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61)화 (61/319)

족장이 그녀의 등에 낙지처럼 들러붙어 피를 빨아 먹었다. 

그도 모자라 피가 맺힌 상흔을 이빨로 물어뜯는 바람에 다시 한 번 통렬한 고통이 이예주를 강타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이예주의 머릿속은 온통 경악과 공포로 뒤범벅되어 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눈앞이 시뻘게졌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아까 제가 본 끔찍한 장면의 잔향인지, 아니면 제게서 나는 피 냄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절할 것처럼 아찔한 현기증이 이예주의 몸을 추욱 늘어뜨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족장 밑에 깔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이예주의 눈에 열려진 문틈 사이로 꺼먼 뭉치들이 스스스슥 밀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제 정신을 앗아 가려는 암전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없이 눈꺼풀을 감았다 뜰 때마다 까만 뭉치들은 점점 빽빽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정확히 이예주를 향해 스스스슥 다가왔다.

“으읍. 응? 이게 뭐…… 으아악!”

마치 모세 앞에 갈라져 바닥을 드러낸 바다처럼 이예주가 있는 곳만 피해 지나친 그 빽빽한 뭉치들이 순식간에 족장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고 족장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악! 저, 저리 가! 저리 가! 일리야! 일리야!”

스스, 스스슥. 휘익 휘익. 

무언가 움직이는 스산한 소리에 족장이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채찍을 휘둘렀다. 

이예주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줘 바닥에서 일어났다. 

스스스, 스스스슷. 

퓨즈가 나갔던 그녀의 초점이 시꺼멓게 족장을 둘러싸고 있는 그 정체 모를 것들을 발견하곤 불이 들어오듯 되돌아왔다. 

“아악, 끄아악! 일리야! 아니, 이보게들! 이 바퀴벌레! 바퀴벌레를! 우욱!”

족장이 한 번 허리띠를 휘두를 때마다 그의 몸에서 우수수 주먹만 한 바퀴벌레들이 떨어졌다. 

그러나 더 많은 바퀴벌레들이 끊임없이 족장의 다리를 타고 빠른 속도로 기어올랐다. 

소름 끼치는 까만 뭉치들이 족장의 옷과 신발, 심지어 비명을 지르느라 벌려진 입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이보, 이보게……! 우웁! 웁! 웁!”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이예주의 앞에서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족장의 몸을 충분히 뒤덮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끊임없이 문틈으로 스스스슥 기어 들어와 족장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방바닥이 순식간에 새까만 그것들로 뒤덮여 넘실넘실 움직였다. 

이예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구역질을 억눌렀다. 

족장처럼 비명을 지르고도 남을 심정이었으나, 입을 열었다간 금세 구토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그 득실득실 거리는 역겨운 것들 중 단 한 마리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예주의 주위에 거짓말처럼 둥그런 경계가 생겼다. 

문득 애써 구역질을 참고 있던 그녀의 머리맡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이예주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세 개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문이 무려 세 개나 열렸음에도, 그녀의 눈엔 오로지 가운데 문만 보였다. 

언뜻 지나치면 몰라봤을 것이다. 높은 빌딩에 우뚝 서 있는 ‘문’ 안의 검은색 남자. 

아니, 몰라봤을 리가 없다.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자신을 구해 주었던 인물을 대체 어떻게, 어떻게 잊을까. 

“흐…… 으흐…….”

그녀의 입에서 기어이 울음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모르겠다, 이젠. 대체 누가 자신을 죽이고 누가 자신을 살릴지. 

주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 같았다. 

인간을 넘어 괴물까지 끝없이 나타난다. 

자신을 구해 주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지옥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지옥 같은데도…….

“흑, 으흐흑…….”

이예주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뚱이를 끌고 필사적으로 ‘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앞이 온통 뿌옜다. 

그래도 그녀는 기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스슥, 스스슥. 

그녀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시꺼먼 바퀴벌레 떼들이 길을 터 주었다. 

