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알죠? 말해 줘요, 일리야.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는 거예요? 당신들이 검은 파편에게 죽지 않게 도와줄게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만 알려 줘요, 응?!”
“…….”
일리야는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며 흐느끼는 소리조차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예주는 다급함에 거칠게 일리야의 어깨를 뒤흔들며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제발 알려 줘요! 과거로,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는 거냐고!”
“……2세대들이 내뿜는 에너지의 파장으로 도시가 다시 새롭게 멈췄고…… 1세대들이 멈춘 시간과 2세대가 멈춘 시간이 미묘하게 어긋났어요. 가까스로 유지하던 힘의 균형이 그 어긋난 틈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져서…… 광장에 모여 있던 1세대들은 다들 처음에 힘을 사용했던 곳으로 돌아가 도시의 일부가 되었어요…….”
경련하던 일리야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일리야가 이예주를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물기 때문에 말갛게 빛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 속에 이예주의 얼굴이 비춰졌다. 질긴 미련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준 자신의 얼굴이 흉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제일 먼저 멈춘 시간을 흐르게 할 거예요. 절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 시간을 멈추지 않을 거야.”
“…….”
“팔족들이 힘을 썼던 장소로 돌아갔다는 말은, 과거로 돌아갔던 ‘때’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말 그대로 ‘곳’이요. 그 장소로 돌아갔다는 말이죠.”
일리야가 단호하게 이예주의 착각을 부정했다.
이번에는 이예주의 얼굴이 흐려졌다. 허물어지듯 구겨지는 표정으로 이예주가 울먹거렸다.
“그게…… 그게 뭔데요.”
“큰 에너지는 그보다 작은 에너지들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
“당신도 이곳으로 올 때 봤잖아요? 도시에 빨려 들어가서 동상처럼 굳어진 사람들.”
일리야의 말에 이예주의 얼굴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팔족의 근거지인 마을로 오기 전에 보았던 무수히 많은 수의 괴이쩍은 동상들.
건물 외벽에 빨려 들어가듯 손을 뻗던 남자의 동상과 소화기에 머리가 박혀 제 머리를 부여잡던 여자 동상.
그리고 곳곳의 시멘트에 하체가 모두 빨려 들어가 상체만 남은 참혹한 동상들까지.
일리야는 지금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던, 살아서 생존하던 인간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선대들은 단 한 순간에 도시로 빨려 들어가 도시의 일부가 돼 버렸어요. 그런 중요 사항들을 주지시켜 줄 선대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아무것도 모르던 2세대들 또한 선대들의 전철을 밟아갔어요. 우린 그래도 선대보다 힘이 강해서 그들보다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가 내뿜는 에너지들은 다시 도시 안에 차곡차곡 쌓였고 도시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우린 선대들처럼 짝을 지어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어요.”
“…….”
“2세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났죠. 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졌어요. 그쯤,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알 수 없는 눈족 장로들이 교류를 위해 찾아왔어요. 우리들은 인원 보충이 간절했기 때문에 눈족과의 결합을 원했어요. 눈족들의 요구는 의외로 간단했죠. 도시에 있는 세기말 용암 폭발 이전의 모든 문헌들을 한곳으로 모아라, 그리고 매년 눈족 장로들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내 동생의 아이인 현 족장도 그때 태어났어요.”
“…….”
“2세대들은 아이들이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대로 시간을 멈추는 데 동참하게 했어요.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힘을 보태면 파장의 틈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단 한 순간에 도시의 일부가 되는 아픔을 겪게 하지 않는 데에 모두 동참했고, 그 생각은 어느 정도 틀리지 않았어요.”
파장의 틈, 도시의 일부. 어느 하나 제대로 와 닿지 않는 소리들이었다.
이예주는 그저 하염없이 중얼거리는 일리야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선대들과 우리가 방출한 에너지가 그대로 쌓인 도시는 자력으로 시간을 완전히 멈췄어요. 힘이 고갈된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그 수는 드물 만큼 줄어들었어요. 도시가 자력으로 멈춘 탓에 우리도 한결 수월하게 버틸 만했죠. 시간족을 잡아먹으면 그 힘을 빼앗아 강해진다는 제 어미 말을 들은 현 족장이 내 동생을 산 채로 뜯어 먹기 전까지 말이에요!”
