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65)화 (65/319)

미쳤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그런 미친 짓을…….

―이런 요망한 짓은 어디서 배운 거지.

귓가에 소름 끼치게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요동쳤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과거의 편린에 이예주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아니야! 아니야! 미쳤어. 미쳤어, 이예주…… 너 돌았니? 어떻게…… 어떻게…….”

필사적으로 남자의 말을 틀어막고 있던 이예주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머릿속을 점철하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다가 제 손을 잡는 그 손길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예주에게 입이 막힌 남자의 새빨간 눈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 휘어져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바닥까지 내던져졌다. 

남자가 입을 틀어막은 이예주의 손을 가볍게 떼어 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두 손은 남자의 커다란 손에 잡혀 힘없이 끌려 내려갔다. 

웃는 남자의 얼굴을 차마 대면할 수 없어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어마어마하게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대변하듯 이예주의 귓불이 빨갛고 탐스럽게 익었다. 

“……원래 이렇게 요망한 짓거리로 멀쩡한 이들을 홀리는 건가?”

남자가 이예주의 머리 위에서 가당치 않은 말들을 지껄여 댔다. 

그녀가 시뻘건 얼굴을 번뜩 쳐들었다.

“뭐요?”

“익숙해 보이는데.”

“이, 이……! 내가 그럴 남자가 어디 있어요! 난 이렇게 남자랑 손잡는 것도 처음인데!”

남자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몸서리친 이예주가 남자에게 잡힌 두 손을 거칠게 흔들며 외쳤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남자는 심히 만족스럽다는 듯 드물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웃었다.

“좋아. 계약 기간 동안 네 몸은 너 혼자의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따지기도 전에 남자가 살벌한 기세로 경고했다.

“앞으로 다른 놈들 앞에서 이런 요망한 짓을 하는 것을 들켰다간…….”

“…….”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해 주지.”

농담인 듯 농담 같지 않은 남자의 그 말이 실현될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예주가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몸서리를 쳤다.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남자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불쑥불쑥 불안함이 들었다.

일단 남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긴 좋은 일인데…… 

지진을 쩍쩍 일으키고 번개를 마구 내리치고 무식한 힘으로 괴물을 터뜨리는 이 미친놈의 편에 서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도 확실한데…… 

과연 이게 좋기만 한 일인가? 

그때 남자가 갑작스레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에도 한 번 생각했던 거지만, 사람이 물건도 아닐진대 마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번쩍번쩍 잘도 드는 괴기스러운 남자의 힘에 소름이 돋았다. 

이예주는 아기처럼 그의 품에 안긴 채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신이에요?”

“…….”

람은 그녀의 물음에 흘끗 한 번 내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이예주를 든 채로 람이 침대로 향했다. 

대답을 재촉하려던 그녀는 민망한 자세에 그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이윽고 람이 침대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도중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돌려 옆으로 눕게 했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누워야 하냐는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그가 가만히 그녀의 붕대를 눈짓했다. 

아, 등의 상처 때문이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배려에 이예주는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이 울컥 치솟는 것 같았다. 

그것은 치솟자마자 눈물샘을 자극했다. 

람이 그녀를 내려놓자마자 볼일 끝났다는 듯 휙 돌아서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이유도 없이 눈물을 쏟았을 것이 분명했다. 

방을 빠져나가려는 듯한 남자의 옷자락을 이예주가 황급히 붙잡았다. 

“가, 가려고요?”

“…….”

“흑, 여기 너무 무서운데…….”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내심 그가 남아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 무심하고도 눈치 없는 놈은 그래서 뭘 바라냐는 식으로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예주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 혼자 있으면 악몽 꿀 것 같아요.”

“…….”

“족장이, 족장이 막 쫓아온단 말이에요……!”

미동도 없는 남자에게 이예주가 애타는 얼굴로 애원했다. 정말이었다. 

이 스산하고 음침한 저택에 남자나 조롱이도 없이 저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족장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신의 등허리에 사정없이 허리띠를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람의 옷자락을 미약하게 두어 번 흔들었다. 

“후…….”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 보고 있던 남자가 결국 짧게 한숨을 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이예주는 냉큼 엉덩이를 움직여 옆으로 비켰다. 

람이 침대 헤드 보드에 느슨하게 상체를 기대앉았다. 이예주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모로 누워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받쳐 들었다.

정말 오랜만의 편안한 잠자리다. 

해가 지지 않는 불길한 저택이어서 사실 편안한 것도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 무적인 남자와 함께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이예주는 마른 섬유 냄새가 나는 배게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제 옆에 앉아 있는 람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정말 그녀가 자는 것만 보고 가려는 듯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 오뚝한 콧날에 붉디붉은 모양 좋은 입술, 날카로운 턱선. 완벽한 대칭의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인데 왜 이렇게 인간미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걸까. 

완전체에 가까운 외모에 비해 결여된 인성에 탄식하며 이예주가 다시 꿈지럭거리며 남자 쪽으로 몸을 붙였다.

“……자라.”

귀신같이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챈 남자가 눈을 감은 채 짧게 명령했다. 

가까이 바라만 보려고 했던 이예주가 지레 찔려 몸을 크게 펄떡였다. 

덕분에 람조차 다 알아챌 만큼 침대가 커다랗게 요동쳤다.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그녀가 잠시 숨을 죽였다가 내친김에 대놓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기로 했다. 

입을 다무니 뭇 여인네들이 가슴 부여잡고 통곡할 얼굴상이로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얼굴을 흐뭇하게 감상하던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문득 이런 남자와 잘도 쪽쪽 입을 맞춘 자신이 떠올랐다. 이예주의 얼굴이 눈 깜짝할 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미쳤지, 미쳤어. 이런 것에 홀리면 안 돼, 이예주! 

