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소득도 없이 일만 지르고 다녔던 행적을 고하면 남자가 대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황조롱이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면 자신을 찢어 죽이겠지.
나름의 타당성이 있던 행동들이었지만, 남자가 그것을 옳다구나 받아들일 리 없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몸이 반사적으로 덜덜 떨렸다.
으, 으흑. 괴상한 소리를 입 밖으로 흘리는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그게요…….”
남자가 당장 지껄여 보라는 듯 강한 눈으로 이예주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아까처럼 어디 한번 얘기해 보든가 말든가 같은 식이 아니었다.
당장 진실을 토해 내지 않을 시, 죽음을 넘어선 고통을 맛보게 해 주겠다는 뜻이 그 빨갛고 진중한 눈에 담겨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해 질끈 눈을 감았다.
“그, 그게…… 과,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조, 족장의 서재에 책이 많다고 들어서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가…….”
몰래 빠져나갔다는 부문에서 람의 기세가 지나치게 험악해졌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변명했다.
“서재에서 이상한 검은 책을 봤는데…… 2017년에 검은 파편이 깨어났다고 써져 있었는데요…… 세상이 멸망했다고 막 그랬는데…… 거기서 책에 나온 ‘시간’이란 여신이랑 똑같은 여자를 만났어요. 그 여자를 쫓아가다가 이상한 계단을 지나쳐서 지하 같은 데에 갔는데요…….”
“…….”
“거기에서 조, 족장이랑 남자들이…… 여자들을 채찍으로 때려서 피를 빨아 먹는 걸 봤는데, 흐…… 흐흡…… 근데 누가 뒤에서 발을 구르면서 도망쳐 가지고! 아, 누구냐면 여신 그 여자랑 똑같은 망할 계집이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 미친놈들이 막 날 쫓아왔어요! 그래서 도망가다가 일리야를 만났는데요.”
“…….”
“일리야가 있잖아요, 과거가 멸망했다는 거예요. 책대로라고, 책대로 세상이 멸망해서 자기네 팔족만 시간을 멈춰 살아남았다고요. 난 과거로 돌아가야 되는데 자꾸 나보고 구원자라고 도와 달라고만 그러고. 그러다가 족장이 방으로 쳐들어와서……!”
이예주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멈췄다.
순간 끔찍했던 족장과의 일이 눈앞을 마구 스쳐 지나갔다.
공포로 확장된 눈동자 주위로 꿀렁꿀렁 물들이 가득 차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휘익 휘익, 아직도 귓가에서 허리띠 내려치는 소리가 생생하다.
등을 강타하고 지나가던 충격이 떠올라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미친 새끼가 허리띠로 등을 내리치고…… 으, 으으…… 등에 달려들어서 피 빨아 먹고 깨물고…… 흐, 흐흑.”
이예주가 히끅 히끅 거리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잘못했어요. 그냥, 그냥 과거로 가는 방법만 알려고…… 그 여신 닮은 여자가 알려 줄까 해서 쫓아간 건데요.”
“…….”
“일리야는 자꾸 멸망했다고 이상한 소리만 해 대고. 책대로라고 하질 않…… 아, 맞다! 내 책!”
그녀가 불현듯 알아챈 책의 부재에 주변을 황급히 훑어보았다.
“흐허헝, 내 책! 내 책! 씨잉…… 책 놓고 온 것 같아요. 어떡해요?”
“하.”
마치 하나의 희극을 보는 것 같이 극과 극을 달리는 감정 변화에 람이 냉소를 지었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 쭈절쭈절 대는 것을 끝까지 들어 보았더니 결국 책의 부재를 저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람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깟 책 따위가 중요한가?”
“그럼 안 중요해요? 그 책에 당신에 대한 얘기랑 용암 얘기 다 써 있었단 말이에요! 얼마나 중요한 건데!”
“…….”