일리야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팔족들은 누구 하나 힘의 고갈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힘을 처음 썼던 장소로 되돌아가 도시의 일부가 되는 끔찍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 팔족들은 점점 근거지를 축소하고 또 축소했다.
그러던 와중 시간족을 잡아먹으면 힘을 빼앗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들이 눈족에게서부터 흘러나왔고, 상대적으로 약한 2세대를 산 채로 먹는 미친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한 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워서 강한 자들에게 힘을 몰아주자는 논리를 주장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 버렸고, 팔족들은 식인을 자행하는 현 족장파와 그것을 반대하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몇 팔족들이 도시 바깥으로 도망을 시도했으나, 이미 제 수명을 넘겨 버린 팔족들은 도시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분해되어 사라졌다.
족장을 포함한 포악한 남자들은 거세게 저항하는 제대로 된 남자들부터 차례대로 먹어 치웠다.
피에 물든 남자들은 저들끼리 현 족장을 추대했고, 그들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를 불러 모은 광장에서 산 채로 뜯어 먹었다.
미친 것을 넘어선 끔찍한 광기에 협소한 수의 팔족들은 점차 물들어 갔다.
잡아먹히든가 살기 위해 족장 파에 서든가. 그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변해 남은 것은 남자들에 비해 물리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들뿐이었다.
팔족의 수는 현 족장이 추대된 후 5년도 안 되어 반으로 줄었고, 10년째에는 백오십 명도 넘지 않는 작은 부족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동안 같은 종족을 모조리 먹어 치운 족장파 남자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눈족들이 저주받은 도시를 방문했다.
눈족 족장은 팔족 족장에게 굳이 아까운 머릿수를 줄이지 않고도 힘을 착취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족장은 두려움과 겁에 질린 여자들에게 살고 싶으면 정기적으로 피를 바치라고 명령했다.
마치 헌혈하는 것과 같이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피를 바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와 광기로 얼룩진 남자들은 점점 피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몸까지 취하길 원했다.
어느덧 뱀파이어처럼 여자들의 이곳저곳에 상흔을 내어 피를 빨아 먹는 괴벽이 하나의 놀이처럼 자리 잡았다.
미친놈들에게 더 이상 가족이란 울타리는 없었다. 패륜은 모두 저들끼리의 저열한 농담거리 중 하나로 전락했다.
겁탈당한 여자들 중 일부는 제 발로 도시를 걸어 나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 잔혹하고 끔찍한 소굴에 들어갔다 온 여자들은 엉망진창이 된 채 몇 날 며칠 고열에 시달렸다.
그것은 족장의 고모인 일리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로 지하 공간에서 돌아왔을 때, 일리야는 죽어 가는 팔족 여자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결정했다.
족장의 저택을 노려보는 일리야의 두 눈에서 피 같은 독기가 흘러나왔다.
“……땅을 지나치는 여자들을 납치하기 시작했어요. 일반 인간이든 시간족이든 납치부터 해서 무조건 힘을 가진 여자라 속이고 족장에게 상납했어요.”
일리야가 애절하고도 절박하게 이예주를 바라봤다.
경직된 채 일리야를 내려다보던 이예주의 눈이 천천히 혐오로 물들었다.
일리야는 애원하듯 그녀에게 타당성을 구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믿어 주세요. 절대 나쁜 의도로 여자들을 납치한 건 아니에요!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면 몇 번이고 우리들의 피만 바쳤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들은 아이가 필요했어요. 균형을 맞춰 줄 아이들이요! 이 도시는 붕괴되고 있어요. 히카톤은 자꾸만 도시 외곽을 부수고 있고 도시 면적은 줄어들고 있죠. 이대로 가다간 남은 여자들이 도시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검은 파편이 도시로 들어와 우리를 몰살할 거예요.”
“…….”
