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여. 주인님이 왜 누나한테 그런 호의를 베푸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그렇게 주인님의 힘에 의지하지는 말라구여, 누나. 주인님은 인간을 증오하시니까여.”
인간을 증오한다.
조롱이의 마지막 말이 뼈아프게 와 닿았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그런데 이예주는 왜인지 모르게 머릿속이 일순 멍해졌다.
사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조롱이의 방에 난입한 것은 람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제 제가 벌였던 추태가 너무 적나라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 외간 남자와 입술을 마주 대고 혀, 혀, 혀를 막!
그래 놓고 우리 썸 타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넌 그냥 어장 관리녀들 중 하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자와 이런 긴밀하고도 농밀한 스킨십을 주고받은 게 머리털 나고 처음인 그녀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그런 말을 듣고도 아침에 일어나니까 가슴이 설렜다.
자꾸만 지난밤이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녀가 잠든 틈을 타 바람처럼 사라진 빨간 미친놈이 못내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금방이라도 문을 벌컥 열고 그가 득달같이 달려 들어올까 봐 불안증 환자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피신해 온 곳이 그나마 만만한 조롱이 방이었다.
―주인님은 인간을 증오하시니까여.
그리고 이 한마디에 이예주는 요란했던 백일몽에서 깨어난 듯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그렇다. 람은 인간을 증오하고, 자신은 인간이었다.
그가 얼마나 인간을 증오하는지는 그의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조롱이, 포니, 하다못해 그냥 지나치는 식물에게도 다정한 검은색을 띠던 그의 동공이 유독 이예주와 다른 인간들을 볼 때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 신기하고도 섬뜩한 변화를 계속해서 마주하며 그녀는 자연히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증오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걸.
얼마나 인간을 싫어하면 그렇게 눈동자 색까지 시뻘겋게 물들 수 있는 걸까.
얼마나 싫어하면. 얼마나.
이예주는 흡사 나라라도 잃은 사람과 같은 얼굴로 애써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싫어하지. 싫어하고말고…… 칫, 누군 좋대? 나도 어장관리거든.”
“예? 뭐라구여?”
속삭임같이 작은 말이 조롱이의 귀에까진 미치지 못했는지 그가 되물었다.
그저 되물은 것일 뿐인데 황조롱이는 이예주의 벼락같은 고함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안 뺏어 간다고! 너나 네 주인이랑 평생 물고 빨고 잘 먹고 잘 살아!”
“그냥 말하면 되지, 왜 갑자기 소리는 질러여!”
“몰라! 나 잠깐 챙길 거 있어서 온 거야! 그것만 챙기고 나갈 테니 신경 꺼!”
그 말을 끝으로 이예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조롱이가 뜬금없이 화를 내는 그녀를 끔벅끔벅 바라보았다.
“엥? 뭘 챙기는데여?”
“생리대.”
짧게 대꾸한 그녀가 방 한편의 화장실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놀렸다.
“근데 여기 여자들은 시간을 멈추네, 어쩌네 그러더니 진짜 생리를 안 하나 봐. 생리대가 화장실에 몇 개씩 있는데 막 먼지가 쌓여 있는 거 있지. 아! 여기도 있네? 혹시 모르니까 다 챙겨 가야겠다.”
이예주가 화장실 선반에서 쉽게 일회용 생리대를 찾아 꺼내 들었다.
다시 방으로 나온 그녀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주절거렸다.
“하여간에 이상한 곳이야. 별 사람을 다 만나 보네. 생체 시간이 멈춰서 난자가 배출이 안 된다느니…… 참, 넌 생리대 모르려나? 새들도 생리해? 알 낳으니까 안 하려나. 하긴 넌 어차피 수컷이니까…… 야, 근데 넌 짝짓기는…….”
“그만!”
문득 들려오는 조롱이의 경악 서린 고함에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평소보다 붉게 상기된 얼굴의 소년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소리 좀 함부로 하지 마세여! 저도 어엿한 성인이거든여! 알 거 다, 다 아는 나이라구여.”
강조하면서도 조롱이가 못내 말을 버벅거렸다. 연애 한 번 못해 본 숫총각처럼 구는 조롱이의 반응에 이예주가 설핏 웃었다.
그 모습이 흡사 올챙이 적 기억 못하는 개구리 같았다.
