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4)화 (54/319)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던 그녀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검은색 표지의 얇은 책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두께도 일반 광고 잡지만큼 얇은 주제에 야무지게도 발등을 내려찍었다. 

이예주는 제가 들고 있는 무거운 책과 바닥에 떨어진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책이 뚝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 제가 들고 있던 책 사이에 저 검은 책이 끼워져 있었단 소린데. 

“책 사이에 책이 숨겨져 있어……?”

이예주가 들고 있던 책을 앞에 있는 선반에 대충 내려놓은 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얇은 책을 들어 보였다. 

검은색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다. 심지어 몇 번 열어 보지도 않은 듯한 새 책이었다. 

책의 겉면을 쓰다듬으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표지를 열었다. 

“이거…….”

이예주는 놀라움에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그림책인 듯 생생한 삽화와 짧은 영어 문장 하나가 내지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것은 책 사이에 숨겨져 있던 책이 그림책이어서가 아니었다. 

펼쳐진 책은 인쇄된 책이 아니었다. 누군가 활자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적어 넣은 것이었다. 

채색되어져 있는 그림 또한 마찬가지여서 필사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와 닿는 우둘투둘한 감촉에 멍하니 굳어져 있던 이예주가 짧은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인 듯 다른 책들과는 달리 쉽고 간단한 영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녀 또한 능히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아주 오래전, 태초의 지구에 검은 안개를 가진 검은 파편이 있었다. ]

“……검은 파편.”

익숙한 단어가 눈에 훅 들어왔다. 

검은 파편. 이곳에서 만나는 인간들마다 람을 검은 파편이라고 불렀다. 

검은 파편이 이름이냐는 이예주의 질문에 부정하지 않던 람이 떠올랐다. 

연달아 히카톤에 대해 설명해 주던 그의 말 또한 같이 떠올랐다.

검은 파편, 검은 안개. 

이예주는 문득 시선을 옮겨 글자 밑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안개로 보이는 검은색 덩어리가 뭉뚱그려져 있었다. 검은 안개를 가진 검은 파편을 그린 듯싶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면서, 불편하게 쭈그려 앉아 있던 자세에서 엉덩이를 아예 바닥으로 내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한기가 느껴졌다. 

[ 검은 파편이 후 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넘실넘실하며 바다가 춤을 췄고, 몸을 한 번 뒤척일 때마다 땅이 다져졌으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천둥이 내리쳤다. ]

검은색 덩어리가 앞 장과 다르게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검은 파편으로 추정되는 검은 덩어리 옆에 천둥을 표현한 듯한 하얀색의 날카로운 직선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 출렁이는 바다와 땅이 직접 본 것처럼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그린 자국 때문에 종이 표면이 우둘투둘하지만 않았더라면 사진이라고 믿을 정도로 정교한 그림이었다. 

그 대단한 그림 솜씨 때문에 가끔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책을 읽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빠져들 듯 그림을 바라보던 이예주가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여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삽화가 보였다. 

생생하게 그려진 휘날리는 황금색 머리와 순백의 옷을 걸치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는 앞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모든 것을 초월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이 워낙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기에, 그럴 리 없음에도 실존하는 인물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 어느 날, 우리들의 위대한 여신 ‘시간’이 태어났다. 시간은 어떤 인간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을 주기도 했고, 어떤 인간에게는 주었던 시간을 빼앗기도 했다. 

때로는 어린 소녀의 형체, 때로는 다 죽어 가는 노인의 형체, 때로는 매혹적인 성인 여성의 형체를 하며 시간은 인간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

이예주의 눈이 ‘Time’에 못 박혔다. 

형체 없는 시간이 여신이라니. 

왠지 우스운 일 같음에도 시간족이란 인간들이 떠올라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여자가 여신인가?”

그녀는 다시 한 번 여자의 모습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림이 분명함에도 자꾸만 실제 같은 여자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잠시간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던 이예주가 천천히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 우리들의 위대한 여신, 시간은 검은 파편에게 자신을 도와 인간들을 다스릴 것을 명령했다. 

