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64)화 (64/319)

“알고 보니 나한테 반해서 처음부터 죽일 생각 없었던 것 아니에요? 그쵸, 그쵸?”

이예주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람을 이리저리 찔러 보았다. 

혼자 질문하고 답을 내리며 수긍하는 그 웃기지도 않는 발랄한 태도에 람은 기가 차 허, 조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비웃음에도 이예주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에이, 웃는 거 보니까 맞죠? 처음부터…….”

“돼먹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람이 붉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 보이며 그녀가 주절대던 헛소리들을 차갑게 끊어 내더니 이예주를 향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이리 와.”

제 방정맞음이 도가 지나쳤나 싶어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왜, 왜…… 왜요?”

“스읍, 제발 한 번 말할 때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군.”

“…….”

“이리 와.”

람이 다시 한 번 손을 까딱거리며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이예주의 심장이 긴장으로 거세게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헉, 너무 심했나? 왜 저래, 왜 저러는데. 

“내가 가기 전에 오는 게 좋을 텐데.”

“…….”

“이리 와.”

람이 이를 악물고 씹듯이 내뱉었다.

“당장.”

결국 이예주는 주춤주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잔뜩 목을 움츠린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을 옮겨 람의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최대한 보폭을 좁게 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남자가 우뚝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당도했다. 

람의 새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흉흉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범 앞에 선 하룻강아지처럼 언제라도 배를 까 보일 준비를 한 채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다, 다 왔는데요.”

“…….”

괜히 겁만 잔뜩 집어먹도록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예주로선 당최 이해하지 못할 명령을 행동으로 지령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제 허벅지 위를 손으로 두어 번 탁탁 치는 게 아닌가. 

이예주는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가 답답한 듯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엎드려.”

“……예, 예?!”

“꼭 두 번씩 말해야 알아먹나? 엎드리라고.”

남자가 다시 한 번 제 허벅지를 내리쳤다. 

이예주는 이 황당하고 경악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보고 개처럼 네놈의 허벅지에 엎드려라, 이 말이지? 이, 이, 이!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아찔해진 그녀는 제가 혹시라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진의를 확인했다.

“그, 그, 그…… 그러니까…… 다, 당신 무릎 위에 내 몸을 이렇게…….”

그녀가 엎드리는 포즈를 취하며 람을 바라보자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명료한 움직임에 이예주는 더욱 환장할 것 같은 심경을 느꼈다. 

“……이, 이렇게? 이렇게라고요?!”

“마지막이다.”

남자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차갑게 일갈했다.

“내 무릎 위에 네 몸뚱이를 엎어. 지금 당장.”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래야 하냐고! 이예주는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무뚝뚝하고 딱딱하기 짝이 없는 남자는 당장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시, 찢어 발겨 주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움직일 생각은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서서 벌벌 떨기만 하던 이예주는 남자의 시뻘건 눈에 점점 살기가 돌자 퍼드득 몸을 움직였다. 

주춤주춤, 그녀가 가만히 앉아 있는 람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의 사정권 안으로 간신히 들어갔을 때, 람이 벼락처럼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으아악!”

이예주가 괴성을 지르며 람의 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힘센 남자가 요령 좋게 그녀의 몸을 잡고 돌린 탓에 부딪히는 일 없이 람의 무릎에 안착했다. 

“어억! 왜, 왜 이래요! 왜 이래요!”

휙 반전된 시야 탓에 이예주가 기겁을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허벅지 위에서 벌떡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그것은 모두 희망 사항으로만 끝이 났다. 

남자의 돌덩이 같은 손이 꿈쩍도 하지 않고 목과 다리를 아래로 내리눌렀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그물에 잡힌 활어처럼 무의미한 펄떡임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의 허벅지 위에 빨래처럼 얹혀진 것도 모자라 더 미쳐 버릴 것 같은 타격이 이예주를 내려친 것은. 

짝―! 

