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79)화 (80/319)

“에? 예주 누나가 능력을 쓸 때여? 음…… 주인님이 벼락을 내리칠 때 갑자기 뿅 하고 사라졌잖아여?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려서 엄청 강한 다리족인가 보다 했는데여.”

“아무리 강한 다리족일지언정 기척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 그러고 보니, 귀신같은 다리족 족장도 그렇겐 도망가지 못할 텐데…… 그건 또 그러네여. 그럼 예주 누나는 어떻게…….” 

조롱이는 이예주가 주인이 내리는 벼락을 피해 도망가던 때를 떠올렸다. 

이틀 전에 사막에서 주인을 습격했던 인간들도 다리족 놈들이었다.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 짜증 나는 능력을 이용하여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쳐 버렸다. 

주인이 다리족 놈들을 쉽게 전멸할 수 없는 이유도 다 그것에 있었다. 

치고 빠지는 얍삽한 짓거리를 반복하기 때문에 잡아 족치기도 힘든 놈들이 바로 다리족이었다. 

하지만 도망을 친다고 해도 완전한 도망은 없기 마련이다. 

지금껏 그 어떤 대단한 능력을 지닌 다리족 인간이라고 해도 도망가는 모습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인간 여자는 달랐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사라졌다. 

다리족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것이 우스울 정도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 어떤 다리족도 그런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으으, 그러고 보니 누나는 나타날 때도 갑자기 기척도 없이 뿅 나타났었는데…….”

황금색 동공을 정신없이 굴리며 이예주에 대한 기억을 쥐어짜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롱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럼 누, 누나는 뭐예여? 귀, 귀신이에여? 귀신이라 그렇게 기척도 없이…….”

“그 계집, 제 능력을 발휘해서 도망칠 때마다 몸에서 빛이 나거나 주위에 빛 더미를 만들더군.”

“에? 에? 빛이여? 반짝반짝 빛 말이에여, 주인님?”

이예주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귀신설까지 발전되었을 무렵, 주인이 냉정하게 그 꼬리를 끊고 인간 여자에 대해 일갈했다. 

뜬금없는 빛 이야기에 조롱이가 조금 전보다 더 격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빛. 너도 사막에서 보았겠지. 검은 안개를 빨아들이던 것을.”

“아……!”

짧게 힌트를 주는 주인의 말에 조롱이가 옳다구나, 무릎을 딱 쳤다. 사막에서의 일이 떠오른 듯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조롱이는 금세 표정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그냥 검은 안개가 다른 곳보다 더 빨리 뭉쳐지기만 할 뿐, 빛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려 주인을 올려다보던 조롱이는 미세하게 굳어지는 그의 미간에 끝말을 흐리다가 슬슬 입을 다물었다.

“양반은 못 될 인간이군. 왔다.”

주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치뜨며 저 멀리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조롱이도 덩달아 바라보았지만 거세게 몰려와 거품같이 부서지는 푸른 바닷물만 보일 뿐, 인간으로 보이는 건 딱히 없었다.

“그 계집의 몸에서 빛이 나는 건 도망칠 징조 중 하나이니 새겨 두도록 해라.”

“감시인가여, 주인님?”

“쥐새끼처럼 한 번 도망칠 땐 기척도 남기지 않고 도망치는 계집이니, 이왕이면 미리 차단하는 것도 좋겠지.”

람은 그 말을 끝으로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동상과 같이 하룻밤을 앉지도 않고 꼬박 서 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절도 있는 걸음걸이였다. 

조롱이는 비장한 얼굴로 주인의 말을 되새기며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지나가며 흘려 말한 듯 보이지만, 명령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람은 정확하게 한곳을 바라보며 걸었다.

쏴아아- 다시 거센 파도가 몰려오는 해안선 위로 조롱이에겐 보이지 않는 빛 더미가 수박만 하게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쏴아아― 

철썩. 

차가운 무언가가 이예주의 뺨을 서늘하게 치고 지나갔다. 

으응, 그녀가 작게 신음했다. 침이라도 흘린 것처럼 얼굴과 맞닿은 부분이 축축했다. 

그 느낌이 싫어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채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다시 ‘쏴아아―’ 하고 무언가 몰려와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뺨을 치고 쪼르르 물러났다. 

좀 더 확실한 그 느낌에 그녀가 두 눈을 번쩍 치켜떴다.

“헉.”

쏴아아. 다시 차가운 물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자 이예주가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핑 도는 현기증에 다시금 주저앉았다.

“뭐야, 뭐야. 여기 뭐야…… 여기 어디지?”

잠시 주저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파도가 계속해서 몰려왔다가 다시 몰려갔다. 

이미 그녀가 의식을 되찾기도 전에 푹 젖어 있던 청바지가 또 한 번 물을 머금으면서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다. 

서늘한 물기운에 오싹 한기가 들었으나 이예주는 다가오는 파도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버린 몸, 이제 와 피한다고 해서 축축하고 질척한 느낌들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바닷물이 몰려오는 것을 그대로 맞으며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묘한 비린내와 짠 내가 섞인 바람이 훅 몰아쳐 안 그래도 물에 닿아 차가운 그녀의 몸을 더욱더 차갑게 만들었다.

“사막에 웬 바다가…….”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제가 ‘문’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을 넘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미친…….”

그녀가 아무렇게나 내팽개 두었던 두 손을 들어 조심스레 제 볼을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이예주, 어쩌자고…… 어쩌자고……!”

허옇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녀의 머릿속에서 ‘문’을 넘기 전 사막의 상황이 차근차근 되풀이되었다. 

모래 위에서 원치 않게 몇 번을 뒹굴었더니 얼이 빠진 것처럼 정신이 다 몽롱했다. 

