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74)화 (75/319)

“그, 그런데! 그, 그런데 주인님이 누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여!”

“……응?”

“주, 주인님이 누나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러냐구여!”

벼랑 끝에 몰린 조롱이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이 그녀의 머릿속은 자동으로 간밤의 일을 회상했다. 

말 안 듣는 어린애 버릇 들이는 것처럼 제 무릎 위에 이예주를 자빠뜨려 놓고 손으로 그녀의 볼기짝을 짝짝 내리쳤다. 

그리고 또…… 상이랍시고 뽀뽀를…… 아니, 아니, 상이랍시고 키, 키스를…… 무, 물컹한 것이 입속으로 한가득 들어와서 혀를 막……!

“……누나. 아, 누나!”

“응? 응?”

“뭔 생각하는데 얼굴이 시뻘게여. 그래서 주인님이 누나한테 어떤 짓을 했냐구여.”

“…….”

이예주는 조롱이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너 같은 어린놈은 상상도 못할 짓이라고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 또한 상상도 못했던 짓이었기에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다시 일렁이는 모닥불로 시선을 옮긴 그녀의 귀가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짓을 했냐니까여?”

“…….”

“왜 대답이 없어여!”

다른 건 귀신같으면서 꼭 이럴 때만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조롱이가 다시 그녀를 채근했다. 

이예주가 충혈된 귓불을 매만지며 마지못해 답했다.

“이, 있어. 그런 게.”

“예? 있긴 뭐가 있어여? 말하기 좀 그러면 주인님한테 물어볼까여?”

“아, 몰라! 그런 게 있으니까 알려 들지……!”

미치고 펄쩍 뛸 소리를 빽빽 해 대는 조롱이 때문에 당황한 이예주가 버럭 괴성을 지르려던 그때였다. 

그녀와 한 발자국 떨어져 앉아 있던 조롱이가 눈 깜짝할 새에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예주의 동공이 찢어져라 확장됐다.

“우, 우웁! 우웁!”

놀란 그녀에게 조롱이가 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입 다물 것을 종용했다.

“쉿. 누나, 누가 있어여.”

“으읍? 우, 우웁!”

“아, 조용여! 조용.”

이 사막 한복판에 대체 누가? 기껏 사막을 건넜더니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의 일행 같은 무리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망할 사막을 찾느냐 이 말이다. 

설마, 혹시, 그 팔다리가 몇천 개씩 달려 있는 괴물? 거대한 3층짜리 괴물을 떠올리던 이예주의 얼굴이 일순 퍼렇게 질렸다. 

그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거대 괴물을 만나 죽다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가만있어도 절로 몸이 덜덜 떨리는 그녀였다. 조롱이를 바라보는 이예주의 떨리는 두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때, 그녀의 뒤편에서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왔다. 조롱이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주, 주인님!”

“푸하! 뭐야? 뭐야?”

어느덧 바위를 돌아 튀어나온 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드디어 조롱이에게 틀어 막힌 입이 풀린 이예주가 겁에 질린 얼굴로 빠르게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확인했다. 

작은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중앙부터 그들이 있는 곳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바위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모닥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모래 너머는 온통 시꺼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쪽 대륙에서부터 계속 뒤쫓던 놈들이군.”

“계속여? 중간에 사라지기에 그냥 지나가는 인간들인 줄 알았는데…….”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조롱이와 람이 이예주만 빼놓고 그들만 아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불안감이 한층 더 증폭했다.

“뭔데? 뭔데?”

그녀가 부산스럽게 질문했으나 그녀의 두려움을 덜어 주는 이는 없었다. 

양팔로 제 몸을 꽉 끌어안고 앉아 있는 이예주에게 시뻘건 두 개의 레이저가 고정되었다.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정되지 않는 그였지만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뻘건 눈동자가 다른 때보다 더 이글이글 들끓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제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어 지레 먼저 말문을 텄다.

“왜, 왜 그렇게 봐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설마 조롱이 좀 골려 주었다고 또 제게 지능 낮은 인간이니 뭐니 폭언을 퍼부을까 봐 더럭 겁이 났다. 

이예주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음을 알리기 위해 정신없이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런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던 남자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너.”

“예?!”

그녀가 어깨를 흠칫 떨며 비명처럼 대꾸했다.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진짜요!”

“다리족처럼 단시간 내에 빠르게 도망칠 수 있다고 했나.”

람의 영문 모를 소리에 이예주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그러자 남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질문의 논지를 제시해 주었다. 

“네 능력.”

“느, 능력요?”

“그래. 도망치는 것 말고 더 숨기고 있는 건 없겠지.”

“아…….”

