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6)화 (56/319)

맨발에 닿는 까슬까슬함에 이예주는 운동화를 신고 오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발바닥이 얼마나 시꺼메져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 순간 무섭도록 잔뜩 피어 있는 검은 곰팡이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던 그녀의 손전등 빛에 비춰진 흰색 옷자락이 귀신처럼 스윽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아이씨, 저기요! 좀 천천히 좀 가요!”

무섭긴 저나 이예주나 매한가지일 텐데 손잡고 사이좋게 같이 거닐면 되지, 뭘 저렇게 혼자 바쁜 척은 다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닥이 매끄럽지 않고 더러워 보여 까치발로 잠깐 걸어 보았지만 여자를 쫓느라 이내 포기했다. 

이예주는 여자가 사라진 모퉁이를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여자는 잡을라 치면 계속해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이예주 또한 꽤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는 것 같은데, 모퉁이를 돌면 여자는 다시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흰색 옷을 입은 데다 속도도 빠른 게 꼭 귀신과도 같아서 괜히 오싹해졌다. 

가끔 양 갈림길도 나왔지만 여자는 익숙한 곳을 걷는 듯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홱홱 몸을 전환했다. 

미로처럼 어지러운 구조라 이예주 혼자라면 길을 잃기 십상인 곳이었다. 

여자가 하도 빨리 걸어 실제로 길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꼭 그녀를 기다려 주듯 흰색 옷자락을 반드시 휘날렸다. 

때문에 이예주는 중간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죽자 살자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 동안 여자를 쫓아가다 보니 어느덧 손전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주위가 환해져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인 듯 벽 중간에 뜨문뜨문 횃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주 고전적이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헉, 헉…… 저기요. 잘 따라갈 테니까 좀 천천히…….”

“흐으……!”

쉴 틈 없이 걸어 댄 탓에 거칠게 헐떡이며 애원하던 이예주는 불현듯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말을 멈췄다. 

그 여자의 목소린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꽤 먼 곳에서 들려오듯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예주의 얼굴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는 등이 걸려 있는 오른쪽 벽에 최대한 몸을 붙이면서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불 아래 있으면 쉽게 주변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환했지만, 워낙에 횃불이 커다란 간격을 두고 걸려 있어 횃불과 횃불 사이는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줄행랑을 칠 수 있도록 발에 잔뜩 힘을 준 채 그녀는 천천히 앞에 있는 양 갈림길에서 오른 쪽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앞서 가던 여자의 금발 머리가 휘날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 흐읍, 흐윽…….”

오른쪽으로 몸을 틀자 희미하게 나던 신음 소리가 더 커졌다. 여러 명의 소리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듯했다. 

한 명에게서 나던 것이 메아리쳐서 돌아왔다고 치기에는 높낮이가 꽤 많이 달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발을 옮겼다. 

“흐으, 흐윽…….”

다시 한 번 들려오는 흐느낌과 같은 소리에 이예주가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긴장해서 식은땀이 자꾸만 비죽비죽 흘러나왔고 계속해서 발걸음이 늦춰졌다. 

길의 끝은 왼쪽으로 꺾는 것 딱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의 갈림길은 없었다. 

걸음을 뗄수록 더욱더 커지는 소리로 보건대, 왼쪽으로 꺾음과 동시에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길을 가로질러 왼쪽 벽에 달라붙었다. 

듣기 싫은 신음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들으며 그녀는 본의 아니게 점점 신음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아흑, 아아……!”

신음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몸을 점령한 아픔에 힘없이 내는 소리, 무거운 무언가를 잡아끌거나 들어 올릴 때 내는 굵직한 소리. 

그리고 마치 지금 들리는 소리처럼 어딘지 모르게 질척한……. 

묘한 상상을 떠올리며 모퉁이에 도달했을 무렵, 이예주는 벼락같이 들리는 비명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악!”

