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60)화 (60/319)

“당신들은 구원은커녕 지옥에나 떨어져야 돼. 검은 파편인지 뭔지, 람이 진짜 신이라면 당신들한테 벌을 내릴 거야. 당신들은 천벌 받을 거라고!”

“제발! 구원자님! 으흐흑!”

일리야가 다시 급박하게 이예주의 발치에 매달리려 들었으나, 그녀는 빠르게 발을 물렸다. 

독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면서도 이예주의 얼굴은 시종일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찡그린 채였다. 

이젠 정말로 모르겠다.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지. 

돌아갈 과거가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구원자님! 잘못했어요! 검은 파편에게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뭐든 다 할게요, 뭐든! 족장에 대해서도 다 말할게요. 제발 검은 파편에게만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용암에 깔려 죽을 순 없어요, 구원자님. 구원자님! 검은 파편만은……!”

일리야가 흐린 이예주의 얼굴을 보고 필사적으로 싹싹 빌었다. 

커다란 두 눈망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고운 얼굴을 망쳤다. 

자신의 시간을 멈췄다고 했던가. 

아무리 봐도 800년을 산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많아 봐야 자신보다 서너 살 더 먹은 젊은 이십 대 아가씨였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는 이예주였다. 

갈등하는 그녀를 알아챘는지 일리야가 더욱 거세게 흐느끼며 애원했다.

“구원자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제발! 우리를, 우리를……!”

그때였다. 이예주의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눈물겨워서 못 봐주겠군, 일리야. 네가 우는 모습을 보면 내 허르으트가 베리 허어얼트 하다고 했지 않나.”

퍼뜩 놀란 이예주가 거칠게 몸을 틀어 박수를 치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족장과 마주했다. 

그녀와 일리야, 두 여자의 몸이 동상보다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괴기스러울 만큼 즐거워 보이는 족장이 입을 귀에 닿을 정도로 벌려 헤벌쭉 웃었다. 

족장의 뒤를 이어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이 실실 웃으며 따라 들어왔다. 

이예주의 두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어떻게…….”

일리야가 무릎 꿇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족장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 푸하하하 폭소를 터트리곤 일리야의 눈앞에서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이 배은망덕한 계집, 내 집에서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 런, 그런…… 으윽!”

열쇠를 바지춤에 집어넣은 족장이 불쑥 손을 뻗어 일리야의 고운 금발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일리야의 괴로운 신음에 이예주가 경기 일으킬 것 같은 표정으로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일리야를 제 앞으로 거칠게 끌고 온 족장이 그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뺨을 질척하게 핥아 올렸다.

“내가 이래서 널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거라니까, 고모. 조금만 틈만 내주면 이렇게 재밌는 일을 알아서 해 바치니 말이야.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우리 팔족 일원인가, 응? 이번엔 얼마나 대단한 계집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나 했더니. 무려 검은 파편이 싸안고 다니는 계집이라고?”

족장이 이예주를 비열한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아차 할 새도 없이 다른 한 손을 들어 일리야의 뺨을 내리쳤다. 

쫘악, 거센 파열음이 방 안을 메웠다.

“아흑!”

“깜찍하게도 그런 중요한 사실을 나에게 숨겨? 내가 그래도 가족이라고 네년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계집들을 통솔할 권리까지 줬는데 그게 성에 안 찼나 보지? 응?!”

“이, 이거 놔! 이거 놔!”

일리야의 반항에 눈이 뒤집힌 족장이 다시 한 번 그녀를 내리쳤다. 

어찌나 거세게 내리쳤는지 풀썩 쓰러진 일리야가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이, 일리야!”

“아아.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요, 레이디.”

놀란 이예주가 미동 없는 일리야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족장이 쥐고 있던 머리채를 성의 없이 내팽겨치고 일어나 그녀를 막아섰다. 

광기로 뒤덮인 족장의 눈이 마치 뱀의 그것처럼 형형히 빛났다.

“보채지 않아도 지금부터는 네 차례거든.” 

일리야를 후려친 손을 허공에 탁탁 털며 족장이 비열하게 웃었다. 

그러곤 일리야 쪽으로 턱짓하면서 뒤에서 이 상황을 흥미진진한 경기처럼 바라보던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이것은 끌고 가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너네들 맘대로 해.”

“허 참. 그게 정말입니까, 족장? 평소엔 이년 뒤꽁무니도 못 쳐다보게 하더니. 참말 우리 맘대로 데리고 가도 된단 말이요?”

