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이성을 되찾은 이예주가 명료한 눈으로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밝은 빛 아래 두 사람의 표정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사람 피나 마시는 미친놈들한테 쫓기다가 간신히 피했더니 이번엔 당신이야?”
이예주가 조용히 읊조렸다.
언뜻 보면 피곤에 가득 찌들어 보이기도 했다.
“대체 여기 인간들은 어떻게 돼먹었으면 툭 하면 살인에 식인질이야? 기본 상식도 없나? 엄마 아빠가 남한테 협박하고 뜯어 먹는 방법은 알려 주고, 도와 달라고 청할 땐 어떻게 하는지 안 알려 줘요?”
“…….”
“하, 참…… 진짜 쓰레기 같네. 그래도 좀 멀쩡한 인간들 만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 했더니. 이게 뭐야, 정말. 제대로 돼먹은 인간이라곤 하나도 없잖아…….”
이예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불쑥 일리야에게 초점을 맞췄다.
매서운 그녀의 눈초리에 여자가 긴장했다.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준 건 고마워요. 안 그래도 위로 가는 출구를 못 찾아서 헤매고 있던 차였는데 잘됐네. 그럼 난 이만 갈 테니까 당신 친구, 족장인지 뭔지 그 새끼 불러오려면 불러와. 난 당신 도움 따위 필요 없어.”
“그, 그게…….”
“난 당신이랑 달라서 지금 그렇게 절박하지도 않거든. 그러니까 불러오든 말든 네 맘대로 해. 난 당신 도움 없이도 혼자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으니까!”
이예주가 짓씹듯 내뱉고는 마치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여자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몸을 휙 틀었다.
불쾌한 얼굴로 방을 훑어보던 그녀는 바로 출구로 보이는 문을 찾았다.
일단 이 빌어먹을 집구석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장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 집구석에서 홀로 조롱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가서 람을 찾자. 그를 찾아 조롱이를 구출한 다음, 차라리 가지고 온 책을 이용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빠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가 걸릴 것 없다는 양 지체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제발 도와줘요!”
채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덥석 발이 붙잡혔다.
놀란 이예주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채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일리야의 모습이 보였다.
“우린 점점 죽어 가고 있어요. 아슬아슬하게 800년을 버텼지만, 미쳐 버린 족장 때문에 그것도 이제 끝났어요. 남자들이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 핥고, 피를 바치라면 바쳐야 해요. 살기 위해선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
“이 도시는 저주받았어요!”
일리야가 절규처럼 소리 질렀다. 이예주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이제 절박을 넘어 공포로 가득 찼다.
이예주는 일리야의 반전에 놀라는 한편, 그런 그녀의 공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멈춰 버린 용암 파도를 올려다보며 팔족 인간들만큼 불쌍한 인간들은 없다고 말했던 조롱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왜 팔족들이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이예주는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면 용암을 피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일 것이라 단순하게 치부했다.
그러나 시간을 멈춘 와중에 얼마든지 용암에도 녹지 않을 장소를 만들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팔족들은 굳이 1000년간이나 이 도시를 멈춘 상태로 이곳에서 살아왔다.
대충 눈치로 봐도 이런 유토피아를 버리고 위험을 무릅쓴 채 다른 대륙으로 이주한 인간들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일리야는 이런 둘도 없을 안전한 도시가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까지 요청한다.
왜?
족장의 저택으로 향하면서 본 마을의 여자들은 적지 않은 수였다.
족장을 포함한 미친놈들의 괴벽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저들끼리 살아도 되는데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도와 달라고 엎드려 빌기까지.
이예주는 일리야에게 잡힌 제 발을 빼내기 위해 발을 잡아당겼지만, 어찌나 세게 부여잡았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어쩌나 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일리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족장 놈한테 뭔 짓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아니, 알 것도 같네요.”
이예주가 아까 보았던 잔인한 피의 향연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저주를 받았으면 다른 땅으로 옮겨 가서 살아요. 다른 땅이라고 안전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미친놈들한테 피 빨리는 일은 없을 거…….”
“우린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그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질 테니까요.”
일리야의 간절한 눈이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예주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먼지라니. 왜 먼지가…….”