남자의 시뻘건 눈이 이예주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가운 시선에 그녀가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람에게 미래를 건너는 개똥 같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도중, 자신의 능력을 하찮은 줄행랑으로 일단락시킨 남자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지,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입이 바짝바짝 마르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이예주의 등을 타고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수천 가지 생각으로 갈등하는 그녀에게 람이 재촉했다.

“시간 없다. 대답.”

“어, 없어요! 없어요!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이예주가 서둘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더듬거리는 그녀의 대답에 남자의 눈이 미심쩍다는 듯 가느다래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자신이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다른 능력이 없다고 대답을 해 버렸다. 

특별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본능처럼 거짓말을 해 버렸다. 

어색함이 다 느껴질 만큼 크게 외친 대답에 남자가 혹시 거짓말임을 눈치챌까 싶어 이예주가 속으로 벌벌 떨었다. 

여전히 가느다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물었다.

“확실한 거겠지.”

“예? 예. 그, 그, 그럼요. 확실해요!”

확실하고말고요! 

몇 번을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가느다랬던 눈이 미심쩍음에서 어느덧 ‘그럼 그렇지.’라는 하찮음으로 뒤바뀌었다. 

역시나 그녀에게 도망침 이외의 능력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람을 속여 먹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잠시. 남자의 적나라한 눈빛 변화에 이예주는 왠지 기분이 좀 그랬다. 

너무나도 쉽게 속아 기뻐해야 하는데 왜 자꾸 이가 악물릴까? 

저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제 감정 변화에 그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람이 조롱이에게 짧게 명령했다.

“바퀴벌레와 함께 인간 옆에 붙어 있도록.”

“넵, 주인님!”

황조롱이가 얄미우리만치 충성스럽게 대답했다. 

다시 바위 뒤로 돌아가려던 람이 문득 멈춰 서더니 새빨간 눈으로 이예주를 쏘아보았다.

“너.”

“예?! 또 왜, 왜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불가피하게 능력을 사용하게 될 시엔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만 이동하도록.”

“…….”

“만약 저번 숲에서처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망쳤다간…….”

람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이예주는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의 눈에 함축된 살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바위를 돌아 다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욕설을 참느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답답해 환장할 소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다. 

능력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제 맘대로 도망칠 수 있었으면 진작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무렵 조롱이가 이예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여. 혼자 있다가 사고 치지 말구여.”

“……이젠 하다하다 새마저 나를 짐짝 취급하는구나…….”

“뭐라구여?”

이예주의 혼잣말에 조롱이가 되물었지만 그녀는 슬슬 시동을 거는 두통에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 모닥불 너머의 어둠 속에서 사사삭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벌레가 나타났다.

“아, 꿀잠 자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야. 짜증 나는 인간 놈들.”

어느새 다가온 거대 바퀴벌레가 갈고리가 달린 앞발로 애먼 모레를 푹푹 쑤시며 분풀이를 해 댔다. 

이예주가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스리슬쩍 조롱이의 곁으로 다가가 찰싹 붙어 섰다. 

“물러서여, 누나.”

조롱이가 이예주를 제 등 뒤로 밀었다. 얼떨결에 밀려난 그녀가 ‘왜?’ 하고 되묻기도 전에, 그들의 가운데에 있던 모닥불이 갑자기 무섭게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위험한 모닥불 앞에 람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것 같았다.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불길에 닿은 듯 후끈했다. 

장작도 없이 저 혼자 타오르는 불길에 이예주가 입을 떡 벌렸다. 

화르륵, 불길이 잡아먹을 것처럼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소풍 가서 캠프파이어 할 때 본 불보다 몇십 배는 더 커다란 불이었다. 

“이, 이게…… 으악!”

이예주의 괴성은 그다음 벌어진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묻혀 버렸다. 

쾅! 콰과광!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갑자기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폭발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불길이 마치 운석 떨어지듯 지면 곳곳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 하나 없이 거무튀튀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번쩍이는 불길로 뒤덮였다. 

밤하늘에서 별똥별로 둔갑한 불똥이 떨어지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아롱아롱 춤을 추는 불덩이들이 퍽, 하고 거친 모래알을 튀기며 바닥에 처박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사막이 대낮처럼 순식간에 환해졌다.

땅에 박힌 불덩이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삭막한 사막을 밝혔다. 

이예주의 눈동자에도, 조롱이의 눈동자에도 번쩍거리며 떨어지는 불빛이 점점이 수놓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람. 

본인이 터뜨려 놓은 불덩이들이 바로 옆에 있는에도 뜨겁지도 않은지, 그의 커다란 뒷모습은 미동조차 없었다. 

“……대박.”

이예주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일렁이는 불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심장 부근이 혼자서 요동치는 것 같다가도 전기라도 통한 듯 찌릿찌릿 아파 왔다. 

으윽, 이예주가 작게 신음하며 제 가슴께를 붙잡았다.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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