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7)화 (57/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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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퍼렇게 질린 여자가 횃불 밑에서 후다닥 달려갔다. 

여자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지 얼마 안 돼, 입에 피 칠을 한 남자들이 뒤를 이어 튀어나왔다.

“잡아, 잡아!”

비루한 체력 탓에 남자 무리가 모두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에야 간신히 모서리에 도착한 금발의 족장이 파리한 얼굴로 괴성을 질렀다. 

어두운 통로를 타고 그의 신경질적인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새 계집이야, 놓치면 안 돼! 저 계집은 내 꺼야! 내꺼어어!”

숨이 턱에 차올라서 미친 듯이 도망가고 있던 이예주는 악에 차서 메아리치는 족장 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뒤돌아볼 새도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헉, 헉!”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밀 때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튀어나오는 듯했고, 그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거친 바닥 때문에 발바닥이 까졌는지 디딜 때마다 억 소리 나게 통증이 느껴졌다. 

비릿한 잔향이 코에서 가시지 않았다. 

잡히면 죽는다. 

그 여자들과 같은 일, 혹은 더 심한 짓을 당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다시 오른쪽으로 휙 꺾으며 뒤쫓는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간발의 차이로 벗어난 이예주는 흡, 숨을 들이쉬었다. 

그나마 길이 미로처럼 이곳저곳 꺾여 있어서 다행이지, 일자로 되어 있는 복도였다면 채 도망도 못하고 잡혔을 게 분명했다. 

머리가 쭈뼛쭈뼛해지고 방광이 터질 것처럼 아랫배가 조여 오는 탓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좌우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돌고 또 돌았기에 이미 여신 닮은 여자를 따라왔던 출구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 서! 쥐새끼 같은 계집!”

길은 어둡고 축축했다. 발바닥의 통증은 자꾸만 더 심해지고, 습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흐흑, 헉, 흐흡, 흐흑!”

온몸을 꿰뚫는 두려움에 눈물이 치솟아 자꾸만 눈앞을 가렸다. 다리가 후들후들했다. 

남자들의 커다란 고함 소리에 휘청거리다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어금니가 깨져도 모르겠단 심정으로 거세게 이를 악물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지금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으흑!”

타다다닥!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지르며 이예주가 제 앞에 펼쳐진 양 갈림길에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무작정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남자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꽤 멀었던 거리도 거의 좁혀졌다. 

틈 하나 없이 꺾어지기만 하는 이 미로 같은 곳에서 과연 저 미친놈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따돌리기 전에 과연 제 형편없는 체력이 견뎌 줄까. 지금도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이러다가 곧 잡힌다, 곧. 보이지 않는 손이 제 목을 조르는 것 같다고 느끼며 그녀가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꺾었다. 

“으윽.”

반동 때문에 중심을 잡느라 오른쪽 발을 세게 내린 탓에 눈앞이 팽그르르할 정도의 고통이 그녀의 종아리를 타고 뇌까지 전달되었다. 

남자들이 지척까지 쫓아왔지만 이예주는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벽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발을 한 발 뗄 때마다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그녀는 벽을 잡고 전진했다.

“어디, 어디야!”

“오른쪽이다! 오른쪽으로 한 번 더 틀었다!”

모퉁이 바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통로 끝, 왼쪽으로 꺾는 길에 다다른 이예주의 가슴이 허물어졌다. 

상체의 반은 벽에 기대야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상태.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도망칠 수 있을까. 그것도 절뚝이는 걸음으로. 

타다다닥, 남자들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뇌리를 강타하는 공포에 그녀가 입술을 터져라 깨물던 그때였다. 

어두운 모퉁이 너머에서 하얀 손이 쑥 나와 벽을 집고 있던 이예주의 한쪽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으허억!”

급작스런 손길에 반사적으로 괴상한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하얀 손이 강한 힘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되어 모퉁이로 끌려갔다. 

직각으로 되어 있는 모서리를 돌자마자 체구가 작은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작은 틈이 있었다. 

틈 너머는 너무나도 좁아서 온통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그녀가 떡 벌린 입을 채 다물지도 못했을 때.

“으아악!”

이예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틈 속으로 몸이 잔뜩 구겨진 채 끌려 들어갔다. 

“여기다!”

