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62)화 (62/319)

“……으윽.”

인간 여자가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신음했다. 

람이 제 품에 힘없이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등이 온통 시뻘겠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참혹한 상처들이 그녀의 등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벌겋게 입을 쩍 벌린 그 상처들이 계속해서 피를 퓻, 퓩 쏟아 내 하얀 살결과 그녀를 안은 람의 손 위에 범람한 상태였다. 

“너 대체…….”

람의 시뻘건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파충류처럼 잔뜩 확장된 그의 동공이 주위 모든 생명체의 살을 베어 낼 것처럼 지독한 살기를 내뿜었다. 

문득 그의 가슴에 힘없이 얼굴을 처박고 있던 인간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핏기라곤 하나도 없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표정이 방금 전 울어 댈 때와는 약간 달랐다. 

“저, 저기, 우욱…….”

잠시 부들부들 떨던 이예주가 불쑥 헛구역질을 했다. 

깜짝 놀란 람이 새파랗게 날을 세우던 살기를 채 거둬들이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저기…… 우웁.”

“뭐 하는…….”

“저기 더, 더, 더듬이……!”

이예주가 다시금 밀려오는 헛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왼쪽 아래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스르륵 눈동자를 돌렸다가 다시 원상 복귀시켰다. 

저 미치고 펄쩍 뛸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이예주가 더욱 경기를 일으켰다.

“저기, 저기 왕…… 왕더듬이…….”

“…….”

“대…… 대왕…… 대왕 바퀴벌레…… 어윽…….”

필사적으로 자신이 본 끔찍함에 대해 토로하던 그녀가 이내 시든 콩나물처럼 픽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봐, 인간. 인간!”

람이 화들짝 놀라 졸도한 이예주를 흔들었으나 그녀의 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내 더듬이가 뭐 어때서! 역시 하찮은 인간 따위가 이 멋을 알 리 없지. 안 그러오, 주인?”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성인 몸통만 한 크기의 거대 바퀴벌레가 기절한 이예주를 바라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해 주듯 굵고 기다란 더듬이가 스스스슷, 빠르게 흔들렸다. 

*       *       *

“헉, 헉, 헉!”

이예주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정말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뛸 때마다 등짝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뜨끈한 피가 흘러내려 뒤가 온통 척척했다. 

“거기 서! 거기 서, 야생 밤비야! 거기 서!”

“아악! 꺼져, 꺼져! 꺼져, 이 미친 새끼야!”

휙휙, 뒤에서 미친 족장이 제 허리띠를 카우보이처럼 휘두르며 숨 가쁘게 이예주를 쫓아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발에 박차를 가했다.

“흐음, 스멜…… 하악, 밤비야. 흐흐흐, 싱싱한 피야. 싱싱한 피! 내놔! 피를 내놔, 당장! 밤비야! 래주! 레이디!”

족장의 목소리와 허공을 가르는 허리띠의 파열음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예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를 쓰고 달렸다. 

문득 미친 듯이 뛰고 있던 그녀의 앞이 환해졌다. 

끝없이 이어졌던 길 끝에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주위가 온통 빛으로 휩싸여 있었다. 아니, 그가 빛을 내뿜는 것만 같았다. 

뒷모습뿐이었지만, 이예주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지금껏 그 검은 뒤통수만 바라보고 걸어왔던 것이 몇 날 며칠인데. 

절박함과 반가움을 동반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람!”

이예주가 환한 그의 등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며 소리 질렀다.

“람! 람! 도와줘요, 도와줘요!”

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급해진 이예주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 그에게로 뛰어갔다. 

마침내 간신히 남자의 뒤에 도착했을 때, 별안간 그가 휙 뒤로 돌았다. 

그리고 람의 잘생긴 얼굴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찢어질 듯이 입을 벌린 채 웃고 있는 족장의 얼굴이.

“……서프라이즈으! 벌써 지친 건 아니지, 하니?” 

“아아아악―!”

이예주가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그도 모자라 자신의 위에 덮여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상체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족장, 족장! 그녀가 공포로 점철된 눈으로 허겁지겁 제 몸을 훑어보았다. 

희번덕하게 눈이 뒤집힌 족장한테 미친 듯이 쫓기던 자신은 어느새 일리야가 안내해 준 저택의 호화로운 방, 침대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꿈?”

이예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닌데, 분명 자신은 일리야 몰래 방을 빠져나와 서재로 갔다가 미친 족장 놈을 보았다. 그리고 분명 람을 보았다. 

그리고 또 엄청나게 큰 대왕 바퀴벌레를 본 것 같기도 했는데. 

그리고 또, 또……. 

분명 람을 만났었다. 

드디어 살았다고, 드디어 족장 놈한테 벗어났다고 무척이나 안심했었는데. 그랬는데……. 

“그게 다 꿈이라고……?”

이예주는 다시 한 번 ‘꿈’ 하고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왈칵 구겼다.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야. 안 돼, 안 돼…….”

꿈이라니. 꿈이라니. 아니야, 아니야. 안 돼. 이예주가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울먹울먹했다. 

여긴 너무 불길하고 음침하다. 

처음 발을 들이밀 때부터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다. 

사막도 좋고 숲도 좋으니까 제발, 제발. 

“꿈 한 번 요란하게 꾸는군.”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꽤 떨어진 커튼 친 창문 옆에 커다란 인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채 완전히 닫히지 못한 커튼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인영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이예주의 눈동자가 공포에서 놀라움으로 탈바꿈했다.