검은 파편은 시간의 명령에 따라 풍요로운 토지와 수많은 수중 생물들을 실은 바다를 인간들에게 내주었다. ]

그로부터 뒤로 3쪽에 걸쳐 검은 파편이 인간들에게 토지와 바다를 내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들을 샅샅이 훑어보며 그녀는 다시 종이를 넘겼다.

그다음 장은 앞의 평화로운 장면들과는 다르게 온통 끔찍한 빨간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책의 양쪽을 가로지르는 피 같은 강물이 있었고, 그 주위에 난자된 인간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동그라져 있는 사람 발목 그림을 보고 이예주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 그러던 어느 날, 우리들의 위대한 여신 시간을 갖기 위한 대전쟁이 일어났다. 

죽고 죽이고, 수많은 인간들의 피가 대지를 가로질러 흘렀다. 인간들의 피로 말미암아 바다가 오염되고 땅이 죽어 갔다. 검은 파편은 분노했다. ]

다음 장에는 검은색의 덩어리가 회오리치듯 분노하는 장면이 나왔다.

[ ―너희 인간들은 시간을 가질 자격이 없다. 그것은 내 힘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검은 파편은 존경하는 위대한 여신 시간을 인간들에게 빼앗아 도망쳤다. 신의 저주와도 같은 빙하기가 시작됐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추위가 인간 세상을 덮쳤고 인간들은 비탄에 빠졌다. ]

추위에 덜덜 떠는 인간들과 아름다운 여자를 훔쳐 가는 검은 덩어리의 장면이었다. 

간신히 문장을 해석한 이예주는 성급하게 책장을 넘겼다.

[ ―여신님, 여신님! 우리 일족을 구원해 주세요!

인간들은 위대한 여신 시간에게 빌었다. 그런 인간들을 안타까이 여긴 시간은 검은 파편의 행동을 노여워하며 불쌍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힘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최초로 기도를 올린 인간에게 위대한 여신, 시간은 자신의 다리에 담긴 힘을 내렸다. 그들 일족은 시간의 구애에서 벗어나 재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다리족이 되었다.

두 번째로 기도를 올린 인간에게 시간은 자신의 팔에 담긴 힘을 내렸다. 그들 일족은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멈출 수 있는 팔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세 번째로 기도를 올린 인간에게 시간은 자신의 눈과 머리카락에 담긴 힘을 내렸다. 그들 일족은 오랜 세월을 길러 온 살랑거리는 시간의 머리카락만큼 과거를 볼 수 있는 왼쪽 눈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오른쪽 눈의 힘은 검은 파편을 위해 남겨 두렴, 아이야.

우리들의 위대한 여신 시간은 관대하게도 검은 파편에게 용서를 내렸다. 하지만 눈의 힘을 가진 세 번째 인간은 검은 파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눈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검은 안개 속에 숨은 검은 파편을 볼 수 있었다. ]

팔락하고 이예주의 손에 의해 종이가 구겨지듯 장이 넘겨졌다. 

그녀는 아까 전, 대전쟁을 뜻하는 삽화를 볼 때보다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 하나가 무서운 표정으로 검은 덩어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광기 어린 눈이 생생한 남자의 한 손엔 검은 안개에서 뜯어낸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덩어리가 잔뜩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뜯어낸 안개를 집어 제 입에다가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안개를 먹는 행위였다.

[ ―검은 파편이다! 검은 파편! 검은 파편!

검은 파편을 알아본 인간은 벌을 내리기 위해 검은 파편에게서 검은 안개를 빼앗아 뜯어 먹었다. 

검은 파편은 겁에 질려 간신히 남은 검은 안개 한 줌을 타고 도망쳤다. ]

“이건 아니야…… 왜? 검은 파편이 무슨 잘못을 해서? 도와줬잖아.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줬잖아.”

그녀가 새된 비명처럼 중얼거리며 앞서 읽었던 장을 빠르게 넘겨 훑어보았다. 

그 어디에도 검은 파편이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 인간은 검은 파편에게서 검은 안개를 빼앗아 게걸스럽게 뜯어 먹었다.

