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77)화 (78/319)

안쓰러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본인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고 되묻기보단, 정말 헬기가 있긴 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헬기가 있어도 저 남자의 손아귀에서 살아서 도망칠 수 없음을 모르는 뿔각 대장이 불쌍했다.

“구원자님!”

그가 이예주를 향해 묶이지 않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애타는 절절한 목소리를 그녀가 구겨진 얼굴로 외면했다. 

뒤통수에서 ‘끼기기긱―’ 하는 괴기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한 번 ‘콰쾅, 쾅!’ 하고 육중한 것이 내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인간들의 생생한 비명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도 옵션으로 따라붙었다. 

온통 아수라장이다. 혼란과 혼돈, 그 중심에 이예주가 서 있었다.

그녀를 부르는 뿔각 대장을 묶어둔 채 뒤에 있는 나머지 군인들을 거대한 괴물로 두더지 잡기 하듯 찍어 누르는 멀티 플레이를 하면서도 남자의 표정은 여유를 넘어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은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 모든 것을 초월한 그의 표정이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슬쩍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제 불쌍한 몸뚱이는 얼마나 굴렀는지 온통 모래와 먼지투성이였다. 

까진 팔도 아프고 이마도 따끔거렸다. 모래가 들어간 신발이 무거웠다. 팬티 속에도 모래가 들어갔는지 가랑이 또한 까끌거렸다. 

한바탕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신과는 대비되게 람의 주변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잔하고 고요했다. 

자신은 이렇게나 버려진 비닐 조각처럼 구겨졌는데, 그는 너무나 멀쩡했다. 없던 분노가 화산 폭발하듯 치솟을 정도로. 

비루하기 짝이 없는 제 모습을 확인한 후, 안 그래도 울상이던 이예주의 얼굴이 더욱더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시뻘건 눈으로 주시하던 남자가 문득 팔짱을 풀더니 자신을 향해 스윽 한쪽 손을 내밀었다. 

이 지옥 속에서 구해 줄 테니 알아서 오라는 관대함과 자비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오히려 그의 행동에 지금까지의 원초적인 믿음이 뒤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 자식은 처음부터 나를 구해 줄 생각은 있었을까?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어쩌다 살아남았으니 마지못해 거두는 것은 아니고?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뿔각 대장에게 납치당하는 것을 저지한다고 한들 저렇게 거대하고 흉측한 괴물을 무식하게 내 던질 리 없었다. 

수천 개의 대가리가 바로 코앞에 떨어졌었다. 

뿔각 대장이때맞춰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그 역겨운 것에 깔려 쥐포처럼 납작하게 짜부라졌을 것이다.

그녀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양옆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왼쪽은 ‘문’, 오른쪽은 람. 

“흐, 흐흑…….” 

짧게 신음하며 이예주가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온통, 온통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구원자님! 검은 파편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은 파편에게서 구원자님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쪽으로 몸을 날리십시오, 당장!”

근처에서 허우적대던 뿔각 대장이 이예주에게 큰 소리로 애원했다.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어 허우적거리는 주제에 그녀가 몸을 날리면 받아 준다는 헛소리나 하고 앉아 있으니 웃음이 다 나왔다. 

이예주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검은 파편은 악의 축입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구원자님, 제발!”

악의 축이란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그건 옳소. 거참, 옳은 말 잘하는 사내일세. 

그녀의 고갯짓을 용케도 본 건지 남자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이예주는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들었다. 

자신은 정말 속고 있는 걸까. 능력에 대해 모든 걸 밝힌 것이 아니니 아직 저는 이용 가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닌가. 남자는 그것을 모르니. 자신은 그저 그의 작은 배려로 이곳에서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람이 내민 손이 그저 하찮은 미물에 대한 동정이라니. 그녀는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2017년 현대에 살 때, 이예주는 다른 이들에게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물론 정을 내줄 만큼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온 사람도 없었지만,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고 벽을 쌓았던 적 또한 무수히 많았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한 본능인 동시에 그녀의 유일한 자기 방어였다. 

누군가에게 능력에 대해서 말하며 이해를 구걸하고, 희망을 상실하고. 그것은 십 대 후반의 이예주에게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함이었다. 

엄마와 살던 집 마당 풀 한 포기에도 정을 떼고 미련 없이 원룸으로 들어간 자신. 

서운해하던 이웃집 주민들과 그나마 알고 지내던 동네 아이들의 인사를 굳은 얼굴로 받은 자신. 

대학교에 들어서서 밥을 같이 먹자던 여자애들 무리에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신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이예주는 자신답지 않게 람과 조롱이에게 많은 감정을 내비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나. 최대한 선을 그었던 자신이 그들에게 포함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기 시작했던 것은. 

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으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사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쑥불쑥 람과 조롱이에 대한 이야기를 알길 원했고, 그럴수록 더욱더 자신에 대한 것은 숨겼다. 

그리고 그들이 선을 넘은 그녀에게 위치를 상기시켰을 때, 상처받은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예주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제게 손을 내민 채 서 있는 람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옥에서 방금 올라온 사람처럼 두 눈을 번득이며 서 있었다. 

그녀를 오롯이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피처럼 붉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인간을 증오하고, 자신은 그가 증오하는 인간이었다.

“……아.”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처럼 뇌리를 통렬하게 꿰뚫는 전율에 이예주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당신은 변한 것이 없었구나. 

변한 건 자신뿐이었다. 어느새 이예주는 홀로 그들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 기어 와.”

잠시 흠칫거리던 그녀를 놓치지 않고 보았는지 붉은 눈의 남자가 명령했다.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져 있었다. 

