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70)화 (71/319)

“헉!”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번쩍 열리면서 그 안의 황금안이 드러났다. 

갈색 머리 소년은 재빨리 눈을 굴리며 이곳이 아직도 역겨운 냄새와 신인류들의 신음 소리가 가득한 감옥 안인지 확인했다.

움직임이 굼뜨거나 약간이라도 아픔을 호소하는 신인류들에게 가차 없이 채찍과 몽둥이를 내리치며 욕설을 지껄이던 악귀 같은 인간들의 얼굴. 

금방이라도 감옥지기가 튀어나와 자신을 걷어찰까 두려워 소년의 황금색 눈동자가 샅샅이 방 안을 훑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낯선 침대 휘장과 고풍스러운 방 천장에 이어, 죽어 버린 도시를 담고 있는 창가에 닿았다. 

마치 빛바랜 사진을 가져다가 붙여 놓은 것처럼 회색 도시의 고층 건물들이 우중충하게 늘어서 있는 창문 밖의 광경.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축축 처지게 만드는 도시의 모습이었으나 소년은 그 모습을 확인하곤 되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의 긴장이 탁 풀렸다.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가던 그 끔찍한 그 감옥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는 현실을 자각하며 완전하게 마음을 놓은 순간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갈색 머리털이 하늘 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소년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건.

“깼어?”

“아아악!”

펑!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침대에서 벗어난 갈색 머리 소년이 폭발하듯 자욱한 연기를 내뱉으며 사라졌다. 

코를 간질이는 깃털들이 침대 위로 풀럭풀럭 떨어졌다. 

이예주가 매캐한 연기에 콜록콜록 기침을 연발하며 버럭 성질을 냈다.

“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귀청 떨어질 뻔했네!”

“그건 내가 할 소리예여! 남의 침대에 몰래 들어와서 뭐 하고 있는 거예여!”

어느덧 허공에서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황조롱이가 인간 여자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동물의 모습인데도 황조롱이의 인상 쓴 얼굴이 선연히 보여 이예주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이, 일어나니까 방 안에 아무도 없잖아! 혼자 있기 무섭단 말이야. 등짝도 아프고…… 람은 없고…….”

황조롱이는 대답 대신 ‘펑!’ 소리를 내며 변신했다. 

한차례 연기가 지나가고 이예주의 앞에 다시금 귀여운 갈색 머리 소년이 등장했다. 

“꺅!” 

이예주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자 황조롱이가 씩씩대며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재빨리 주워 입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마구 쳐들어와여? 안 그래도 인간 놈들이나 쓰는 수면 향 때문에 머리 아파 죽을 뻔했구먼여!”

이예주의 무섭다는 변명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지 조롱이는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이었다. 

물론 이예주는 그의 기분 따위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부득부득 내지르는 조롱이의 노성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서운 걸 어떡해? 언제 어디서 그 미친 족장 놈들이 튀어나올지 모르잖아! 참, 그 족장 놈!” 

족장 이야기를 꺼내던 그녀가 갑자기 도끼눈을 떴다.

“너, 너! 그 족장 새끼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 미친놈이, 이따만 한 채찍으로 내 등짝을 막, 막……!”

“됐고여.”

양손을 크게 벌려 거대한 채찍의 크기를 보여 주던 이예주의 말을 조롱이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단칼에 잘랐다. 

수면 향을 잔뜩 마셨다더니 평소엔 보기 힘든 카리스마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어젯밤에 대체 왜 마음대로 돌아다닌 거예여?”

“어, 어? 어젯밤?”

이예주가 모르는 척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나 이미 꽤 많은 시간 동안 인간 여자를 겪어 온 황조롱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지 말구여! 아, 진짜! 갈 거면 나라도 깨우든가여! 누나 때문에 수면 향만 잔뜩 뒤집어쓰고!”

“…….”

“위험하니까 마음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여! 누나 이럴까 봐 미리 말해 둔 건데, 씨잉…… 잘못은 누나가 다 했는데 주인님께 나만 혼났잖아여!”

조롱이가 울상을 하고 이예주를 책망했다. 

