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3)화 (53/319)

이예주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고 순순히 일리야가 건네는 손전등을 받아 들었다. 

“그럼 전 방으로 가 볼게요.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일리야.”

“아닙니다.”

일리야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예주는 손전등의 손잡이 부분을 다잡으며 뒤로 돌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도 뒤통수에 닿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엉금엉금 필사적으로 기어오느라 참으로 길었던 계단을 순식간에 되돌아 내려갔을 때쯤 뒤에서 친절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히 주무세요, 레이디.”

이예주는 잠시 힐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어두컴컴한 2층 복도에 들어선 그녀는 ‘릴렉스, 릴렉스.’를 속으로 외우며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었다. 

마침내 제 방이 위치한 복도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도는 순간, 이예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벽에 붙어 섰다. 그리고 재빨리 손전등부터 껐다. 

그녀는 등을 벽에 딱 붙인 채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발을 굴렀다. 

맨발인 이예주의 발자국 소리가 일리야가 서 있는 계단 근처까지 들릴 리 없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발을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타박타박, 타박타박.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자, 계단 쪽에서 미동도 없던 발자국 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구르던 발을 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그들의 일정한 발자국 소리 또한 2층 복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완전히 멈췄다.

“진은 어디 있지?”

일리야의 목소리였다. 

아까보다도 한층 더 작아진 목소리라 이예주는 모퉁이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해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메이드가 대답했다.

“레이와 함께 저택의 앞문과 뒷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 레이. 아까 이예주의 옷시중을 들었던 메이드들이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저택의 앞문과 뒷문을 지키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예주는 자꾸만 드는 의문을 참기가 어려웠다. 

왜 하필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여자들이 지키고 있을까? 

도둑이나 다른 것을 경계하기 위한 보초라면 남자들을 세워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오늘 자신을 위해 급하게 교육을 받았다는 초짜들을 보초로까지 세워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력이 모자라서? 아니면 혹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더 깊어졌을 즈음, 일리야와 메이드의 이야기도 점점 끝을 보였다.

“나는 잠시 족장에게 가 보아야 할 것 같다. 너는 혹시 모르니 나 대신 1층을 둘러보고 즉시 2층으로 올라와 방문 앞을 지키렴.”

“네.”

“빠르게 둘러보아라. 예민한 듯하니 방문 앞에서 기척을 죽이는 것 또한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일리야 님.”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리야가 메이드에게 기척을 죽이면서까지 지키라고 명령한 ‘방문’이 바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이라는 것을. 

뚜벅뚜벅, 두 사람분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금 계단을 타고 멀어졌다. 

이예주는 점점 사그라지는 발자국 소리를 엿들으며 손에 쥔 손전등을 꾹 다잡았다. 

왠지 불안했다. 자신이 다시 방에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지키라 한 것부터 족장에게 가 본다는 일리야의 말까지. 

커튼을 쳐 인위적으로 만든 밤 동안 팔족 인간들은 대체 뭘 하는 걸까? 

서재고 뭐고 그냥 방에 처박혀서 내일 서재를 구경시켜 준다던 족장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이예주는 잠시 입술을 꾹꾹 깨물며 껌껌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조차 새어 들지 않아 겨우 형태만 구별할 수 있는 앞. 그리고 곧 제 방 앞을 지키러 올 메이드까지. 

아, 정말 환장할 상황이다. 

*       *       *

입 다물고 방으로 들어가 자라고 얘기한들 그대로 들을 이예주일쏜가.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면 골로 갈 뻔한 여러 위험한 상황들을 진즉에 모면해 왔을 것이다. 

이예주는 현재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3층 복도를 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3층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복도 건너편에 바로 위치해 있는 문을 놔두고 왜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면, 이게 다 문이 잠겨 있다는 일리야의 말 때문이다. 

그런고로 혹시 뒷문이나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을까 싶어 샅샅이 벽을 부여잡고 복도를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손전등을 이용하면 진땀을 뻘뻘 흘리지 않고도 쉽게 거닐 수 있겠지만, 그녀는 아주 급한 상황에 잠깐 켰다 바로 끄는 게 아니라면 손전등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귀신같은 팔족 인간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하…… 대체 문이 또 있긴 한 걸까?’

복도 끝에서 반대편 끝을 확인한 후에도 여러 번 3층의 긴 복도를 오갔지만 손에 닿는 감촉은 죄다 같은 느낌의 벽지뿐이었다. 

다시 중앙 계단의 반대편에 위치한 문으로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짜증을 있는 대로 냈다. 

“하아, 어떡해…….”

이예주는 자리에 서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휩싸였다. 

처음부터 책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떠올린 건 아니었다. 팔족 족장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맛이 간 듯한 놈의 말투에 포기했다. 

사람에게 정보를 구하는 것을 체념하자 다음은 문서였다. 

1000년 전의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문서가 많은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자 도서관이라는 답이 도출되었다. 

과거의 상황을 안다 해서 당장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려 시간이 멈춘 땅에서 멍청하게 가만히 있기는 좀 아까워서……. 

그러나 계단에서 일리야를 마주친 후 이예주는 서재든 뭐든 찾아가서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긁어모아야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어느 면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가 본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스산한 생각이 자꾸만 관자놀이를 찔렀다. 

게다가 일리야의 말에는 허점이 있었다. 

서재에 공개하는 범위가 정해져 있다니? 

이예주에겐 보여 줄 수 없는 것이 서재에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

하지만 이예주는 서재 안에 진입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의 허점이 다 무슨 소용이고 또 그녀 같은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무언가가 다 무슨 소용일까. 