―내게서 검은 안개를 훔쳐 간 시간족 혹은 그 후손이 검은 안개를 더럽힐 짓거리를 하고 죽어 버리면 저런 괴물이 되어 되살아나지.

내게서 검은 안개를 훔쳐 간 시간족. 

훔쳐 간. 

람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람은 이 책에 나오는 검은 파편인지 뭔지란 말인가?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동화가……. 

[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검은 파편은 울부짖었다.

―내가 다시 지상으로 끌어 올려질 적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 발겨 주마…… 

까마득한 잠에 빠져들며, 검은 파편은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

드디어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던 검은 파편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색의 파편이라면서 자그마한 파편 조각의 모습은 피처럼 시뻘겠다. 

검은 파편이 아니라 빨간 파편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어느덧 얇은 책은 한 장만을 남겨 둔 채 끝이 났다. 

이예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었다. 

그저 하얀 종이 한가운데에 휘갈겨 쓴 스펠링이 정신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앞선 페이지들의 정갈한 글씨와는 너무나도 다른, 무언가에 쫓기듯이 쓴 다급하기 그지없는 글씨였다.

[ One day in 2017, the black debris awoke. 

The entire Earth had been covered with massive boiling lava.

The world was destroyed. ]

이예주의 눈이 마지막 문장에 못 박혔다. 

글씨의 무게에 그녀는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읽어 봐도 글자에 변함은 없었다.

“……그리고 세상은 멸망했다.”

2017년 어느 날, 검은 파편이 깨어났고, 대규모 용암이 덮쳤고, 그리고 세상은 멸망했다. 

이예주는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고 뭔가가 자꾸만 생각날 듯 말 듯 한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용암이 덮치고 세상이 멸망했다. 

2017년에 세상이 멸망했다. 세상이 멸망. 멸망.

“멸망이라니…… 이거 너무 표현이 극단적이잖아.”

이예주가 애써 웃으며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하는 생각들을 부정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멸망이라는 단어가 눈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하하, 멸망? ……멸망이면,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돌아갈 곳이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녀가 자꾸만 목을 죄는 상상에 서둘러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어떻게 세상이 멸망해. 지하 벙커도 있을 테고…… 어떻게든 살 사람은 살겠지. 멸망은 무슨 멸망.”

그런데도 자꾸만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그럼 여기 시간은 왜 멈춘 거야? 그 용암 파도는 또 뭐고! 흐흑! 아니야, 아니야!”

이예주가 고개를 세게 휘젓다가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것이 꼭 자신의 앞날 같았다. 죽음처럼 암담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예주야, 정신 차려.”

마치 앞에 또 다른 자신이 있는 것처럼 말을 걸며 그녀가 이를 으득 악물었다. 

“넋 놓고 있으면 죽는 거 알잖아? 벌써 죽으면 안 돼. 그럼 안 되고말고. 과거로 돌아가야지. 죽더라도 돌아가서 엄마랑 죽어야지, 예주야.”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듯 그녀는 주문처럼 끊임없이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을 외웠다. 

한참을 그렇게 중얼중얼하자 사시나무 떨 듯 떨리던 몸도 차차 진정이 되었다. 

이예주는 힘을 줘 두 눈을 한 번 꽉 누른 후, 눈에서 손을 떼었다.

검은 책을 읽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일단 두껍고 무거운 책은 포기하고, 이 검은 책을 가져가서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다. 

그 생각에 책을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던 바로 그때였다. 

타닥, 타다닥.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서 있는 곳보다 더욱 안쪽에서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갔다. 

이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책까지 덜커덩 떨어뜨렸다.

“누, 누, 누구세요?!”

한계까지 홉떠진 눈에서 금방이라도 도로록 눈알이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기절할 정도로 놀란 그녀가 거의 괴성 지르듯 누구냐고 소리쳤으나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여전히 정적에 휩싸인 서재 안, 눈에 닿는 곳 족족 온통 책장과 책뿐이지만 그녀는 사방을 향해 고개를 휙휙 틀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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