고통에 시달린 비명 소리가 돌로 만들어진 통로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혹시 여자가 무슨 일을 당한 걸까. 

허겁지겁 모퉁이에 달라붙어 고개를 빼꼼 내민 이예주는 앞에 보이는 지옥도에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쫘악! 

그녀를 계속해서 유인했던 여신을 닮은 여자는 없었다. 

대신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휘익 하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 채찍이 손목에 사슬을 감은 채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여자의 알몸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

“아, 아흑!”

여자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쩍 하고 상처가 벌어지더니 시뻘건 피가 질질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알몸의 여성 앞에 채찍을 들고 서 있던 남자 세 명이 광기 어린 눈을 허옇게 번뜩이며 여자에게 달려들어, 여자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를 성수처럼 빨아먹었다. 

그 옆의 탁자엔 작은 덩치의 여자가 기절하듯 엎어져 있었고, 그 위에 커다란 남자 한 명이 개처럼 달라붙어 헉헉거리며 거세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끼익 끼익, 남자의 힘에 몰린 탁자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철퍽철퍽하고 살 부딪치는 질척한 소리와 여자의 괴로운 신음 소리가 탁자와 박자를 맞추듯 연달아 들려왔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여자의 입에서 피거품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맞아서 찔끔 나온 상처가 아니라 내장부터 잘못된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온 피가 탁자를 타고 뚝뚝 흘러 그 밑에 대어 놓은 양동이에 흘러내렸다. 

탁자 옆쪽에 한 여자가 피투성이인 알몸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채찍질이 끝난 후 졸도한 것 같았지만, 무의식적으로도 괴로운 건지 그녀의 입에서 계속 괴로운 비명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아악! 어흑!”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이예주의 시선이 다시 채찍질당하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세 명의 남자 말고도 기다리는 중인 듯 대여섯 명의 남자가 한쪽 구석에서 그 꼴을 보며 낄낄 대고 있었다. 

“헤헥, 족장님. 오늘은 왜 더 드시지 않으시구요?”

문득 들려오는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가 휙 시선을 돌렸다. 

구석에서 낄낄대던 남자 하나가 채찍질 당하는 여자를 손가락질하며 느물느물 웃었다. 

그러자 익숙한 버터 바른 목소리가 답했다. 

족장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인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굉장히 디스가스팅하군. 기분이 좋지 않아.”

“에에, 족장님 아직도 샌님처럼 인간 음식을 드시는 거유? 거참, 이런 별미를 두고 왜 그런 계집들이나 먹는 쓰레기를…….”

“그건 바로 네놈들이 처먹는 별미를 제공하기 위해서야. 오늘 새 계집이 들어왔다.”

“오오, 정말이십니까? 안 그래도 이 계집들도 물려 가는 마당에 다행이네요.”

또 다른 남자 하나가 족장의 말에 대답하며 별안간 옆에 널브러져 있던 피투성이 여자를 발로 퍽 걷어찼다. 

으으, 여자의 입에서 다시 얕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다행이구말구! 흐흐 족장님, 새 계집은 어때 보이십니까? 설마 우리 몰래 먼저 드신 건 아니지유?”

“새 계집, 어리고 꽤 반반해. 성깔도 있어 보이고. 일리야 말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던데.”

“허억! 무슨 힘이유?!”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에 족장에게 쏠렸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하던 남자들과 탁자 위의 여자에게 달라붙어 있던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글쎄. 차차 밝혀지겠지. 뭔가 있는 계집인 건 확실해. 깜찍하게도 신인류를 데리고 다니더군. 그것도 검은 파편의 힘이 꽤 강하게 깃든 신인류를 말이야. 그놈을 잠재우기 위해서 마취 향을 몇 개나 피워 댔는지. 아아, 아직도 머리가 아파. 지긋지긋해.”

“그 신인류는 어떻게 했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신인류라면 환장하는 인간 놈들에게 팔아먹으려고 지하에 가둬 뒀지. 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처자빠져서 잘 자고 있겠군. 하여간 멍청한 동물 새끼들이란!” 