그녀의 튼실한 엉덩이 위로 람의 손바닥이 가차 없이 벌을 내렸다.

“아악!”

엉덩이가 화끈하니 따가워졌다. 제 엉덩이를 때린 것이다. 

다 큰 처녀의 엉덩이를……!

눈앞에 새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이예주가 아픔보다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미, 미쳤어요―!”

“이건 감히 황조롱이를 통해 전언한 명령을 무시한 죄.”

미친 듯이 발악하는 그녀의 목을 여전히 꾹 눌러 고정한 남자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이 뒤집히는 것이 뭔지 통렬하게 느끼며 경악 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왜, 왜 이래요! 이, 이거 성희롱이야! 왜 다 큰 여자 엉덩이를 손으로……!”

짝―! 

그러나 듣기 싫다는 듯 다시 한 번 화끈한 통증이 엉덩이를 강타했다.

“이건 황조롱이를 따돌리고 도망침으로써 신인류를 능멸한 죄.”

“아악―! 미쳤어? 당신, 미쳤냐고요!”

짝―! 

“이건 이따위 천 쪼가리를 걸치고 멋대로 싸돌아다닌 죄다.”

“아악! 그만! 때릴 거면 딴 데 때려! 왜 엉덩이를 때리고 그래, 이 미친놈아!”

엉덩이가 따끔따끔했다. 

그렇게 세게 때린 것도 아니지만 남자에게 맞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예주는 정신이 나갔다. 

그녀는 눈이 돌아가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며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얼굴은 피가 쏠림과 동시에 수치심으로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경기 일으키는 사람처럼 펄떡거리는 그녀를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람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해요!”

“스읍, 몇 대 더 맞아야 정신 차리겠군 그래.”

몇 대 더 때린단 소리에 이예주의 몸이 퍼드득 경련했다.

“아악!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요! 다신 안 그럴게요! 다신! 그러니까 그만해액!”

이예주는 저택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크게 질렀는지 ‘푸흣’ 하는 남자의 웃음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세게 그녀의 머리를 압박하던 손이 풀렸다. 

대신해서 배 밑으로 불쑥 팔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남자가 이예주를 번쩍 들어 앉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고 어느새 그녀는 남자의 품에 고이 앉혀진 채로 시뻘겋게 물든 얼굴을 씩씩대고 있었다.

“못생긴 홍당무 같군.”

남자가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발견하곤 약 올리듯 지껄였다. 

비죽 웃는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눈이 새하얘지며 웃는 남자의 얼굴로 주먹을 내지를 뻔했다. 

이성을 조금만이라도 놓쳤다면 분명히 그리했으리라.

“웃어……?”

이예주의 몸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몸과 같이 목소리도 덩달아 떨렸다.

“웃음이 나와요?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그럼 울어야 하나?”

“이, 이……!”

이 개새끼야아악! 

세상의 온갖 쌍욕이 그녀의 온 정신을 지배했다. 

잘도 맞는 말만 지껄이는 저 주둥이를 한번 쥐어뜯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바치리.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니 아니, 다 내가 잘못했다고 쳐요.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그렇다고 여자 궁둥짝을 이렇게 떡메 치듯 내리쳐요?! 내, 내 엉덩이는 우리 엄마도 안 때린 성지라고요!”

“흠…… 말 안 듣는 어린 것에게는 매가 딱이라고 했는데. 너에겐 잘 안 통하는 것 같군.”

“안 통…… 안 통해?! 하아…… 하나님.” 

남자가 내뱉는 개소리의 퍼레이드를 듣는 족족 이예주의 눈앞이 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시퍼렇게 점멸되어 갔다. 

아아, 이성이 끊어질듯 점점 가느다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리긴 누가 어려요! 당신 이거 성희롱이야, 어?! 우리나라에서 당신 같은 사람은 쇠고랑 찬다고! 알아?!”