“우린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가 필요했어요. 우리들은 아이를 쉽게 가질 수 있는 몸이 아니니, 팔족의 아이를 가져 줄 여자들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이예주가 일리야를 차갑게 뿌리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사막에서 괴물에게 잡아먹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람은 그들이 힘이 없고 장애가 있어 같은 인간 무리에게 버려졌다고 했다.
같은 인간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유하는 인간 무리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 멈출 수 있는 팔족, 그리고 조롱이가 내던진 곡물 알갱이들을 아무런 자존감도 없이 주워 대며 구걸하던 도시 내의 또 다른 인간들.
“그 미친놈들이 아무 죄도 없는 여자들을 강간해서 아이를 배게 했나요. 그래서 만족할 만큼 아이가 태어나던가요?”
“…….”
이예주의 차가운 질책에 일리야의 두 동공이 다시 거칠게 흔들렸다.
“……혼혈 아이들은 대부분이 돌연변이였어요. 팔족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아이들은 다섯 명도 되지 않았죠.”
그 말을 내뱉던 일리야가 불쑥 자세를 달리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이예주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당신, 당신이 구원자죠? 미래를 보는 눈족이 예언했죠. 인간들을 구원할 사람이 과거에서 올 것이라고. 우린 마냥 시간의 여신이라고 믿었는데, 당신이었어. 신인류를 몰고, 검은 파편과 같이 다니는 당신. 당신이 구원자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속삭이는 일리야의 두 눈엔 이미 이성이 사그라져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미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구원자님! 저희 죄를 사하여 주세요. 잘못했어요. 과거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오신 것 다 알아요. 우리 모습에 실망하셔서 과거로 다시 돌아가시려는 거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일리야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입술이 얕게 벌어져 헐떡였다.
이예주는 금세 돌변한 일리야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여긴 모두 미친 인간들뿐이야.
너무 까마득한 옛적에 미쳐 버려서, 이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우릴 구원해 주실 거죠, 레이디? 아니, 예주 양. 아니, 구원자님!”
일리야가 찢어지는 소리로 이예주의 발치에 매달려 빌었다.
“제발, 제발!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말해요! 으흑,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요, 구원자님! 히카톤이 도시를 완전히 부시면 곧 검은 파편이 들이닥칠 거예요. 이대로 그 족장 놈들과 같은 취급을 당하며 죽을 순 없어! 우린 족장에게서 살려고 한 것밖에 죄가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제발……!”
“당신들이죠?”
이예주가 한 팔로 일리야의 지껄임을 막았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백, 수천 조각으로 찢어진 채 괴물의 입속으로 갈려 들어가던 엄마에게 애타게 손짓하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모습에 성치 않은 몸으로 혼비백산 도망가던 사람들.
이예주는 이를 악물었다.
“납치한 후 쓸모가 없어진 여자들과 그들이 낳은 돌연변이 아이들을 사막으로 내몬 장본인 말이에요.”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싸잡아서 괴물을 잠재우기 위해 먹이로 보낸 게 당신들 맞냐고.”
“그, 그건!”
일리야가 다시금 다급하게 변명을 시도했다.
“그건 우리 뜻이 아니에요, 구원자님! 족, 족장이. 나, 남자들이!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것들은……!”
“아니.”
이예주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도 똑같은 쓰레기야.”
“그게 아니에요, 구원자님! 우리는, 우리는……!”
“내가 본 여자애는 눈앞에서 엄마가 수백 조각으로 찢어졌어요. 당신 얘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당신이 돌덩이가 된 당신 아버지를 보았을 때보다 어린 나이였다는 것만은 확실해.”
“구원자님!”
일리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이예주는 울컥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날 구원자라고 부르지 마. 당신들은 그 아이의 엄마처럼 수백 번 찢겨 죽어도 모자라니까.”
“…….”
“내가 당신들을 위해 온 구원자라면. 그래서 이 빌어먹을 곳에 온 거라면!”
이예주가 결국 참지 못한 채 일리야에게서 거칠게 발을 떼어 냈다.
여자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