그러나 이미 람과 할 것 다 해 본 그녀는 전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되레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아하, 그러시겠지.”
“씨이, 정말 누나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나 그만 간다. 넌 더 자든가.”
이예주는 ‘짝짓기는 아름다운 행위야.’라고 대꾸해 주려다가 다시 떽떽거리며 열변을 토해 댈 조롱이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양손 가득 생리대를 챙기며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뒤에서 조롱이가 불평을 터뜨렸다.
“다 깨워 놓고 잠은 무슨 잠이여! 그리고 누나 원래 옷, 누나 방 침대 옆 서랍에 넣어 놨으니까 옷이나 빨리 갈아입어여! 주인님이 뭐라 안 하세여?”
조롱이가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걸레짝같이 몸에 걸쳐 있는 천 조각을 지적했다.
그나마 허리 아래 치마 부분은 쓸려서 작게 찢기고 더러워진 것이 전부였지만, 허리 위 상체는 붕대가 없었다면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지 못한 조롱이의 배려에 이예주의 불퉁한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헐, 조롱아…….”
그녀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자 조롱이는 의기양양해했다.
“안 그래도 이 천 쪼가리 때문에 어제 네 주인 놈이 나를……!”
“잉? 주인님이 뭐여?”
감동하다 못해 하마터면 간밤의 수치스러운 일까지 제 입으로 나불댈 뻔한 이예주가 재빨리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큼큼. 아, 아니야. 어쨌든 고맙다. 넌 어서 더 자, 어서.”
“누나 때문에 잠 다 깼다니까여!”
다시 반항하는 조롱이를 관대한 마음으로 무시하며 이예주는 서둘러 조롱이의 방문을 열었다.
드디어 아침 댓바람부터 황조롱이를 괴롭히던 인간 여자가 방을 나선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 황조롱이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안도할 적이었다.
이예주가 불쑥 뒤로 돌아 간신히 다잡았던 그의 가슴을 허물어뜨렸다.
“근데 조롱아, 너 누이 있어? 자면서 계속 누이 찾더라. 누이면 동생? 아니면…….”
“…….”
“……누나려나?”
* * *
“왜 이렇게 늦게 나와여!”
조금 너덜너덜하지만 깔끔하게 세탁되어 있는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이예주가 나오자, 기다림에 지친 조롱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흘끗 돌아보니 람 또한 한쪽에 서서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자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후드티의 소매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좀 자르느라. 다 찢어져서 너무 지저분해 보이길래…….”
이예주의 후드티는 어느덧 시원하게 잘려 반팔이 되어 있었다.
드러난 허연 살결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름 비싼 돈 주고 산 브랜드 옷인데, 이 빌어먹을 곳에 와서 완전히 걸레 쪼가리가 되어 버렸다.
가위로 얼기설기 자른 소매의 단면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이예주가 고개를 들어 람을 바라보았다.
“근데 우리 이젠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조롱이도 마침 궁금했던 차인 듯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람은 고민조차 하지 않은 태도로 확고하게 대답했다.
“다시 북쪽 대륙으로 간다.”
“북쪽이여, 주인님?”
조롱이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예주 또한 되묻고 싶었으나 머릿속으로 북쪽이 어디인지 생각하느라 겉으로는 입을 다물고 수긍하는 체를 하였다.
3019년의 지구는 여러 대륙이 합쳐진 상태이기 때문에 ‘북쪽이면 북한이려니.’ 하고 태평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예전에 조롱이가 동서남북으로 대륙을 나눠 알려 줬던 것 같은데. 북쪽이라 하면은…….
“설마. 설마 그 숲?!”
드디어 북쪽 대륙이 동물의 숲이라는 것을 기억한 이예주가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그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건지 남자는 시종일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저기요. 우리 그 숲으로 다시 간다는 거예요? 눈알 파먹는 까마귀가 살고 내 휴대폰 훔쳐 간 그 망할 뱀이 사는 그 미친 숲이요?!”
“그래.”
그녀의 질문에 빨간 눈의 남자가 드디어 대답했다.
이예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아, 머리야…… 저기요, 저는 못 가요.”
“…….”
“저기요. 제 말 듣고 있어요? 기껏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더니 다시 거기로 간다고요? 먹을 것도 잘 곳도 심지어 변 볼 곳도 없는 그곳에! 게다가 다시 거기로 가려면 사막을 또 건너야 하잖아!”