덕분에 이예주는 따사로운 빛이 제 몸을 감쌀 때까지 징그러운 생명체들에 손끝 하나 닿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 안에서 가장 높은 빌딩 위의 송신탑에 새까만 머리, 새까만 차림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까마득한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 도시 아래를 샅샅이 훑는 시뻘건 눈이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남자의 발밑에서 발랄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방금 그 쪼끄만 황조롱이 찾았다고 연락이 왔수다.”

“…….”

“에…… 그리고 주인, 주인이 말한 그 어린 인간 여자는 말이요. 그게……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직 못 찾았다네. 우리 애들이 찾는 덴 도사거든. 특히 썩은 사과랑 인간 손톱 냄새는 십 리 밖에서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말없이 건물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불현듯 사나운 기세로 고개를 돌리자 떠벌 떠벌 들려오던 말마디가 뚝 끊겼다.

“큼큼, 말이 샜네. 어쨌거나 주인, 그 인간 여자는 아직 못 찾았다우.”

“찾아내.”

“몇 번이나 애들 다 동원해서 모든 건물을 샅샅이 뒤졌는데! 혹시 주인 오기 전에 벌써 날랜 거 아니우?”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서 다시 대답이 없었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송신탑 위로 내려앉았다. 

긴 정적에 어색함을 못 참고 아래쪽에서 다시금 큼큼거리며 남자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던 중, 검은 머리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몇 시간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 기척? 생명의 기척 말이요?”

“그래, 아직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확실해. 그러니 입 다물고 당장 찾아.”

“음, 흠흠.” 

아래쪽에서 이번엔 애매한 목소리로 가짜 헛기침을 쏟았다. 

“에…… 주인.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이미 벗어나고도 한참 지난 게 아, 아닐깝쇼? 왜 인간 놈들 특기잖소? 주인 무서워서 매번 도망쳐서 사는 마당에…….”

아래쪽에서 잠시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이었다.

“주인, 내 생각엔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을 게 아니라, 그 인간 여자의 뒤를 얼른 쫓…… 주, 주인!” 

그때 동상처럼 우뚝 서 있던 남자가 별안간 어딘가로 저벅저벅 빠르게 걸어갔다. 

벼락이 내리칠까 무서워 당황한 채 주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허공, 남자의 앞에 마법처럼 환한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손톱만 해서 웬만한 눈썰미로는 눈치챌 수도 없을 빛 덩어리가 남자가 다가갈 동안 점차 탁구공만 해지고, 탁구공에서 농구공만 하게 커졌다. 

남자가 앞에 도달했을 때는 완전히 커져 사람 모양을 이루었다. 

위태롭게 공중에 떠 있는 빛을 향해 남자가 불현듯 손을 뻗었다. 

그것이 무게를 띠고 허공으로 떨어지기 바로 직전, 강하게 빛을 움켜쥔 남자가 힘을 주어 홱 끌어당겼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히 빛나던 빛이 사라졌다.

털썩, 람의 품으로 인간 여자가 떨어졌다. 

“……너.”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고 람의 품에 안착한 인간 여자가 그의 화난 어투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닌 건지 못 본 사이 핼쑥해진 여자의 얼굴이 허옇게 들떠 있었다. 

한동안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고개를 숙여 남자의 품에 코를 푹 박았다. 

잠시 킁킁하고 냄새를 맡은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를 확인한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왈칵 일그러졌다. 

“으, 으으…….”

그녀의 커다란 눈 안에 순식간에 망울망울 물이 차오르기 무섭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차가운 눈이 당황으로 크게 떠졌다.

“흐, 흐흑, 잘못했어요…….”

여자가 람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저 다리족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당신이 죽일까 봐 거짓말했어요.”

“…….”

“그래도…… 흐흡, 그래도 다 말할게요. 능력에 대해서도 다 말할 테니까…….”

“…….”