주위는 어둡고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이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 람만이 홀로 고고한 학처럼 여유롭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고개를 뒤흔들며 이상 행동을 하기 전까지만이었다. 

‘으헉! 난 몰라!’ 따위의 괴성을 지르고 ‘문’ 쪽으로 뛰어들었을 적에 오금이 다 저릴 정도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달려들던 그가 떠올랐다. 

이예주를 움켜쥐려고 했던 듯 바로 코앞에 그의 주먹이 있었다. 

1분, 아니 1초만 늦었어도 필히 후드를 붙잡혀 끌려갔으리라. 그리고 그다음은…….

“으흐흑. 왜…… 왜 도망쳤어, 왜…….”

네 도망 길은 죽음뿐이라는 람의 말이 생각났다. 

반사적으로 온몸을 타고 흐르는 두려움에 이예주가 얼굴을 감쌌던 손을 더 올려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그랬어, 왜! 딱히 위협한 것도 없었는데 왜!

머리채가 다 뽑혀 나갈 만큼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자책하던 이예주가 우울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문’이 열린 것까진 어찌어찌 이해가 갔다. 

괴물을 들어 올려 미친놈처럼 쾅쾅 찍어 대던 람은, 그사이에 자신이 다 쓴 휴지 조각처럼 이리저리 패대기쳐지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그것은 그 상황을 너무나도 좋게 표현한 말이다. 그놈은 자신이 죽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신경을 조금이라도 썼다면 그 괴물 덩어리를 자신을 향해 던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래서 ‘문’을 택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도망이었다.

“하…… 왜…… 왜 도망쳤지…….”

제 머리통을 붙잡고 왜 도망을 쳤는지 이유를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본인도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의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냥. 그냥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달까.

쏴아아, 다시금 파도가 몰려와 이예주의 청바지를 감싸 안더니 잡힐세라 꽁무니를 빼며 순식간에 쏴르르 도망갔다. 

다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올라와 머리까지 점령하는 한기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금세 몰려온 바닷물에 엉덩이까지 푹 잠겨 있는 하체가 보였다. 

차가운 느낌에 오한이 다 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파도에 씻겨 나간 덕분인지, 가랑이와 허벅지를 까끌거리게 하던 모래 알갱이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물을 머금어 다리에 착 달라붙은 청바지를 애절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체에 힘을 준 때였다. 

쏴아아, 거품을 일으키며 다시 물러가는 혼탁한 바닷물과 함께 덩달아 둥둥 떠밀려 가는 무언가를 이예주의 눈이 포착한 것은. 

“……어?”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리락쿠마 인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손때가 타 지저분하던 그것이 물에 푹 젖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팬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인형의 머리통 부분에 달린 것이었다.

“안 돼! 내 열쇠!”

이예주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몸을 더듬거렸다. 

어디 흘릴까 봐 헐렁한 후드티 주머니에서 빼내 청바지의 뒷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어 두었던 것 같은데 어느 틈에 빠진 걸까. 

“안 돼! 가지 마!”

당황하는 그녀를 약 올리듯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그녀의 하나뿐인 원룸 열쇠가 더욱 멀리멀리 떠밀려 갔다. 

잃어버리면 피 같은 십만 원을 집 주인에게 전해야 했다. 

그렇기에 열쇠를 휴대폰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겨 뒷주머니에 고이 들고 다녔던 것이다. 

다른 집은 다 기본으로 달려 있는 도어 락을 사용했으나, 처음 자취 생활을 하는 이예주만은 괜한 찜찜함에 홀로 도어 락을 뜯어내고 걸쇠 달린 자물쇠로 잠금장치를 바꾸었다. 

그녀의 원룸은 신축 건물이었다. 

전화도 잘 받지 않던 집주인이 현관문에 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 잠금장치를 임의로 바꿨다는 이예주의 말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뚱하니 바뀐 자물쇠를 바라보던 주인이 그녀에게 복사 키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예주는 당연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끝내 키를 주지 않자 뿔이 난 주인은멋대로 바꿨으니 키를 잃어버려서 다시 현관을 건드릴 시 벌금 십만 원을 내야 한다며 짜증을 내었다. 

이예주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녀의 생활 경로는 너무나도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집, 학교, 집, 학교, 가끔 냉장고 비었을 때 집 앞 편의점 가는 것이 다였으니 잃어버릴 틈이 없었다. 

아무튼 그랬다. 그렇게 장담했던 십만 원짜리 열쇠가 그녀의 앞에서 항해를 시작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당장엔 쓸모가 없을지언정, 집으로 돌아간 후엔 가장 잃어버리면 안 될 물품 1순위였다. 

이예주가 사색이 되어 그것을 잡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것은 당연했다. 

첨벙첨벙, 물살을 헤치며 뛰자 얼굴과 머리로 짠 바닷물이 거세게 튀었다.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흐! 추워! 어흐으!”

이미 다 젖었으니 뭐 다를 게 있나 싶었지만, 막상 뛰어든 바다는 정말로 욕 나오게 차가웠다. 

절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이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는 열쇠를 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얼마 들어간 것 같지도 않은데 금방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무심코 내려다본 바닷물은 얕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심해처럼 그 안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바닷물이 어두운 색이었나? 

이예주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몰려오는 바닷물 때문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철썩철썩. 

그녀를 밀어내는 듯 파도가 꽤 거셌다. 

자신 쪽으로 물살이 밀려오는 것이 분명한데, 왜 열쇠는 잡을 만하면 자꾸만 멀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오! 이리 와!”

쭉 뻗은 손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던 열쇠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물처럼 유려하게 빠져나갔다. 

거의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것처럼 이예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열쇠고리는 사람 애간장 떨어지게 자꾸만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이예주가 그것을 쫓아 물살을 헤치고 들어가는 동안, 허리까지 차올랐던 물이 어느덧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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