또다시 그 끔찍한 사막을 건널 생각에 이예주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저 절대 안 가요, 절대! 우리 그럼 이쯤에서 찢어…….”
“왔군.”
창백해진 얼굴의 그녀가 람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자신은 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지만 그는 이예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기 할 말만 해 대었다.
왔어요? 누가요? 그녀가 그의 말에 휩쓸려 주위를 둘러볼 즈음이었다.
쿵! 땅에 거대한 해머를 내리친 것처럼 묵직한 소리가 그들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예주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나는 껍질을 가진 거대한 생명체가 막 착륙을 마치고 그 위용을 드러냈다.
“주인!”
몸뚱이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에게 달려 있는 기다랗고 가느다란 더듬이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스스스스 흔들렸다.
저의 늠름한 날개가 자랑스럽다는 듯 부르르 떠는 그것을 람이 소개했다.
“빠르게 뒤쫓아야 하니 이것을 타고 이동한다.”
창백함을 떠나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변색된 이예주가 숨을 멈췄다.
앞에 가만두고 보는 것도 고역이건만, 심지어 저것을 타고 이동하잔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가 아파 왔다.
그와 동시에 원룸에 혼자 살 적, 저것의 친구들이 나타나 침대 아래로 발도 뻗지 못했던 우울한 나날들이 떠올랐다.
결국 전화로 살려 달라고 난리를 친 탓에 놀라 달려 온 주인아저씨가 돌돌 만 신문지로 그것을 내리쳐 죽인 후에야 이예주는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었다.
그러한데 이 1000년 후의 세상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런 것을 이동 수단으로 타고 다닌단다.
이예주가 정색을 하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우린 정말 여기까지인가 봐요.”
그녀의 말에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남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휙 올린 채 그녀를 시뻘건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에 맞춰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대왕 벌레가 이예주를 향해 털이 숭숭 나 있는 앞다리를 스스슥 비벼 댔다.
우욱, 그녀가 터져 나오는 헛구역질을 꾹 눌러 참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진심을 다해 남자와 그의 친구 대왕 바퀴벌레에게 목례를 한 이예주는 누가 잡을세라 곧바로 뒤를 돌아 그들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저 대왕 바퀴벌레가 있는 곳에서 속히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이 음침한 도시에 있는 모든 바퀴벌레들이 다 저만하면 어떡하지? 아니, 저런 것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끔찍한 상상에 그녀는 정신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뭐야, 왜 이래? 뭐야. 그녀가 이상한 기분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목 뒤에 달린 후드가 길쭉하게 늘어나 있었고, 그것을 굳게 움켜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시뻘건 눈동자가 두 눈에 레이저를 켜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읍, 가긴 어딜 간다고.”
“이, 이거 놔요. 난 그거 절대…….”
“네게 선택권 따윈 없다.
이예주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몸부림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몸은 벗어나기는커녕 점점 그에게 끌려갔다.
하도 잡아당겨 다 늘어난 후드가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예주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악! 싫어! 난 절대 안 타요! 난 대, 대왕 바퀴, 우욱……!”
“말 좀 들어 먹으면 좋겠군. 어제처럼 맞고 싶은 건가.”
마치 폭군처럼 무덤덤한 말투였다.
그러나 실로 어마어마한 소리에 이예주가 반사적으로 멈칫한 사이, 그녀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허공에 붕 들렸다.
람의 어깨에 짐짝처럼 둘러진 그녀는 그토록 끔찍해하던 대왕 바퀴에게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녀가 버둥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아악! 이거 놔요! 놔! 난 싫어! 싫어!”
그러나 그녀의 반항이 람에게는 솜털보다 약하게 느껴지는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조롱아! 조롱아, 살려 줘! 조롱아!”
“저는 제 날개로 날아갈 거라서여.”
이예주의 절망적인 외침에 조롱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신했다.
무겁지도 않은지 람은 그녀를 둘러멘 채 거대한 바퀴벌레의 다리를 등산하듯 밟고 잘도 올라탔다.
어딜 봐도 온통 반질반질한 까만색 껍질 위에 올라타자, 그토록 람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이예주가 이번에는 그의 가슴팍에 찰떡처럼 달라붙었다.
“이상한 냄새나는 것 같아요. 우욱, 토할 것 같…….”
“더듬이 옆에 앉고 싶지 않으면 참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