그녀의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간신히 틈 속으로 사라졌을 무렵, 간발의 차로 횃불을 든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몇 분 후, 그 뒤를 숨넘어갈 듯 헉헉거리며 쫓아온 족장이 남자 무리를 거침없이 밀치고 이예주가 방금 전 끌려갔던 자리에 도달했다.

“헤엑, 헥! 어디! 어디 있느냐!”

“그, 그게…… 방금 이쪽으로 사라진 것 확인했는디유!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어디 갔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말듯 아른거리던 계집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사라졌다. 

남자들이 이리저리 횃불을 들어 보였으나, 더 이상 길이 이어져 있지 않았다. 벽으로 막혀 있는 막다른 길이었다. 

텅 빈 통로는 어둠만이 음산하게 도사리고 있을 뿐, 작은 계집의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오우 쉣! 테뤄러으브르르!”

거친 숨 때문에 한껏 더 심하게 혀가 말려 들어간 족장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걷어차다가 이내 통증으로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 틈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족장이 옆 벽에 균열처럼 간신히 나 있는 틈을 가리키며 남자 무리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좁은뎁쇼? 몸뚱아리는커녕 대가리도 못 밀어 넣겠소.”

탁자 위에서 여자를 겁간하던 덩치 큰 남자가 틈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으며 생각 없이 지껄였다. 

두껍고 우락부락한 그의 팔이 어깨 부분에 걸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고말고. 어떻게 이 좁은 틈에 숨겠어. 안 그런가?”

작은 이예주와 자신들의 덩치 차이까지 생각지 못한 그들은 저마다 덩치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좁은 틈을 보며 족장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족장, 그 계집은 어디든 저택 밖으로는 도망 못 칠 테니 일단 돌아가서 덜 먹은 계집들이나 맛봅시다, 잉?”

“맞소, 맞소! 난 아직 피 한 방울도 입에 못 댔단 말이요!”

“간만의 포식인데…….”

남자들이 멍청한 소리를 내뱉고 느물느물 웃어 대었다. 그러자 족장이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그 한심한 것들을 돌아보았다. 

“닥쳐! 어떤 힘을 가진 계집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나!”

족장이 희번덕하게 눈깔을 뒤집으며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혹시 중간에 다른 쪽으로 꺾었을지 모르니 샅샅이 뒤져. 어서!”

이예주는 틈새 깊숙이 들어갔다. 

어찌나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인지 반항 한 번 못하고 손목이 붙잡혀 속절없이 끌려갔다. 

너무 놀라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벽에 어깨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정신없이 질질 끌려가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환해졌다. 

어두운 곳에 익숙해져 있던 이예주의 눈이 환한 불을 보자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그 짧은 사이, 자신은 지하 동굴 같은 곳에서 벗어나 어떤 방에 도착해 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방인 듯 방 안엔 안 쓰는 가구들이 흰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머리로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붙잡혔던 손목이 맥없이 풀렸다. 

밝은 빛에 따갑던 눈이 점점 평온해질 무렵,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비밀 통로로 자신을 끌고 들어온 인물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좁은 통로를 통과하느라 헝클어진 금발 머리에 지저분하게 더럽혀진 야스러운 옷.

“허억, 허억…… 일리야?”

“쉿.”

낯익은 얼굴에 이예주가 제 눈을 의심할 적, 자신을 끌고 온 여자가 번개처럼 다가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침묵을 강요했다. 

이예주가 놀라 휘둥그렇게 눈을 치켜뜨자 곧바로 입을 풀어 준 여자는 서둘러 그녀의 뒤쪽으로 가서 커다란 책장을 밀어 그들이 통과한 틈을 막았다. 

드륵, 드르르륵. 바닥 긁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책장이 움직였다. 쿠

궁, 얼마 안 가 마치 엇갈려 있던 블록들이 제자리를 맞추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려오면서 틈이 완전히 막혔다. 

이예주는 그때까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갈비뼈를 두들겨 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여자는 틈이 완전히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책장에 바짝 붙어 있었다. 

누군가 틈을 타고 그들을 쫓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일리야, 대체 여긴…… 아니, 아까 그, 그 사람들…… 그 사람들. 조, 족장……!”

이예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가 있는 방을 산만하게 훑으며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일리야가 책장에서 몸을 떼고 이예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전에 없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공포의 여운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이예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자가 이윽고 입을 떼었다.