원래 악한 것들이 아름다운 법이다. 이 요염한 입술이 자신을 홀린다. 

안 돼, 안 돼. 

얼굴이 시뻘게졌다가 도리질을 쳤다가 홀로 난리를 해 대던 이예주는 그래도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남자와 키스를 했다. 

그 흔한 남자 친구조차 없이 정신없는 인생을 살아오던 제가. 

이것은 정말 역사에 길이길이 새기고 엄마에게 수천 번도 더 넘게 자랑할 만한 엄청난 일이다. 

“……근데, 저기요. 있잖아요.”

“…….”

이예주의 부름에 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조차 뜨지 않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저기, 우린 그럼 썸남 썸녀예요?”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꾸만 가슴 깊숙한 곳이 간질간질 거려서 팔로 마구마구 긁어 대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게 이예주는 한참 동안이나 간지럼을 참았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뻘건 눈동자가 번쩍 떠진 채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지?”

“예? 썸남 썸녀요? 아…… 그러니까요. 그게 뭐냐면, 어…… 애인인 듯 아닌 듯?”

“…….”

“그러니까요. 내가 이제 당신 감정도 찾아 줄 거고 이렇게 키, 키…… 키스도…… 키스도…… 으흑!”

결국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이예주가 다시금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몸부림을 쳐 대다가 찌르르한 등짝의 고통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불 속에서 찐만두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꺼낸 그녀는 람의 빨간 시선을 정확히 마주 보지 못한 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암튼! 우린 그, 그 입도 맞췄잖아요! 나 누구랑 이런 거 완전 처음이에요. 어머, 어떡해.”

스스로 모태 솔로임을 고백하던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엄마가 모솔인 걸 알리면 남자들이 얕본다고 했는데. 

게다가 이예주는 그냥 팔자도 아니고 남자를 멀리해야 할 사주팔자였다! 

그녀가 금세 울상이 된 얼굴로 남자를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람은 전혀 이예주를 얕보거나 비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대신 그녀를 바라보는 시뻘건 눈동자가 어이없음과 황당함, 이 두 가지로 완전히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예주는 그 의미 모를 눈빛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 멍청함에 관해서는 대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군.”

“……네?”

“우린 계약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자가 이예주와의 관계를 ‘썸남 썸녀’에서 ‘계약관계’로 여지없이 뒤바꿔 버렸다. 

그녀는 멍청한 얼굴로 남자의 말을 곱씹다가 그것이 세 번을 넘었을 때 완전히 그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너와 내 관계는 계약관계이니 혼자 착각하고 헛물켜지 말라……? 

이예주의 눈에서 번쩍 불똥이 튀었다. 등짝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왜요!”

“뭐.”

“난 당신이 다 처음이란 말이에요! 포옹도! 뽀뽀도! 키, 키스도! 이런 게 어디 있어!”

“…….”

“그럴 거면 뽀뽀는 왜 했어요! 키스도! 아악! 와, 나 진짜. 완전 어이없네? 어장 관리 하세요?”

“…….”

“왜 말이 없어요? 어장 관리냐고요!”

이예주가 흉포한 기색으로 대답을 강요했다. 

첫 키스를 빼앗긴 충격으로 눈이 뒤집어진 그녀의 형형한 모습에 람이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우린 무슨 사인데!”

“자.”

“무슨 사인데요! 대답해요. 무슨 사이냐고!”

이미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여자는 자꾸만 대답을 재촉해 람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한 번 더 일러 주자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괴성을 지르며 발광할 것 같아 람은 결국 제가 한 번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빨리 말해요. 우린 무슨……!”

“스읍, 안 잘 거면 그만 나간다.”

나간다는 말에 이예주의 입술이 거짓말처럼 뚝 닫혔다. 

그녀가 굉장히 억울한 얼굴로 람을 매섭게 쏘아보았으나 그의 새빨간 눈동자는 다시 닫힌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잠시 씩씩대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이예주는 결국 “씨이!”로 욕을 삼키며 할 수 있는 한 람의 반대쪽으로 힘차게 돌아누우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것도 끝에는 등짝에 충격을 줄까 봐 반사적인 조심스러움이 묻어나 완벽한 패악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남자를 이예주는 볼 수 없었다.

한참 분노에 가득 차 씩씩댈 줄 알았던 인간 여자는 의외로 얼마 못 가 바로 곯아떨어졌다. 

축적돼 있던 피로가 안도로 인해 한꺼번에 덮친 탓이었다. 

깊은 잠에 빠진 내내 여자의 몸에서 신열이 올랐다. 

악몽을 꾸는 건지 땀을 뻘뻘 흘리며 내내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했다. 

여자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검은 빛이 꾸물꾸물 새어 나오는 손으로 쓸어 주며 람은 계속해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멈춘 땅에도 아침이 밝을 무렵에야 인간 여자의 열이 내렸다. 

아직 미열이 가라앉지 않아 얕게 헐떡이던 그녀가 불현듯 람의 품에 파고들었다.

“엄마…….”

어미를 찾으며 자꾸만 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여자를 상처에 유의해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람이 뽀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문득 눈에서 뜨거운 불을 내뿜으며 흉흉한 기세로 소리 지르던 인간 여자를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푸흣’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당신이 다 처음이란 말이에요! 포옹도! 뽀뽀도! 키, 키스도!

“네 처음이라…….”

이예주의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커다란 손이 땀에 젖어 그녀의 얼굴에 딱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떼어 주었다. 

곧 하얀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람은 이예주가 깨어 있을 때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들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쁘지 않군. 내가 처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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