…….”
“…….”
“그 뿔각 대장! 그놈이, 그놈이요. 갑자기 막 미친 듯이 끌고 가다가 뿔각을 불었는데 그 괴물이……! 괴물이 나타났잖아요. 괴물이 나타났는데, 그, 그게 너무 무섭고, 소름 끼치고…… 당신은 갑자기 그 괴물을 마구 내리찍어 대니까…….”
“그래서.”
이예주가 특유의 횡설수설 말하기를 시전했다. 그러나 다른 때 같았으면 모두 다 정신 나간 헛소리로 치부했을 람이 그녀의 말꼬리가 끊기기 무섭게 채근했다.
이예주가 다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요…… 도망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흐, 흐흑. 사막은 너무 어둡고…… 당신은 너무 멀리 있었고, 총소리가 뒤에서 막 미친 듯이 나는데 저는 혼자 있었으니까…… 그니까 그게, 그게요…….”
“…….”
“자, 잘못했다고요! 앞으로 당신한테 바로 달려갈게요.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예주는 제 헛소리 타령이 전혀 먹히질 않자 바로 계획을 달리해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싹싹 빌었다.
아, 불쌍한 을의 인생이여.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다신 안 그럴게요. 진짜요! 네? 주인니임, 한 번만 웁……!”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주인님 소리까지 내뱉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때였다.
남자가 문득 티 하나 묻지 않은 매끈한 손으로 떠벌리던 입을 틀어막았다.
“입.”
“우웁! 웁!”
“그 주인님 소리. 다시 한 번 지껄이면…….”
남자가 시뻘건 눈으로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그 말을 내뱉는 남자의 눈이 어쩐지 그녀의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이 방법은 잘못 먹혔던가. 오히려 남자의 화를 돋운 것이 아닌가 싶어, 단박에 겁에 질린 이예주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그녀의 확답을 받아 낸 후에야 남자가 억세게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너. 내게 더 속이고 있는 건 없나.”
“네, 네?!”
몸을 사리고 있던 이예주에게 남자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잉 반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능력. 대륙에서 다른 대륙까지 쉴 틈 없이 도망칠 수 있는 것. 그 외에 내게 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어, 어…….”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이예주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또다.
이예주의 알량한 능력 따윈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녀보다 한 단계 위의 고차원적인 세계에 있는 존재처럼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설마, 다 알고 있는 건가? 단순히 도망을 치는 게 아니라, 미래를 넘어 도망을 치는 자신의 능력을.
아니야, 알 리 없다.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녀의 능력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예주는 남자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닌 가, 싶어 주의 깊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남자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뭐 또 다른 게 있나? 혹시나 속인 것이 있으면 뭐든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어, 없어요!”
하지만 이예주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가 자각을 하기도 전에 입을 먼저 움직일 줄 아는, 자랑스러운 답 없는 인간의 표본이었다.
빠른 이예주의 대답에 그녀보다 더 놀란 듯, 람이 되물었다.
“뭐?”
“……어, 없어요. 없다고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한테 또 다른 능력이 뭐가 있겠어요? 도망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다른 능력이요?”
한 번 거짓말을 하니 그다음은 청산유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늘어지는 남자의 눈에 이예주는 속으로 벌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