약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뭉기적거리던 남자들이 족장의 말에 돌연 눈을 빛내며 몸을 바로 했다. 

참말이냐고 여러 번 되묻는 남자들에게 족장이 대꾸도 귀찮다는 양 성의 없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침이 밝았지 않느냐. 나의 아름다운 일리야가 브르뤡프뤄스트를 차리지 않았으니 나라도 네놈들의 밥상을 차려 줄 수밖에.”

남자들이 족장의 말에 하나같이 크크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축 늘어진 일리야를 번쩍 안아 짊어지고는 빠른 속도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 일리야!”

“어허.”

이예주가 일리야를 둘러멘 남자에게 달려들었으나 족장이 귀신같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두려움에 질려 둘 곳 없이 흔들리는 이예주의 두 눈을 바라보던 족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아침거리는 가만히 계셔야죠.”

이예주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족장이 제 허리를 조이던 허리띠를 풀어 검처럼 쫘악 빼 들었다. 

혀로 느릿하게 제 입술을 핥은 족장이 채찍처럼 공중을 향해 허리띠를 내리쳤다. 

휘잉― 탁! 

“그거 아나?”

족장이 이예주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몸을 떨면서도 족장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려보던 그녀가 두 발자국 물러섰다.

“야생에서 사냥을 했을 때, 잡은 사냥감은 그 자리에서 산 채로 목을 따 피를 마시지. 그렇지만 절대로 죽일 정도로 마시면 안 돼. 어떤 멍청이들은 그 자리에서 박쥐처럼 쭉쭉 피를 모두 빨아 마시더군. 그러면 또다시 공들여 사냥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위협을 담아 허리띠를 휘두르며 족장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예주는 다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야생 동물들은 경계심이 많아서 산 채로 목을 딸 때 얼마나 버둥대는지 몰라. 실제로 피를 먹으려다가 발길질에 차여 갈비뼈가 나간 사람도 꽤 되니 말이야. 그치만 그 앙칼진 것을 강제로 제압하고 피를 빨아 마실 때 오는 쾌감이란. 아아, 무엇과도 비교도 되지 않을 희열이지. 그러나 그보다 더 짜릿한 일이 뭔지 아나?”

휘익, 다시 한 번 허리띠가 허공에서 춤을 췄고 족장이 다가왔다.

“죽지 않을 만큼만 피를 빨아낸 사냥감들은 다시 정성스레 치료를 해 주고 널따란 우리에 가두어야 해. 무조건 널따란 우리여야 하지. 그래야 제가 우리에 갇힌지도 모르고 날뛸 테니까. 그 안이 완전히 제 세상이라고 여길 때 다시 그것을 잡아다가 목을 따 피를 빨아 먹지. 그땐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어서 처음보다 더욱 발버둥 칠 거야. 그러면 다시 치료를 해 풀어 두고 시간이 흐른 뒤 피를 빨고. 목이 따일 때마다 발버둥은 점점 고조되지만, 그것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씻은 듯이 사라지지. 피를 빨릴 날이 오면 그저 죽은 듯이 숨만 죽이고 있거든.”

휘익, 또 한 번.

“그렇지만 그때 포기하면 안 돼. 절대 안 돼지. 조금만 더 참고 그걸 더 반복하고 반복해서 어느 기점을 지나쳐야 고 앙칼진 것이 제 스스로 배를 까뒤집고 복종하는 거야. 아아, 그때가 되면 알아서 내 입까지 기어 와 제 목을 갖다 대지. 그때 느끼는 그 짜릿함! 크흑!”

“…….”

“그게 얼마나 눈 뒤집힐 정도로 즐거운지 넌 알고 있나? 응? 하아…… 여기 사는 것들 모두 내 손으로 그렇게 길들였다.”

“……미친 새끼.”

이예주가 씹듯이 중얼거리자 족장이 황홀한 표정으로 제 바지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족장의 앞섶이 불룩 솟아 있었다. 

그걸 본 그녀가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했다.

“아아…… 야생 밤비야, 더, 어디 한번 더 욕해 봐. 더, 더…….”

족장이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이예주가 바싹 긴장한 얼굴로 족장의 발걸음에 맞춰 뒤로 물러서며 눈으로 빠르게 거리 계산을 했다. 

남자들이 잊고 간 건지 족장의 등 뒤로 방문이 아직까지 열려 있는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바닥의 상처가 다시금 따끔따끔 아파 왔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미친 새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문으로 전력 질주를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예주는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불안한 눈으로 계속해서 틈을 찾았다. 