족장의 말에 남자들이 다 함께 낄낄거렸다. 이예주는 족장이 말한 신인류가 조롱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흐읍!’ 하고 신음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와 그녀는 황급히 손을 올려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무슨 소리가 났는데?”

족장이 갑작스레 손을 휙 들어 올려 남자들의 웃음을 멈췄다. 

들킨 건가 싶어서 순간 이예주는 온몸의 핏기가 싸악 가셨다.

“껄껄, 소리는 무슨 소리요, 족장. 나가 떡 치는 소리겄지!”

그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탁자 위의 여자에게 붙어 있던 커다란 남자가 낄낄대면서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나머지 남자들 또한 다시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족장의 옆에 서 있던 한 남자가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놈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와 탁자를 적시고 뚝뚝 떨어진 피를 받은 양동이를 번쩍 들더니 그대로 그 피를 꿀떡꿀떡 삼키기 시작했다.

“캬아! 그래도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이라고 아직은 쓸 만하네그려!”

“어이, 자네! 혼자 다 처먹지 말고 좀 나누자고, 나눠! 안 그래도 요즘 계집년들 피가 모자라 죽을 판에…….”

나눠! 피! 피를 줘! 크크큭, 크하하하, 하하하!

입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든 악귀들이 낄낄거리며 건배를 외쳤다. 

그 지옥 같은 곳 근처, 꺾어진 모서리에 바짝 붙은 이예주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서 있었다. 

흐흡…… 도망가야 돼. 당장 도망가야 돼, 이예주. 

그녀가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계속해서 삼키며 계속해서 도망을 연달아 외웠다. 

그러나 휴대폰 진동하듯 달달달 떨리는 몸이 좀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끔찍했다. 여자의 몸에서, 입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에서. 질질 흐르는 피 냄새가 계속해서 코를 역하게 찔러 댔다. 

해일처럼 몸을 짓누르는 역겨움과 두려움에 질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땀, 눈물, 콧물 가릴 것 없이 체액들로 온통 범벅이었다. 

이곳에 들어섰을 때처럼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당장 이 미친 곳에서 나가고 싶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소리가 날 것 같아서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아…….”

“아악! 끄억!”

“흑, 흐으, 흐응…….”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자들의 신음 소리, 그리고 마을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남자들의 웃음소리. 

몸을 점령한 커다란 공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입을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잠깐이라도 입에서 손을 떼면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심장 소리가 저들에게 들릴 정도로 쿵쾅쿵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고동쳤다. 

걸리면 죽는다. 죽으면 안 돼. 으흑, 흐흡. 

그녀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계속해서 기척을 줄이기를 노력하던 그때였다. 

탁, 타다닥! 

이예주의 뒤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거세게 발 구르는 소리가 지하 통로 안에 텅텅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시체처럼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탁, 타닥! 

또 한 번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저 멀리 통로 끝 모서리에서 하얀 옷자락이 사르륵 사라졌다. 

그녀가 죽자 살자 쫓아온 여자였다. 

자신을 이 끔찍하고 역겨운 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채 여신을 닮은 여자는 깔끔하게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예주는 남자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쥐새끼가 숨어 들어온 모양인데. 이봐! 얼른 확인해 봐!”

족장이 명령했다. 

뒤를 향했던 이예주의 절박한 얼굴이 빛이 새어 나오는 앞을 향해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열려 있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그녀가 있는 모서리까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입에 피 칠을 한 악귀 같은 남자의 얼굴이 모서리에서 스윽 나타나는 순간.

“누구…… 악!”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남자의 얼굴에 냅다 던졌다. 

손전등의 유리 부분이 남자의 머리통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기습 공격을 당한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잡아! 침입자다! 잡아!”

“어떤 망할 놈이여……!”

남자들의 험악한 욕설과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고.

“흐, 흐흑!”

이예주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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