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5)화 (55/319)

이윽고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예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떨어진 책을 주웠다. 

그와 동시에 ‘타다닥!’ 또다시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정신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휙, 무언가가 책장과 책장 사이의 통로를 지나쳤다. 

이번엔 분명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발견했다. 

이예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거, 거기 누구 있어요?”

“…….”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공책만큼 얇고 작은 검은색 책을 품에 꽉 껴안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16번 책장을 옆에 끼고 천천히 다음 책장과의 통로에 도달했을 때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그녀가 홱 통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어…….”

통로는 텅 비어 있었다. 

책장들만 굳건하게 서 있을 뿐, 까마득한 1번 책장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들은 것은 절대로 환청이 아니었는데. 두 번이나 환청을 들을 리도 없고. 

겁에 질린 이예주의 얼굴이 점점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원룸에 혼자 있을 때 자주 했던 것처럼 그녀가 센 척을 했다. 

그러나 역시 서재는 그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는 양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착각인 것일까. 서재로 몰래 들어오느라 극도로 긴장했기에 정말 환청을 들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들은 것이다. 이예주는 텅 빈 통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믿기로 했는데. 

타타다닥! 

오른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녀가 기겁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휙, 이번에는 환청, 환각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목격했다. 

금빛 머리가 넘실넘실 이예주가 서 있는 반대편 쪽의 통로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심장이 발아래로 쿵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일리야?”

“…….”

“일리야예요?”

제가 아는 유일한 금색 머리를 떠올리며 그녀가 천천히 반대편 통로를 향해 걸었다. 

일리야가 아니면 그것대로 난처해지겠지만, 만약 일리야가 맞다면 그만큼 낭패가 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이나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 정말 왜 이렇게 운이 안 따라 주는 걸까. 

인생 참 뭐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예주는 필사적으로 변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일리야 그 속 모를 여자가 자신의 말에 납득해 줄까.

“일리야, 저기 일단 미안해요.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전등까지 줬는데…….”

또 다른 책장을 넘어 반대편 책장에 도착했을 때쯤 이예주가 어렵사리 입을 떼며 몸을 틀었다. 

변명은 찬찬히 생각하고 무작정 사과부터 할 생각이었던 그녀는 앞에 보이는 통로의 모습에 불현듯 말을 멈췄다.

“어…….”

통로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이쪽으로 지나간 것 같은데. 뒤따라서 걸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일리야는 없었다. 

이게 무슨……. 

투다닥! 

그때 또다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엔 오른쪽이었다. 자신이 뒤쫓는 사이 저기까지 갈 정도면 엄청나게 빨리 움직인 셈이다. 

말을 듣지 않은 자신에게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일리야라고 확신한 이예주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터덜터덜 그녀의 뒤를 쫓아 다시금 책장을 따라 걸었다.

“일리야, 화가 많이 난 건 이해해요. 저 같아도 이렇게 말 안 듣는 손님이라면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그치만 제게도 사정이…….”

다시 일리야가 뛰어간 반대편 통로까지 도착한 이예주는 이번엔 저가 있는 16번 줄에서 4칸 정도 떨어진, 12번 줄로 추정되는 통로에 멀찍이 서 있는 금발을 발견했다.

“일리야? 일리야, 저기 잠시만……!”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금발 머리는 이예주가 통로로 몸을 틀자마자 냉정하게 뒤로 돌아 다시 책장 사이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아오, 저게! 

사람 말도 듣지 않고 등을 돌린 일리야에게 불쑥 짜증이 솟았지만 제가 잘못한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입 밖으로 불평을 토해 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을 좀 빨리해서 일리야의 뒤를 쫓아가며 잘못을 빌 뿐이었다. 

“일리야, 제가 진짜 다 잘못했어요. 저랑 잠시 말 좀…….”

뒤를 다 따라잡은 것 같으면 일리야는 어느새 멀찍이 반대편 통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예주의 부름을 듣기도 전에 팽 하니 몸을 돌려 떠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계속해서 그러한 행동이 반복되자 이예주는 이젠 휙 지나가는 흰색 물체만 발견해도 무작정 따라가고 보았다. 

“일리야, 제발요.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발 제 말 좀……! 하…….”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치나! 다시 여자를 놓친 이예주는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이를 득득 갈았다. 

변명하기도 쫓아가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잘못이고 나발이고 이제 제발 방으로 들어가서 잠 좀 자고 싶은데. 

단단히 삐진 금발 여자는 저를 놓아줄 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휙 지나가는 흰색 옷자락을 따라 지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일리야가 아까 흰색 옷을 입고 있었던가? 

터덜터덜 걷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도시에서 헤매던 이예주와 조롱이를 데리러 왔을 땐 분명 살구색에 가까운 옷이었지, 흰색 옷은 아니었다. 

그다음 자신의 시중을 들고 저녁을 먹을 땐 파란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아까 전 3층으로 몰래 올라오다 맞닥뜨린 일리야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흰 옷이었나? 어둠 때문에 정확히 무슨 색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일리야의 인상착의에 대해서 심도 있게 떠올리던 이예주는 이내 깊게 생각하길 포기했다. 

에이 뭐, 그사이 갈아입었겠지. 지금은 삐진 일리야를 따라가기도 벅차다. 

그녀는 그렇게 여자의 뒤를 쫓아 저도 모르는 사이 더 깊숙한 서재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리야, 제가 진짜 죽을죄를 지었어요. 이제 그만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자신은 문과 반대편인 서재 끝에 와 있는 듯싶었다. 