딱히 위협한 적도 없는데 그 존재만으로 이예주는 단번에 겁에 질렸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왼쪽에서 ‘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이 눈을 더욱더 따갑게 찔러 댔다. 

‘문’과 람. 또 한 번 그것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울 것처럼 흐려졌다. 

그녀가 순순히 ‘기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자의 기세가 순식간에 흉포해졌다. 

“당장.”

람이 흡사 말을 짓씹는 것처럼 내뱉었다. 

남자의 시뻘건 눈이 마치 당장 오지 않으면 이예주의 사지를 하나하나 분해해 와득와득 씹어 먹을 것처럼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저 흉포한 남자에게 걸어가는 것이 정녕 답이란 말인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그녀가 답을 고민하고 있을 적, 왼쪽에서 다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구원자님! 속지 마십시오! 이용당하면 안 됩니다! 당신을 죽일 겁니다, 구원자님!”

아직도 죽지 않은 건지 뿔각 대장이 제 존재를 계속해서 부각시켰다. 

그녀는 여전히 살기등등하게 빛나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울고만 싶어졌다. 

등 뒤에선 아직도 ‘쾅, 쾅!’ 하고 굉음을 내는 두더지 잡기가 한창인 듯싶었다. 

“구원자님! 제발 악의 축에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구원자를 찾는 그의 소리가 흡사 사이비 교주를 찬양하듯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인간들의 등장에 그쪽으로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단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팔족 땅에서 일리야가 말했던 구원자란 소리. 

구원자. 

정말 자신은 구원자일까? 

저주받을 능력을 가지고 저 미친놈으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빌어먹을 1000년을 넘어왔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에게 관대하게 손짓하는 람을 뒤로하고 눈 딱 감은 체하며 그들을 믿기엔 이예주의 간은 너무나도 작았다. 

머리통과 팔다리가 수백, 수천인 괴물에 깔려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뿔각으로 부른 괴물에 의해 압사당하고 있는 인간들인데, 저 시뻘건 남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겠단 말이 확실할지도 미지수였다. 

으으, 어떡해. 이예주가 울상을 하고 혼란스럽다는 듯 눈알을 거세게 뒤룩뒤룩 굴렸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왜 이런 양자택일의 시련을…….

“구원자님! 저를 믿으…….”

“인간.”

뿔각 대장의 말을 끊고 람이 다시 한 번 이예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번 말 안 한다.”

“…….”

“이리 와.”

그의 말에 이예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아, 모르겠어…….”

이예주는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자신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붉은 시선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따끔거렸다. 

팔족 땅에서 그와 부끄러운 짓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예주는 람만이 그녀의 정답이라고 믿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1000년 후인 이 세계에서 뭔가 특별한 존재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음은 근간부터 뿌리째 흔들렸다. 

남자는 자신이 위험에 처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예주는 남자의 인간 말살 계획에 이용되고 있는 체스 말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처럼 앞으로도 간신히, 아주 간신히 남자에게 붙어 살아남다가 남자에게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그땐……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남자의 손에 개죽음을 당하는 것인가?

이예주는 울상을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괴상한 태도에 람의 잘생긴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그는 말로 해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남자가 오던 걸음을 뚝 멈췄다. 

이예주는 곧바로 차가운 뱀처럼 번뜩이는 남자의 시뻘건 눈과 마주쳤다. 

“나, 난 몰라…….”

그녀의 태도가 분명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예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남자가 다시 움직였고 그녀는 잔뜩 두려움을 집어 먹은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움직이지 마.”

“……히익!”

남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또 한 번 명령을 내렸다. 

뒷걸음질 친 것 말곤 딱히 잘못한 점도 없건만, 이예주는 사방을 둘러보며 살 구멍부터 찾았다. 

평평한 모래뿐인 사방을 급하게 둘러보던 이예주에게 하나뿐인 살 구멍이 닿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직도 ‘문’이 환하게 빛을 흩뿌리며 저를 건널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은 현재와는 다르게 ‘문’ 너머로 환한 태양 빛 아래 출렁출렁 거세게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어찌나 역동적인 파란색인지, 단지 영상일 뿐인데도 코에서 물씬 시원한 바다 내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어두운 사막에서 유일하게 환히 빛나는 ‘문’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안이 비추는 평화로운 바다의 풍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순 이예주의 머릿속에 ‘문’만이 자신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네 도망 길은 죽음뿐이라고 했을 텐데.”

마치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람이 말했다. 

그가 다시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퍼런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으, 으으…… 모, 몰라.”

지금이라도 그에게 달려갈까? 달려가서 납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해야 할까. 

그러나 살기 어린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예주는 1초 만에 그 생각을 황급히 치워 버렸다. 

그녀가 갈팡질팡 하는 사이, 람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시각각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곧 있으면 그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갈 것 같았다.

“인간.”

“어, 어흑…… 몰라. 난 모른다고! 아악!”

다시 자신을 종용하는 목소리에 이예주가 불현듯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빛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을 보면 눈이 시뻘겋게 물드는 남자는 자신을 증오했다. 

이예주가 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늘 그렇듯 자신의 능력이었다. 

“으헉! 난 몰라!”

빠르게 다가오는 람의 손이 간발의 차로 자신의 후드를 낚아채기 전에, 그녀는 ‘문’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곧 환하게 빛나던 ‘문’이 그녀를 덥석 삼켰다. 

이예주는 그 순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저리 나는 사막을 혼자서나마 탈출할 수 있어서. 

익숙하고도 따뜻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멀리서 “빌어먹을, 인간!” 하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예주는 움찔하고 겁을 먹는 제 몸과 자신의 무모한 행동을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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