“귀청 떨어질 정도로 괴성을 지르던데.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람.”

이예주는 대답 대신 속삭이듯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언제부터 저 남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맘을 놓게 된 건지 모르겠다.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바싹 굳어 있던 몸이 탁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남자를 발견하고 가슴을 한시름 내려놓은 그녀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람이 데려다 놓은 건가? 분명 저택 안의 방이 맞긴 맞았다. 

그러면 족장은 벌써 람이 죽여 버린 걸까? 헉, 그러고 보니 일리야는 어떻게 된 거지? 조롱이는? 

다시 족장의 저택임을 자각하자마자 물밀듯이 궁금증이 밀려들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문득 침대 위에 고이 놓인 제 몸을 내려다 보니 가슴과 등을 압박한 못 보던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혹시 등짝의 상처도 치료를 해 준 건가.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였으나 왠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면서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이예주는 불현듯 자신의 괴상한 행동을 람이 다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날카롭게 주시하던 검은색 인영이 이예주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예주는 여전히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녔던 건지 어디 들어나 볼까.”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 탓에 이예주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람을 만나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더라. 

그래, 다리족이 아니라고 했다. 

다리족이 아니라고, 살려 달라고. 제 입으로 사실을 고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이예주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그냥 살려 달라고만 하지, 무슨 광영을 보기 위해서 제 입으로 마지막 보루까지 싹 고해바쳤던 걸까. 

이 바보야, 이 정신 나간 계집아…….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차가운 목소리에 이예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인정머리라고는 쥐뿔만큼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돌아간 람이 그녀를 싸늘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이예주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녀가 덜덜덜 떨리는 입술 근육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 그게요…….”

그녀는 절망이 가득 스며든 얼굴로 울상 지었다.

“제가 거,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요…….”

“…….”

“예, 예! 절대 처음부터 그쪽을 속이려고 거짓말했던 건 아니에요! 절대요! 그, 그게…….”

“…….”

“그게 그러니까…… 그…….”

흘끗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전과 다름없이 딱딱하기만 했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주위에도 불구하고 새빨간 눈동자만은 변함없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자 이예주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렸다.

“그게…… 미친 소리 같겠지만요. 전 과거에서 왔어요.”

에라, 모르겠다. 이예주가 일단 질렀다.

“그리고 능력은요…… 그니까, 다, 다리족은 아닌데…… 아니긴 아닌데요. 그쪽 인간들이랑 약간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다리족이라고 한 거예요.”

“…….”

“그니까 제 능력이 뭐냐면…… 위험해 처할 때마다 ‘문’ 같은 게 생기는데요. 그걸 넘으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아무튼 위험에 처할 때마다 벗어날 수 있어요. 그냥 별거 아닌데요. 어쨌든 저는 과거에서 와서 말하는 새를 만나고 땅을 막 파죽지세로 가르고 번개를 막, 막 내리치는 당신을 만나 가지고 너무 놀랐는데. 그, 그래서 정신없이 ‘문’을 넘고 또 넘고 도망을…….”

얼음장 같은 남자의 시뻘건 눈 아래,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횡설수설 늘어놓던 이예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고개도 점점 숙여지더니 결국 죄인처럼 완전히 푹 수그러들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여전히 대답 없는 남자에게 그녀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죄를 고해바쳤다. 

“그, 그치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일단 저도 살고 봐야지 어쩌겠어요? 이, 이런 미친 곳으로 와서 가만히 앉아 죽을 순 없잖아요. 흐, 흐흑……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모르겠는데 망할 뱀 새끼는 자꾸 쫓아오고…….”

“…….”

“그니까요. 너무 화내지는…….”

“내가 궁금한 건.”

별안간 남자가 이예주의 말을 뚝 잘라 냈다.

“네 시답지 않은 능력 따위가 아니다.”

“……예?”

남자의 말에 이예주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잘생겼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그가 마치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알량한 능력이 네게 추가된다고 해서 네 한심하고 우둔하기 짝이 없는 머리통이 더 나아지거나 발전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

왠지 기분은 더러운데 숨이 막힐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으나 남자가 새빨간 눈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그……게…… 그렇겠죠. 예, 예.”

이예주는 굉장히 심란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것을 인정했다.

“그럼 그쪽이 궁금한 건 뭐……일까요?”

남자가 다시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왜 명령을 어겼지?”

“네? 명령은 무슨…….”

“분명 이번에도 멋대로 행동했다간 까마귀 둥지 한가운데에 버린다고 했을 텐데.”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이예주의 얼굴에 다시금 핏기가 가셨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지적에 그녀는 입을 떡 벌린 채 어버버 거렸다. 

황조롱이가 신신당부하던 남자의 지엄한 전언이 떠올랐다. 

사실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데에만 급급해 그것은 그다지 생각지 못했다. 

아니, 당장 람이 없다는 사실에 거의 무시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 남자의 말을 무시했다. 이 미친놈의 명령을.

“게다가 일부러 네 곁에 남겨 둔 황조롱이까지 따돌리고 싸돌아다니다니.”

“……헉.”

“황조롱이는 인간들이나 쓰는 마취 향을 잔뜩 마신 탓에 간신히 네 상처만 보고 다시 쓰러져 자고 있다.”

람이 이예주의 가슴과 등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를 무성의하게 턱짓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것을 멈췄다. 

그제야 자신이 거짓말 이상의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제 네가 뭔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 말할 차례 같은데.”

“그, 그게…….”

목을 조르는 압박감에 이예주가 새된 소리를 신음처럼 내뱉으며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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