여전히 주위는 눈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책, 책, 책뿐이었으나 뭔가 아까 있던 곳과는 공기가 달랐다. 

문 근처는 약간 텁텁하고 종이 냄새나는 일반 도서관 냄새라면 반대쪽은 뭐랄까, 공기가 차갑고 무겁다. 

어디 창문이라도 열어 놔서 찬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빠지는 냄새다.

눈앞에서 휙 지나치는 일리야를 놓친 이예주가 불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려 거세게 외쳤다.

“일리야! 그만 좀……!”

서재의 끝에 다다른 채 책장의 모퉁이를 따라 짜증스럽게 몸을 틀던 이예주가 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우뚝 멈춰 섰다. 

공기가 차가워진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벽면에 붙은 책장이 있어야 할 서재 끝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네모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쪽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듯했다. 

구멍 너머로 내려가는 방향의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 위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금발 여자가 한 칸 내려서 있었다. 

여자는 일리야가 아니었다.

“다, 당신은…….”

이예주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떡 벌렸다. 

혹시 제가 책을 너무 몰입해서 본 탓에 환각을 보고 있나.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어 한쪽 손을 들어 눈을 거세게 비비고 여러 번 감았다 떴다. 

그래도 여자는 사라지지 않고 변함없었다. 

묘한 표정으로 말없이 이예주를 바라보고 있는 눈.

“……당신!”

이예주는 허겁지겁 들고 있던 검은색 책을 펼쳐 들었다. 

정확히 2쪽에 여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무나도 정교하게 그려져서 실존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여자. 

위대한 여신이란 시간이!

“대박.”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지? 

동화 속에 나온 인물이 책과 똑 닮은 얼굴로 제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그녀가 제가 들고 있는 책과 앞에 실존한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어! 저, 저기요!”

말없이 이예주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가 불현듯 몸을 틀어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빛나는 흰색 옷이 순식간에 어둠 속에 파묻혔다. 

이예주가 황급히 불렀지만 그녀는 절대로 뒤돌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어떡하지? 따, 따라가야 하나?”

너무나도 책과 똑같은 여자의 모습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치곤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이예주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여신이라는 여자가 제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그냥 말로 따라오라 하면 될 것이지, 약을 살살 올려 가면서.

“아아,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할까, 예주야. 어떡해.”

지금까지 행동을 보아하니 분명 따라오라는 신호 같긴 한데. 

그렇다고 선뜻 어디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구멍 속으로 몸을 마구 날리고 싶진 않았다. 

“어떡해, 어떡해! 따라갈까? 아니, 그냥 방으로 갈까? 아악!”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이예주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엄청난 갈등을 반복했다. 

무작정 따라가자니 꺼림칙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안 가자니……. 

일단 여신 이름이 ‘Time’이었다. 

무슨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에 나온 여신이란 여자는 시간족과 관계가 상당히 깊은 듯했다. 

시간과 관계가 깊은 것은 시간족뿐만 아니라 이예주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앞으로만 직진하는 능력! 

자신은 후진을 좀 할 필요가 다분한 인생을 살고 있으니, 시간과 관계가 깊은 여신이 있다면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눌 이유가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여태껏 자신을 골탕 먹이고 끝내 계단을 타고 사라진 여자가 진짜 여신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여신 비스무리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만날 기회를 얻기도 전에 람에게 잡혀 죽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가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예주에게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       *       *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길은 온통 어두웠다. 

손전등이 없었다면 이예주는 진즉에 계단을 굴러 저승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만 이어진 통로는 좁고 축축했다. 

대체 어디서 떨어지는 건지 가끔 위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안 그래도 경사 높은 계단을 한층 더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계단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뛰어 내려가다니. 

여신 모습을 한 여자가 아무래도 진짜 여신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난간조차 없어서 한 손으로는 미끌미끌하고 축축한 촉감의 기분 나쁜 벽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가까스로 손전등을 비추면서 이예주는 한 칸 한 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저택의 층수인 3층보다 더 깊이 내려가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계단의 길이가 엄청나게 길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내려가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쯤 날이 밝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제 방에서 고이 자지 않고 이런 뜬금없는 공간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일리야는 물론이고 조롱이도 눈을 까뒤집을 텐데. 

불을 내뿜으며 제 주인에게 꼰지르겠다고 투지를 다질 조롱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하…….”

참 불쌍하고 박복한 내 신세야.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어쨌거나 이 비좁은 계단부터 다 내려가고 봐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여자가 그저 여신 코스프레한 미친 여자라면, 정말 그 금발 머리를 다 쥐어뜯어 놓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이예주는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차갑고 습한 공기 때문에 코끝이 얼얼하다 못해 마비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 그녀는 드디어 평평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제가 내려온 뒤를 돌아보니 정말 긴 계단이었다. 손전등으로 비춰 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을 겁 많은 자신이 통과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미친 세상에 넘어와서 쉴 새 없이 괴물에 쫓기고 구르며 그만큼 많이 성장했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하나도 뿌듯하지 않았다. 

“……여긴 또 어딜까.”

지친 목소리로 이예주가 이곳저곳 손전등을 비춰 봤다. 

계단을 내려왔던 통로보다 크기가 약간 더 큰 복도라는 것을 빼곤, 딱히 별달라진 건 없었다. 

동굴을 개조한 곳처럼 돌벽 곳곳은 곰팡이와 이끼가 슬어 있었고 어느 하나 축축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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