머리를 한도까지 굴리며 서재 안으로 들어갈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아이디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울적한 얼굴로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금색 문고리를 잡고 서재 문에 툭, 머리를 기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툭, 마지막으로 문에 머리를 박고 다시 한 번 복도를 돌아볼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낡은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서재 안은 커튼을 치지 않았는지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쏟아졌다. 

‘허…….’

이게 웬 횡재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이예주가 손으로 문을 열자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문이 활짝 열렸다. 

퀴퀴하고 꿉꿉한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찌름과 더불어 사위가 환해졌다. 

밤이랍시고 온통 시커멓게 만든 저택 내부와는 다르게 서재 창밖의 광경은 이예주가 도시에 처음 발을 들이밀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혹시 누가 있을까 싶어 계단과 복도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빛이 2층까지 새어 나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과연 도시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라는 말답게 족장의 서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창문이 나 있는 곳을 제외한 온 벽이 책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거대한 책장들이 천장까지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 책장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렇게 책장에 책을 꽂고도 부족했던지 서재 안 구석구석에 먼지 쌓인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커다란 시립 도서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규모에 이예주는 아연해졌다. 

실로 그 수가 어마어마해서 제대로 된 정보가 담긴 문서를 과연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문 잠겨 있다더니…… 나한테 약을 팔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일리야의 얄궂은 얼굴이 떠오르자 이예주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하지만 이 수많은 문서들 중에서 과거와 관련된 것을 찾아내야 해 분노를 마저 표출할 새도 없이 책장 사이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하, 책 못 모아서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느끼한 팔족 족장의 면상을 떠올리며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엄마……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확인하고 방 안으로 되돌아가…….”

3층 전체라더니 정말 책장과 책장 사이로 보이는 반대편 끝이 까마득했다. 

제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쭉 늘어서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책장 옆면을 보며 대체 어느 책장으로 먼저 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이예주의 눈에 문득 책장 옆면에 붙어 있는 커다란 액자가 들어왔다. 

1부터 16까지 숫자 옆에 영단어가 적혀진 포스터가 들어 있는 액자였다. 

그녀가 액자를 올려다보자 8이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책장 옆면에 새겨져 있었다. 

암담하던 이예주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아무래도 팔족 인간들이 책들을 유형별로 나눠 놓은 것 같았다.

[ 1. Time tribe’s Literature ]

“타임…… 시간족?”

시간족에 대한 문학에 이예주는 잠시 마음이 혹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시간족에 관한 건 내일 족장 놈과 같이 온 후에 천천히 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2. 제너, 제너럴…… 3. 칠드런스…….”

나열되어 있는 숫자와 영단어를 번갈아 가며 중얼대던 이예주는 숫자 10과 11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0과 11에는 ‘Societal Literature’와 ‘History Literature’가 적혀 있었다. 욕 나오게 많은 책들 중에서 그나마 범위가 두 가지로 좁혀진 것이다.

“10, 11 사회, 역사…… 10, 11.”

서재 내부에는 시계가 없었다. 

반대쪽에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있는 입구 근처에는 책들만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에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까보다 새벽이 깊어졌다는 것은 확실했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대충 훑어본 다음에 아무 책이나 가지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문득 눈에 스친 이상한 단어에 다시 걸음을 원상 복귀시켰다. 

11 다음에는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시선을 돌렸기에 자칫하면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단어를.

“……16. Destruction.”

1부터 15까지의 단어 뒤에는 단어 ‘Literature’가 붙어 있었으나 16만은 아니었다. 

그냥 단어 하나. 그저 멸망뿐이었다. 

이예주는 고개를 돌렸다. 

16번 책장은 서재의 맨 끝에 있어 그녀의 위치에서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10번, 11번의 사회와 역사 문학 책장을 홀린 듯이 지나친 그녀는 서재의 끝으로 향했다. 

드디어 숫자 16이 새겨진 마지막 책장 옆면에 도착한 그녀가 책장을 돌아 책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생각보다 책이 많지 않았다. 

아니, 수많은 칸에 놓여 있는 책들이라곤 많아 봐야 두세 권. 합쳐 봤자 채 열다섯 권도 넘어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도 수많은 책들이 꽂힌 책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쭉 늘어서 있었지만 모두 멸망에 관한 책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바로 옆 책장에는 15가 새겨져 있었다. 

고로 16이 새겨진 책장, 멸망에 관한 책들이 있는 것은 이 책장 딱 하나뿐인 것이다. 

책도 이게 다라니. 그녀는 눈높이에 가장 가까운 책을 들어 대충 훑어보았다. 

굉장히 두꺼웠다. 그리고 완전한 영문 원서였다. 

‘Destruction’ 혹은 ‘Lava’ 같은 아는 단어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으나 전체를 해석하기엔 극히 시간이 부족했다. 

이예주는 몇 권의 책을 더 들어서 훑어보았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너무 무거워서 두 손으로 들기도 벅찬 책들도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녀는 눈대중으로 대강 훑어본 후 가장 두꺼워 보이는 책을 들어 보였다. 

가장 두꺼운 책에 가장 많은 정보가 들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으윽, 더럽게 무겁네.”

끙끙대며 간신히 책을 안은 그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책을 방으로 들고 가야겠다. 

그 후에 조롱이한테 물어보든, 아니면 내일 다시 와서 족장의 비위를 살살 맞추며 영한사전이 있나 물어보든, 어떻게든 해석할 길이 있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으로 책을 들고 걸음을 옮기던 중, 별안간 들고 있던 책에서 무언가 쑥 빠져 이예주의 발등을 콱 찍고 바닥에 떨어졌다.

“악! 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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