족장이 점점 제 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긴장으로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이윽고 족장과의 거리가 단 세네 걸음으로 좁혀졌을 때, 그녀가 불현듯 문을 향해 족장의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채찍이 허공을 날았다. 

휘익!

“그래. 더 해! 더 날뛰란 말이야!”

“아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바로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예주는 바닥을 뒹굴었다. 간발의 차로 허리띠가 귀 옆 바닥을 치고 공중에서 격렬하게 춤을 췄다. 

족장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띠를 든 팔을 다시 높이 쳐들었다.

“으흑!”

이예주가 헐레벌떡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재빠르게 발을 옮기려고 했지만 바늘 수십 개가 단번에 찌르는 듯한 발바닥의 통증에 얼굴을 고통스럽게 찡그리며 절뚝거렸다. 

휘익, 그새를 못 참고 족장이 허리띠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녀가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허리띠를 휘두르는 미친 족장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아악!”

살과 가죽이 맞닿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예주가 비명을 질렀다. 등을 간신히 가린 얇은 옷이 가죽 허리띠에 닿아 쉽게 찢어졌다.

 그렇게 얄팍한 천 쪼가리일진대 그녀의 연한 속살을 옷이 보호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이예주의 하얀 등허리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맞은 자국이 진하게 새겨졌다. 

후려 맞은 등에서 발바닥과 비교도 안 되는 시린 통증이 징하게 피어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구겨졌다.

“어서 더 도망가야지, 마이 스윗 하니. 응? 한 대 맞고 벌써 지친 건가?”

이런 식의 무력한 폭력에는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지라 그녀의 몸은 단 한 대의 타격에도 무섭도록 굳어졌다. 

충격으로 아득해진 정신에 잠시 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다시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그래, 그래야지. 흐흐흐.’ 하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예주가 다시금 문을 향해 박차를 가할 때였다. 

휘익, 철썩. 

“어흑!”

또 한 번 등을 강타하는 거센 매질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번엔 올라오는 고통을 감내할 새도 없이 이예주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족장이 연달아 그녀의 등에 허리띠를 내리쳤기 때문이다. 

철썩철썩. 

떡메를 내려치듯 거센 소리가 잇따르고, 고통으로 인해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됐다.

“후우…… 고작 이 정도로 나가떨어지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쩔컥, 이예주가 쓰러진 근처에 족장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내던졌다. 

느슨하게 손목 운동을 하며 족장이 아가리를 찢어질 듯 벌려 웃었다.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아악!”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이예주를 향해 날카로운 채찍질이 가해졌다. 

그녀가 뭍에 오른 고기처럼 퍼뜩퍼뜩 몸을 떨었다. 그 행동이 족장의 가학심을 더욱 부추겼다. 

휘익, 철퍽. 

휘익, 철퍽. 

허리띠가 오갈 때마다 연한 등살이 부풀어 올라 끝내 피가 튀었다. 

쏟아지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 이예주가 끊임없이 벗어나길 시도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순식간에 따라잡은 족장의 허리띠가 어김 없이 그녀의 몸을 타격했다. 

오히려 벗어나기 위해 꿈지럭거릴 때마다, 더 해 보라는 족장의 낄낄거림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후아, 후…… 벌써 기절한 건 아니지, 하니?”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족장의 매질이 멈췄을 때 이예주의 등허리는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끈적끈적하게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끈한 물들이 비릿한 냄새로 하여금 땀과는 다른 물질임을 상기시켰다. 

맞는 동안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하얗게 핏기가 가신 그녀의 손바닥 안에 손톱들이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반달 모양의 붉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예주의 등 뒤로 터벅터벅 족장이 다가왔다. 

뒤이어 그녀의 뒤에 쭈그려 앉은 족장이 송진(소나무나 잣나무에서 분비되는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그녀의 등에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리는 핏물을 손으로 우악스럽게 훑었다.

“으윽…….”

족장이 혀를 내빼어 제 손에 묻은 이예주의 피를 핥았다. 

비릿한 액체를 머금은 혀가 금세 피처럼 붉어졌다.

“싱싱한 피야. 일리야처럼 늙어 빠진 년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맛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족장이 비릿하게 낄낄거렸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을 웃어 대던 족장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허옇게 뒤집어진 눈을 하고 이예주의 등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 하지 마.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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