“죽이겠다는 계약 조건…… 흐, 흐흑, 바꾸면 안 돼요?”

이예주의 두 눈에서 눈물 덩이가 끊임없이 뚝뚝 떨어졌다. 

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예주는 차마 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까진 없어서 약간 시선을 비껴 그의 촘촘하게 난 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그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도 그의 생각을 알아차릴 순 없었겠지만. 

이대로 남자가 벼락을 내리칠까 봐 원치 않아도 몸이 바짝 긴장을 했지만, 이예주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니, 사실 더 이상 무서워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렇게 포식자 앞에 떨고 있는 가녀린 먹이처럼 그녀는 드문드문 몸을 떨면서 남자의 심판을 기다렸다. 

남자가 불쑥 몸을 움직여 손을 드는 기척이 들었다. 

이예주의 눈이 반사적으로 질끈 감겼을 때, 그녀의 눈가에 서늘한 손길이 닿았다. 

“그렇게 요망한 짓으로 꼬리를 치더니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녀가 질끈 감았던 눈에 힘을 풀고 눈꺼풀을 올렸다. 

남자가 전과 다름없이 성의 없는 손길로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닿는 족족 눈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꼭 스펀지처럼 물기들이 모두 그의 손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예주의 얼굴이 다시금 왈칵 일그러졌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따라 남자가 무뚝뚝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눈물 콧물로 범벅된 이예주의 흉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각인처럼 시뻘겋게 박혔다. 

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저 밑으로 떨어졌다.

“계약 조건은 사막에서 이미 바뀌었다. 그러니…….”

“…….”

“울지 마.” 

끊임없이 눈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그 위를 서늘한 남자의 손이 꾹꾹 눌렀다. 

울지 말라고 해 놓고 남자는 우는 이예주를 채근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다. 이렇게 다정하게 자신을 쓸어 주는 남자가. 

그렇게 자신만 보면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던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혹시 꿈을 꾸는 건가? 

자신은 벌써 죽거나 아니면 미쳐 버린 족장의 채찍질에 못 이겨 기절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불쑥 들었다. 

이것이 만약 꿈이라면 차라리 꿈속에서 죽고 싶다. 

더 이상은 못 가겠다. 죽음이 부르는 손길을 무시한 채 전진하는 것도, 필사적으로 과거를 찾아 헤매는 것도 더 이상. 

꿈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문득 눈앞에 존재하던 남자의 얼굴이 뿌옇게 뭉개졌다. 

안 돼, 안 돼. 싫어. 

남자가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날까 싶어 이예주가 필사적으로 눈을 끔뻑이며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눈물 때문이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와 남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못난이 인형처럼 흉한 얼굴로 눈물 콧물 질질 짜내고 있을 제 얼굴이 훤히 떠올라 그녀는 우는 것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이미 터질 대로 터진 서러움을 멈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남자는 여전히 이예주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그의 손이 닿는 족족 붉게 달아오른 살갗이 시원해졌다. 

더, 더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기 전에 더 많이, 더 많이.

“이상하군.”

“…….”

“왜 이렇게 얼굴이 뜨거운 거지?”

남자가 이예주를 향해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눈도 모자라 귀까지 먹먹해져 그의 말이 드문드문 끊겨서 들려왔다. 

이예주는 남자에게 대답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으나 달달달 떨리는 몸 때문에 그것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몸은 또 왜 이렇게 떠는 거냐. 추운가?”

“히익! 주, 주인!”

그때 아래쪽에서 숨을 잔뜩 들이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저, 저 인간 온통 피투성이……!”

경악이 잔뜩 서린 외침과 동시에 이예주의 몸이 급격히 휘청거렸다. 

그대로 송신탑에서 떨어져도 정신 차리지 못할 만큼 몸에 힘이 없었다. 

람이 서둘러 그녀의 등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여자의 등이 기괴할 정도로 축축했다. 

손이 미끄러지자 그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여자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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