화끈거리는 제 등짝만 챙기느라 조롱이가 혼났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이예주가 놀란 얼굴로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헉. 혼났어?”

“누나가 기절해서 치료하는 동안 주인님이 얼마나 무서웠는데여!”

“그니까.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혼나?”

그녀의 얼굴은 자신 때문에 조롱이가 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답답한 소리에 속 터지고 머리 터지는 것은 조롱이뿐이었다.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조롱이가 버럭 외쳤다.

“그럼 안 혼나여?! 누나 사고 못 치게 잘 감시하라고 그러셨는데, 하루도 안 지나서 누나가 사고를 뻥뻥 쳐 댔으니 안 혼나냐고여! 이 사고뭉치 인간아!”

“뭐? 사고뭉치 인간? 이게 죽을래? 내가 무슨 사고를…… 어, 어억!”

사고뭉치 인간이란 소리에 이예주가 단박에 두 주먹을 꽉 쥐고 조롱이에게 달려드려다가, 등을 타고 찌르르 흐르는 통증에 침대로 무너졌다. 

그러고는 팔을 필사적으로 뻗어 등을 부여잡고 잠시 신음했다.

“아, 아아……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이예주 죽어. 그 미친놈 때문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흐허헝.”

“괘, 괜찮아여?”

이예주가 시트를 끌어안으며 침대를 뒹굴었다. 

그녀의 곡소리에 조롱이가 짐짓 노성을 내뱉는 것을 멈췄다. 

“급한 대로 남은 약초랑 인간들이 쓰는 약 섞어서 상처에 발라 놨는데, 마, 많이 아파여? 누나. 예, 예주 누나!”

“아아, 어으으…….”

이제는 완전히 걱정으로 탈바꿈한 얼굴의 조롱이는 시트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조롱이가 조심스레 이예주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무렵이었다.

“우어억!”

“아악!”

이예주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품에 가득 쥐고 있던 새하얀 시트로 조롱이를 와락 덮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조롱이는 이예주에게 밀쳐져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 꼴사납게 처박혔다.

“으악! 뭐, 뭐 하는 거예여!”

“사고뭉치 인간이라는 거 취소해! 안 그래도 나 누구한테 어장관리 당해서 기분 완전 꿀꿀하거든? 이씨, 이제 너까지 날 무시해?”

“으헉! 놔여! 놔주떼엽!”

온몸에 말려드는 시트 때문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조롱이는 계속해서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에 맞춰 이예주도 필사적으로 온몸에 힘을 줘 조롱이를 압사시킬 듯 내리눌렀다. 

“으억! 숨 막혀! 황조롱이 죽어여! 무거워여! 무겁다구여!”

“얼른 취소해!”

“으으헉, 취소! 취소!”

이예주는 조롱이가 취소를 외치고도 한참이나 발버둥 쳐 온몸의 진이 모조리 빠져나갔을 후에야 그의 위에서 굴러 내려왔다. 

그녀는 태평하게 남의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시트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조롱이가 산발이 된 갈색 머리를 매만지며 이예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아, 진짜!”

“진짜 뭐.”

인간 여자가 거만하게 시선을 맞받아치자 불쌍한 황조롱이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진짜 누나 같은 인간은…… 세상에 둘도 없을 인간이에여.”

“그건 그래.”

짓씹듯 내뱉은 말에 허망할 정도로 쉽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 때문에 소년의 분노는 결국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괴물 같은 인간 여자에게 시달렸더니, 아직 하루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끝이 나 버린 것처럼 심신이 다 피곤했다. 

조롱이는 결국 이예주의 옆에 힘없이 드러눕는 것을 택했다.

“상처 아프진 않아여? 다 나은 거 맞아여? 벌써 나을 리가 없는데.”

조롱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이상했다. 

이예주의 상흔은 꽤 심각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찢어져 길쭉하게 파인 상처 사이로 말려 들어간 탓에, 그 옷 조각을 일일이 꺼내는 데도 한참 걸렸다. 

기절한 와중에도 아프다고 성질을 어찌나 내던지, 하마터면 이예주가 내지른 발차기에 명치를 가격당할 뻔한 조롱이는 그녀가 정말로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뇌하며 치료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를 많이 흘려 새하얗게 질린 얼굴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 죽어 가던 얼굴로 조롱이의 동정을 자아내던 인간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다니. 