책의 부재로 이예주가 발광하는 사이, 람은 어이의 부재로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왔다.
이리저리 책의 행방을 고민하던 그녀가 결국 이게 모두 족장 새끼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었을 때까지 침묵하던 람이 고충이 가득 담긴 어두운 목소리로 이예주의 죽음을 예고했다.
“……대체 널 죽여야 할지 살려서 데리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
“……흡!”
그 무서운 소리에 그녀가 퍼드득 놀라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활화산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그런 소리를……!”
이예주가 파리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런 무서운 것을 고민하실 것까지…….”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했나.”
“네, 네?! 예, 예! 그쵸! 과거로 돌아가야죠. 믿어 주시는 거예요?”
“흐르지 않은 미래로 가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흘러 버린 과거로 가는 방법은 없다.”
람의 앞말을 흘려듣던 이예주가 뒷말을 듣고 흠칫 몸을 굳혔다.
“없…… 없다뇨? 없다고요?”
“그래.”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가 순식간에 멍한 얼굴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람을 올려다보던 이예주의 고개가 지는 꽃처럼 다시금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람에게 무어라 대꾸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바로 닫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열었다가 또다시 닫았다.
무슨 말을 꺼내고 싶지만 여지조차 주지 않고 단호하게 끊어 버린 남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입을 열면 그대로 눈물이 질질 쏟아질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예전부터 직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과거’로 가는 능력은 전혀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과거’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타임머신은 개뿔, 제대로 된 인간도 없는 이 망할 곳에서 대체 어떻게 과거로 간단 말인가, 어떻게.
애써 묻어 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갈 수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아니, 가야만 했다.
과거로 가지 않으면 자신이 집도 없고 아는 이도 하나 없는 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2017년 현대에서도 적응을 못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몇 년을 겉돌던 자신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조금만 길을 걸어도 괴물 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고?
조금만 정신 놓고 서 있어도 자신을 죽이거나 잡아먹으려는 것들이 사방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
“그럼…… 그럼 난 어떡해요……? 여긴 미친놈들만 잔뜩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살아! 흐흑.”
이예주가 절망에 빠져 눈물을 글썽거렸다. 딱히 람에게 답을 구하기 위해 질문한 건 아니었다.
눈앞이 까마득했다. 답 없이 깜깜하기만 한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당신은 날 죽이려고 하고…… 난 하루하루가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은데…… 으허엉, 어떡해? 어떡해, 흐흑. 어떡해, 예주야. 어떡해! 어떡……!”
이예주가 미쳐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이 상황에 기어이 발악하며 울음을 터뜨리려던 그 순간.
“후…… 죽이긴 누가 죽인단 말이야. 안 그래도 이미 살려 놔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흐끅!”
이예주를 바라보던 람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에 놀란 그녀가 코를 들이마시며 화들짝 숨을 멈췄다가 다시금 눈가에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남자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마지못해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가를 꾹꾹 짓눌렀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족족 살갗이 싸해지더니 물 자국이 사라졌다.
잔뜩 좁혀진 눈썹을 꿈틀거리며 남자가 히끅 히끅 대는 이예주를 노려보았다.
“뚝. 말도 더럽게 안 듣지.”
“힉, 히잉……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저 안 죽여요?”
“하…….”
남자가 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멍청함은 가끔 나에게 미칠 듯한 살기를 불러일으켜.”
짓씹듯이 내뱉는 그 목소리에 이예주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 그런…….”
“하지만 벌써 살려 버렸으니 별수 없다.”
“사, 살렸다고요?”
“그래. 살린 것뿐 아니라 검은 파편의 조각까지 먹여 내게 종속까지 시켜 버렸지.”
이예주가 람의 뜻 모를 말에 토끼 눈을 하자 눈물을 다 빨아들인 람의 손이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그녀의 왼쪽 손목을 잡아챘다.
검은 대리석처럼 흉측하게 변해 버린 이예주의 흉터가 드러났다.