“쉬이…… 벌 말고 상도 줄 테니 그만 칭얼대거라.”

점점 격해지는 그녀를 람이 얼싸안고 타일렀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완전한 어린아이 취급에 이예주는 ‘어흑!’ 하고 뒷골을 잡았다.

“상? 하! 상은 무슨! 또 이상한 돌조각 쥐어 주고 과자 사 줄 테니 울지 말라고 협박하려……!”

입에서 불을 뿜어내던 이예주는 덥석 제 양 볼을 부여잡은 람의 손에 놀라 말을 멈췄다.

그 순간 쪽, 말캉한 게 쪼듯이 이예주의 입술을 덮었다 떨어졌다.

“뽀뽀.” 

남자가 코앞에서 무어라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숨이 이예주의 입술 위를 간질거렸다. 그녀의 숨이 뚝 멈췄다.

“사막에서 이걸 좋아하지 않았던가? 도망 안 치고 잘 기어 돌아왔으니 주는 상이다.”

동상처럼 굳은 이예주의 시선이 저를 바라보며 색스럽게 사부작거리는 남자의 발간 입술에 고정되었다. 

마치 확대라도 한 것처럼 그 야스럽고 요망한 것이 눈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뭐…….”

그녀의 맹한 반응에 남자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왜. 상으로는 부족한 건가?”

얼굴을 붙잡은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이예주의 얼굴이 속절없이 앞으로 끌려갔고 방금 느꼈던 촉촉하고 물컹한 것이 다시 입술 위를 점령했다. 

무언가 뱀처럼 미끄덩한 것이 입술을 할짝할짝 건드렸다. 

그 간지러움에 미처 움츠리기도 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것이 한가득 밀려 들어왔다. 

살아 있는 유동체가 그녀의 혀를 숨 쉴 수 없을 만큼 얽었다. 

이예주의 혀, 타액, 날숨, 모든 것이 빨려 나갔다. 그 사이로 그녀의 혼도 빨려 들어갔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쿵쿵 횡격막을 내리쳤다. 

마지막으로 한 번 강하게 치열을 훑고 지나간 그 물컹한 것이 추욱 하고 기다란 은색 실을 늘어뜨리며 이예주의 입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건 키스.”

남자가 이예주의 입술 위에서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두근두근을 넘어 쿵쾅쿵쾅 발광하던 심장이, 뚝 멈췄다. 

호흡 부족으로 얕게 헐떡이며 그녀는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을 상기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려 노력했다. 

지금 뭐지. 뭐가 자신의 입술을, 입속을, 혓바닥을…….

“이, 이게…… 뭐…….” 

“표정이 왜 그러지? 꼭 울 것처럼 흐려져 있군. 네가 먼저 좋다고 내게 직접 가르쳐 주었지 않아.”

“내, 내가 언제…….”

“네 돌덩이 같은 머리는 기억력조차 나쁜가 보군. 며칠 전 사막에서다.”

이예주의 멍하게 정지된 머리가 람의 말을 따라 자동으로 더듬더듬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조롱이의 말로는 자신이 괴물에게 얻어맞고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것을 남자가 살려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가 치료해 준 기억이 씻은 것처럼 없었다. 

아니 아니, 약간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무슨 오아시스에 있었는데…… 쪼르륵 물 따르는 소리가 계속해서 연달아 울렸고…… 그리고, 그리고…….

쪽.

―……잘생겼어…….

―……뽀뽀.

츄웁.

남자의 얼핏 당황한 것 같은 모습과.

―이게 무슨…….

―이건 키스.

“잘 생각해 봐라. 네가 먼저 좋다고 달려들었…….”

“아아악!”

이예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괴성을 지르며 허겁지겁 람의 입을 제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무슨 짓이냐는 듯 람이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으나 그녀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치며 저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부정했다.

“아아악!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생각났나 보, 읍……!”

“아악! 말하지 마!”

이예주가 람의 입을 틀어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