“여긴 비밀 통로와 연결돼 있는 유일한 방이에요. 청소를 하다 우연히 발견했을 정도로 쓰는 일이 없는 외진 방입니다. 이곳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솔직히 당신이 이 방이 있는 쪽으로 도망쳐 올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정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당장은 안전할 거예요.”

당장은 안전하다는 소리에 허옇게 들떠 있던 이예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잔뜩 담긴 경계심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대체 아까 그 사람들…… 그 사람들 뭐예요? 여자 피를 먹고 있었어요. 채, 채찍으로 내리쳐서 여자들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고요!”

“그러게 방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잠이나 자라고 했지 않나요.”

일리야가 비명 같은 이예주의 질문을 짧게 일축했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마치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한심함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팔족의 비밀을 들켰으니 이젠 정말 별수가 없네요. 당신의 우매한 행동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최악으로 치닫다니……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레이디. 아니, 예주 양.”

“……이, 일리야?”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할게요. 당신이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 나갈 방법은 나와 거래를 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당신은 거래에 협상을 할 수도, 조건을 제시할 수도 없어요. 당신은 무조건 들어줘야 해요. 왜냐면 당신이 거절할 경우 나는 바로 족장과 그 패거리 놈들을 불러올 거니까요.”

마치 기계처럼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일리야의 말에 이예주는 멍한 얼굴을 고수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를 하기는커녕 자신이 있는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을 새고 미친 듯이 뛰어다녀서 그런가. 머리가 온통 멍하고 온몸이 무거웠다. 

아직도 진정이 안 된 것처럼 심장이 가파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었다. 

이예주는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의 굳은 입매를 쳐다보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밝은 불빛 아래 드러난 제 몸뚱아리는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그 와중에 얼마나 필사적으로 검은 책을 챙겨 온 건지 오른손에 꽉 쥐어진 책의 검은 표지에 깊은 손톱자국들이 박혀 있었다. 

발톱까지 시꺼멓게 떼가 묻어 있는 더러운 발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이예주는 간신히 떨리던 몸이 진정된 후에야 비로소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의 입매는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절대로 협상은 없을 거란 말처럼 고집스러운 그녀의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뇌 속에 찬바람이 들어차는 것처럼 머리가 점점 아파 왔다.

“그러니까…….”

그녀가 당겨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조용히 되물었다.

“내가 당신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줘야 이 미친놈들의 소굴에서 나갈 수 있다고요……?”

“그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리야가 답했다. 

그 목소리가 꽤 다급해 보여서 남이 들으면 쫓기고 있던 것은 이예주가 아닌 일리야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당신이 할 일은 딱 한 가지예요. 검은 파편이 팔족 여자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

“…….” 

“팔족 전체를 죽여 버려도 상관없어요. 다만 우리들은, 우리 여자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까요. 우린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요. 모든 건 저 미친 족장이 한 짓거리니까. 우리들도 충분히 당했어. 그러니까 우리들까지 싸잡아서 죽이지 말라는 거예요!”

일리야가 불현듯 이예주의 양 어깨를 세게 부여잡았다. 

놀란 이예주가 휘둥그런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협박조로 몰아붙이던 것과는 다르게 여자의 얼굴은 절박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조류인 신인류랑 검은색 남자와 같이 다니는 괴상한 옷을 입은 여자. 당신 맞죠?”

“……그, 그건…….”

“내 정보망은 피해 갈 수 없어. 당신 맞아. 검은 파편과 이곳까지 온 당신! 당신만이!”

“…….”

“당신만이 우리를 살려 줄 수 있어요. 아니, 족장한테서 살고 싶으면 당신은 우릴 도와야 돼. 아니, 도운다고 말해. 족장을 부르기 전에 당장 말해요. 어서!”

어깨를 잡은 일리야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입을 벌리면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어깨를 압박하는 아귀힘에 이예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일리야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녀는 일리야의 손을 저에게서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쉬이 제 어깨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어서 결국엔 억지로 여자의 손을 어깨에서 떼었다. 

일리야의 손이 마지못해 떨어져 나갔지만 잡은 손목을 바로 놓지는 않았다. 

무뚝뚝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는 일리야의 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 저를 내려다보던 일리야처럼 이제는 이예주의 입매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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