남자가 그것을 그녀의 눈앞에 성의 없이 휙휙 흔들며 말했다.
“이게 내게 종속되었다는 표식이다. 너와 나의 계약이 정식으로 완료되었다는 증거지.”
“아, 조롱이가 말했던…….”
“넌 앞으로 내 허락 없인 아무것도 못해. 도망은 물론이고 죽으려 들 수도 없다. 네 그 한심하고 덜떨어진 행동에 제약을 걸어 둘 수 있어 다행이지만, 바꿔 말하면 나 또한 널 함부로 죽여 버릴 수 없는 제약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지.”
이예주가 전보다 훨씬 더 괴상하게 변해 버린 흉터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핍박당하고 힘없이 죽어 가는 것들이 쉽게 죽지 않도록 내리던 힘을 어째서 너 따위에게. 후…….”
남자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예주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제 잘못을 잘 알고 있기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반성하는 태도를 취했다.
“넌 내게 살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름 모를 감정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널 살렸고, 널 죽이겠다는 계약 조건이 바뀌었지. 그러니 너는 앞으로 내가 널 살려 버린 이유를 찾아내. 그것이 계약 조건이다.”
“……예? 뭐라고요!”
뜬금없는 바뀐 계약 사항에 을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자 갑이 친절하게도 다시 한 번 계약 사항을 읊어 주었다.
“내 마음이 바뀐 이유를 찾으라 했다.”
“……다, 당신 마음의 이유를 찾으라고요?”
“그래.”
“아니, 마음을 바꾼 건 당신인데 내가 신도 아니고 당신 마음을 어떻게……!”
번쩍, 어둠 속에서 피 같은 눈동자가 이예주를 향해 형형히 번득였다.
그 살기등등한 위협에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박하려던 말을 다급하게 멈췄다.
포악한 산짐승 앞에 벌벌 떠는 가녀린 사슴이 되어 조용히 침묵하던 이예주가 한참 후에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사, 살렸으면 살린 거지 그 이유가 뭐가 그렇게 주, 중요해요…….”
미약한 반항이었다. 남자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도록 그녀가 꿍얼거렸다.
남자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최대한 발음을 뭉갰다고 생각했는데 귀신같이 알아들은 남자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중요해.”
“……그게 그니까요, 왜 그게 중요한지…….”
“난 미물들이 가지는 감정을 알 수 없다.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던 계집은 죽어 버렸으니…… 네가 그것을 찾아내면 너에게 과거의 흔적을 찾아 주마.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지금으로썬 딱히 없지만, 네가 살던 시대의 후손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지. 과거의 흔적을 찾다보면 방법이랄 게 나올지도.”
이예주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죠? 정말 과거로 가는 방법 찾아 줄 거예요?!”
그녀가 반색하자 람의 눈썹이 이유 모르게 꿈틀거렸다.
람은 기뻐하는 인간 여자를 바라보며 묘하게 기분이 나빠짐을 느꼈다.
왠지 모를 심술에 그가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이예주가 자꾸만 칭얼대며 그를 채근했다.
“정말이죠? 약속해 줘요! 정말, 정말 그럴 거죠?”
“……약속하지.”
“하, 진짜. 당신, 진짜 최고예요!”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네가 원하는 시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지 모르겠군. 용암 폭발 이후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빨아들였기에…… 이봐.”
이미 과거로 갈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쁨에 젖은 이예주의 귀에는 람이 덧붙이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엄마만 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방금 전까지 시무룩하게 질질 짜던 게 언제였다는 양 이예주가 무릎걸음으로 재빠르게 침대 끄트머리로 기어 와, 의자에 앉아 있는 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우리 당장 이유 찾아요! 음, 언제부터 죽이겠다는 마음이 바뀐 거예요? 숲? 아니면 사막에선가? 아님…… 혹시 처음부터……? 맞죠, 처음부터 맞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