“남자들에게 핍박받을 때마다 수도 없이 시도해 보았죠. 한 발자국이라도 도시에서 벗어나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요. 버티지 못한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
“팔족들은 시간을 멈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커다란 힘을 가진 인간이라도 모든 시간을 멈출 순 없어요. 정확히는 자신에게 주워진 시간만 멈출 수 있는 거죠. 자신 외의 남의 시간까지 멈출 수는 없고요. 우리가 시간을 멈추는 일족이라고 알려진 건, 자신의 생체 시간을 멈추면서 내뿜은 능력 에너지의 파동으로 주위의 시간도 잠시 정지되어 보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시간의 속성은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고 주위 시간의 정지는 곧 풀리죠. 아무리 더 큰 에너지를 내뿜어 봤자 멈추는 건 우리 신체뿐이에요.”
팔족에 대한 새로운 사실 때문에 이예주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시간을 멈추면 멈추는 거지, 자신의 시간만 멈출 수 있다는 제약이 또 따른다니.
“흘러야 하는 시간을 무시한 채 계속 자신의 시간을 멈추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둘 때 그동안 흐른 세월의 반동이 자신에게 되돌아와요. 몸은 멈춘 시간만큼 순식간에 늙어 버리고, 원래의 수명까지 넘겨 버렸을 땐 뼛가루가 돼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 누구도 반동을 피할 순 없죠.”
“…….”
“이 도시에 나만큼 오래 살아남은 팔족 인간은 없어요. 하지만 모두들 적어도 200, 300년은 거뜬히 살아남았죠. 제일 마지막에 태어난 부족 내 사람조차 100년을 넘겼고요. 난 이미 시간을 멈춘 지 800년이 넘었어요. 인간의 평균 수명을 100세라고 친다면 다시 태어나도 여덟 번을 더 태어났을 만한 시간을 살아온 거예요.”
일리야가 허공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예주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800년을 살아왔다니. 그건 영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팔족 인간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이 도시에만 처박혀 있었단 말인가.
“왜…… 왜 능력을 멈추지 않았죠? 그리고 도시를 나가면 먼지가 돼서 사라진다니…… 자신들의 시간만 멈출 수 있다는 것과 도시를 나가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이예주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일리야의 말에서 오류를 지적했다.
그러나 일리야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까지 이예주가 악착같이 챙기고 있던 검은 책으로 눈길을 틀었다.
“……그 책을 봤군요.”
“책? 아…….”
이예주의 시선이 덩달아 일리야가 가리키는 검은 책으로 옮겨 갔다.
“그 책대로예요.”
“예?”
“그 책대로 세상이 멸망했고 용암이 덮치기 전, 우리 선대들은 모두 모여서 이 도시의 시간을 멈췄어요. 눈족이 검은 파편을 깨운 것을 전해 들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방법을 고안해 냈어요. 한 명만 능력을 발휘하면 곧 주위의 시간이 풀리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팔족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시간을 멈추면 도시 전체를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시 전체를 멈추는 일은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죠. 그렇지만 아버진 현명한 족장이었고 선대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의 말에 수긍했어요. 그들은 힘을 모아 뉴 힐튼을 멈췄죠.”
“족장? 하지만 시간을 멈춘 족장은 지금 족장의 할아버지라고…….”
다리족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예주가 멍하니 대꾸하자 일리야가 고갤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 족장은 내 남동생의 반쪽짜리 아이에요. 어미는 뉴 힐튼에 정찰 왔던 눈족 장로였죠. 그 여자한테서 무슨 소리를 전해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 어미가 죽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힘이 약해진 내 동생을 잡아먹더군요. 그쯤 동생은 이미 힘이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심약해 빠졌던 그 아이에게 반항 한번 못하고 잡아먹혔어요.”
“…….”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야기에 이예주가 헉, 숨을 들이마셨다.
아버지를 잡아먹은 패륜, 다리족 족장이었던 노인네가 다리가 없던 이유.
일리야는 어느덧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어요. 뉴 힐튼의 시간은 멈췄고 아버지의 판단 덕에 팔족들은 용암으로부터 무사했죠. 검은 파편의 분노에서 우리 팔족들의 안전만은 영원할 거라 믿었죠.”
“…….”
“그치만 세상에 영원이 어디 있나요. 아무리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해도 영원토록 쓸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어요. 아버진 완전히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계속해서 시간을 멈추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이 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사실을 간과했죠.”
“…….”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엄청난 실수를 한 걸지도 몰라요. 그때 다 죽었어야 했을 운명들을 힘을 쏟아부어 억지로 멈춰 뒀으니 이상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일리야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말을 잇기 어려운지 잠시 몸을 잘게 떨며 흐느꼈다.