그 어떤 인간도 이토록 괴물 같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괴력을 자랑하며 용맹한 신인류를 짓누르는 일은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밤새 람이 치료해 준 것 같아. 자고 일어나니까 상처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던데?”

“주, 주인님이여?”

“응. 왜 그 사막 여우 있잖아, 포니. 걔 치료해 줄 때 그것처럼 손에서 검은빛을 막막 뿜어 대 준 게 아닐까? 완전히 힐러야, 힐러.”

이예주가 “신기해 죽겠다, 그치?” 하고 덧붙이며 쫑알댔다. 주인이 치료해 준 것이라면 인간 여자의 기분까지 최상의 상태로 끌어 올렸을 테니, 지금 그녀가 멀쩡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조롱이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야, 진짜 그런 능력 있으면 완전 대박일 텐데. 아픈 사람들 다 치료해 주면 돈도 왕창 벌 거 아니야? 그럼 또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아니, 아니지. 요즘은 땅보단 빌딩 부자가 대세니까 역세권에 빌라를 잔뜩 사서…… 아! 모르겠다. 부럽다!”

“…….”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아니 람은 못하는 게 뭐야? 지진도 일으켜 천둥도 내리쳐. 또 뭐야, 용암도 일으킨다 그랬나? 진짜 뭐야? 신이야 뭐야, 진짜. 완전 사기 캐릭터야. 안 그래, 조롱아?”

“…….”

“조롱아?”

이예주는 그제야 뭔 말만 해도 떽떽대던 소년이 매우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동자만 돌려 소년을 슬며시 확인하려던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황금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쳤다. 

민망할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조롱이의 모습에 이예주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

“조롱아, 말도 안 하고 왜…….”

“누나는…….”

대답 없이 침묵하던 황조롱이 소년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이예주가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가슴이 따끔거릴 때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누나는 바보예여.”

“뭐?”

어떤 말을 할지 한참을 기다려 주었더니 기껏 나온 것이 이예주에 대한 인격 모독이었다. 

그녀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수면 향을 많이 맡았다더니, 이게 정말 미쳤……!”

“큰 에너지는 그보다 작은 에너지들을 빨아들여여.”

조롱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이예주에게 하는 이야기라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한숨과도 같은 말이 그녀의 귀에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저를 무시하는 조롱이에게 불만을 토해 내려던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말이었다.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 본 듯한. 

어디서 들어 본 말이지? 

그녀가 골똘히 생각해 보려 할 때 소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누나는 주인님한테서 도망가고 싶다면서여? 자꾸 그렇게 주인님의 힘을 몸에 받다가 누나가 가지고 있는 힘을 주인님이 집어삼키면 어떡하려고 그래여?”

“힘을 집어삼켜? 왜?”

“그거야 누나 몸에 자꾸 주인님의 힘이 쌓이면…….”

대꾸를 하던 조롱이가 말을 멈추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람 면전에 대고 한숨이라니, 이예주는 조금 황당해졌다.

“우리 신인류처럼 주인님께 종속되어 봤자 누나한테는 좋을 것 없어여. 주인님께선 시간족이 아닌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호의를 베풀기는 하시지만, 누나한테처럼 이렇게 관대하게 대하신 적은 처음이에여.”

“호의? 또 관대라니? 하하, 네 주인 얘기 하는 거야? 재밌다.”

이예주가 전혀 재밌지 않은 얼굴로 기계처럼 내뱉었다.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을 용암 구덩이 속에 집어 처넣고, 무자비하게 벼락을 내리치던 남자가 관대하다니. 

두 번 관대했다가는 이미 자신은 요단강을 건너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발끈한 황조롱이가 바로 반박했다.

“주인님이 인간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다니시는 건 아니에여! 그래도 힘이 약하고 어린 인간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 자비로운 분이시라구여!”

“내가 아는 자비의 뜻과 이곳의 자비의 뜻은 다른가 보구나.”

허허허, 어색하게 웃으며 이예주가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덧붙여지는 조롱이의 말에 그녀는 웃는 채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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