“선대 팔족들은 계속해서 시간을 멈췄어요. 계속해서 에너지를 내뿜었죠. 그렇지만 그 에너지들이 바로 공중에서 분해되는 건 아니에요. 그것들의 파장이 도시 전체를 멈추는 것처럼, 에너지는 우리가 사는 도시 속에 계속해서 축적돼요. 그러나 반대로 선대 팔족들의 힘은 갈수록 고갈되어 갔죠. 그리고 도시에 축적되었던 에너지가 그들의 에너지를 능가했을 무렵, 제일 약한 팔족부터 처음 에너지를 내뿜었던 장소로 속절없이 되돌아갔어요.”
“…….”
“그렇게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팔족들의 도시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아 붕괴되기 시작했죠. 처음 그 괴현상을 발견한 팔족들은 당황했어요. 충격적이었죠. 자신들의 힘은 계속해서 고갈되고 있는데, 그 와중에 힘을 쓰는 사람마저 자꾸만 사라지니까. 서쪽 대륙 바깥에선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척이 없었고, 세상은 온통 용암으로 덮인 상태였죠. 멀쩡한 건 뉴 힐튼밖에 없었어요. 팔족 인간들은 계속해서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무분별하게 힘을 쓰다간 언젠가 나머지 사람들도 완전히 힘이 고갈되어 자신들이 간신히 멈춘 도시의 시간이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들은 다시 모여서 머리를 맞댔고, 빠진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짝을 지어 2세대를 낳기로 결정했어요.”
“…….”
“하지만 말했다시피 팔족의 능력은 자신의 시간을 멈추는 거예요. 자신의 시간을 멈춘다는 건 신체의 시간도 멈춘다는 뜻이죠. 멈춘 신체로 아이가 잘 생길 리 없어요. 난자가 배출되지 않는 팔족 여자와 정자의 생성이 멈춘 팔족 남자 사이에서 수정이 될 확률은 극히 적었고, 시간을 멈추기 직전 배란기였던 여성 같은 아주 특별한 경우만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어요. 드물게 뉴 힐튼에 와서 살아남은 다른 시간족들이 있었으나,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 늙어 버린 때였죠. 가까스로 짝을 지어 임신을 했지만 선대 팔족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아이들이 태어났어요.”
일리야는 힘없이 이예주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난 그렇게 태어난 2세대예요.”
“…….”
“2세대들이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계속해서 힘이 약한 인간들부터 차례로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안심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2세대들은 선대 팔족보다 월등하게 힘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비록 선대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2세대들이 성인이 되어 시간을 멈추는 데 힘을 보태면 다시 완벽하게 시간을 멈출 수 있다고 보았죠…….”
일리야의 말은 알아들을 것 같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예주는 점점 더 아파 오는 머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2세대들은 성인이 되었어요.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2세대 여자들은 모두 난자 배출을 촉진시키는 약을 먹은 상태로 광장에 모였죠. 아버지의 지시하에 2세대들은 에너지를 방출했어요. 그런데…….”
“…….”
“그런데 그 순간……!”
빠르게 말을 쏟아 내던 일리야의 두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초점 없는 동공이 공포에 질려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아, 아아…….”
“이, 일리야.”
“아아…… 난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일리야는 이미 자신이 말하는 그 당시로 돌아간 듯 보였다.
이예주가 걱정스럽게 일리야를 흔들었지만, 그녀의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실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붉게 충혈된 일리야의 눈동자에서 한 가닥의 눈물이 줄을 지으며 떨어졌다.
“아버지…… 아버지가 광장에서…… 처음 힘을 썼던 장소로…… 줄리 이모가…… 옆집의 데이브 아저씨가…… 힘을 썼던 장소로…….”
일리야가 숨 막히는 소리로 속삭였다.
이예주는 문득 아까부터 일리야가 되뇌던 소리에 번뜩 눈을 치켜떴다.
일리야의 시점으로 100년 전에 시간을 멈췄던 팔족 인간들이, 도시에 축적된 에너지가 팔족의 힘을 능가하자 힘을 썼던 장소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혹시 과거로 돌아갔다는 소리가 아닐까?
힘을 썼던 과거의 장소로, 과거로. 이예주가 불현듯 뇌리를 가르는 생각에 정신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일리야의 어깨를 잡아챘다.
“혹시 힘을 썼던 장소로 되돌아갔단 말이요. 과거로 돌아갔다는 거 맞죠? 시간을 멈췄던 때로요. 과거로! 그래서 사람들이 사라진 거 맞죠? 네?!”
“아,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