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2)화 (52/319)

“아, 그럼 어떡해여! 누나 도와주려고 기껏 얘기했는데 꼬집기나 하고, 히잉…….”

“그렇다고 엄마라고 해? 내가 어딜 봐서 너 같은 아들이 있어!”

“저 족장이란 인간, 누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불손해여. 주인님이 저런 눈빛의 인간들을 제일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단 말이에여!”

눈빛이 불손한 건 모르겠고 확실히 나사 하나 빠진 미친놈이란 건 알 것 같다. 

체한 듯 미식거리는 속을 가다듬으면서 그녀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과거로 가는 방법이나 알아볼까 했더니, 일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도시의 인간들이 제정신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예주 누나, 여기 좀 그래여. 인간들도 다 이상한 것 같구…… 우리 그냥 도망가면 안 돼여?”

“여기까지 와 놓고 도망가긴 어떻게 도망가.”

“그래두 차라리 사막에서 주인님 오시길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여.”

나한텐 도망이 문제가 아니라 네 주인이 문제야, 네 주인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괴성을 지르지 못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눈으로 이예주는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저야 애완동물이니 저렇게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지. 

지금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건 이 도시도, 버터 몇백 개를 주워 먹은 것 같은 팔족 족장도 아닌, 바로 조롱이의 주인 놈이었다. 

그 남자가 와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저 맛이 간 족장 놈을 부여잡고 그런 것을 물어보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족장이 사라진 복도와 조롱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예주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음흉하게 비죽거리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족장의 끈적끈적한 눈길이 떠올랐다. 

조롱이보다도 더 도망가고 싶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밤이 오지 않기 때문에 커튼을 꼭 치고 주무시는 게 좋아요. 방이 환하면 잠이 잘 안 올 수 있으니까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흐린 바깥 날씨를 비추는 창문을 두꺼운 커튼으로 가리며 일리야가 이예주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커튼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처럼 여전히 어두침침한 밖을 생각하며 이예주는 여기가 정말 시간이 멈춘 땅임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밤이 오지 않는다. 

날씨가 바뀌지 않는다. 

도시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다. 그녀의 시선이 커튼 틈 사이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일리야가 다시 한 번 커튼을 꽉 옭아맸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런 식으로 인위적인 밤을 만드는 인간들을 보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자정이 되면 저택 내부의 모든 불을 끄고 커튼을 치기 때문에 돌아다니시지 않는 게 좋아요.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하거든요.”

이예주의 행동을 차단하는 듯한 일리야의 말에 그녀가 퍼뜩 묘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아…… 예. 뭐, 피곤해서 바로 잠들 것 같은데요.”

“많이 피곤하신가요? 마사지라도…….”

“아니, 아니요! 그냥 잘게요. 그냥!”

허겁지겁 거절하는 이예주를 향해 일리야가 푸흣, 웃음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진짜로 멀쩡한 인간들을 만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얼마나 괴물 같은 것들이 숨통을 죄어 왔던가. 

그에 비하면 이 팔족인지 뭔지 하는 인간들의 땅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시시 때때로 저를 죽이려 드는 위험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밥맛 떨어지는 태도를 유지하던 람과 촉새 같은 새 자식 사이에서 눈물지었던 나날들. 

이렇게 호화스러운 잠자리가 아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될 것이라며 얼마나 그리워했던 사람 냄새인가.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보고파 했던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상하게 별로 반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폐허 같은 텅 빈 도시와 팔족 근거지의 분위기 차이가 너무 컸던 걸까? 

아까부터 자꾸 어딘지 모르게 드는 불편함이 그녀의 신경 한구석을 찔러 댔다. 

어디가 이상한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일리야는 친절했고 시종일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족장이란 놈은 약간 또라이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사실 람을 처음 만나 초능력 정신병자가 숲을 배회한다고 생각했을 때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양호했다. 

그러면 대체 어디서. 어디서 이 위화감이 계속 느껴지는 걸까. 

대체 어디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레이디?”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낱낱이 일리야를 뜯어보던 이예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요. 별말은 아니고…… 조롱이는 잘 있나요?”

“같이 오신 남자 손님 말씀이신가요? 방금 전 씻고 잠자리에 드신 것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아…….”

발 빠른 일리야의 행동에 감탄하며 이예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리야는 집사…… 그런 건가요?”

“집사요?”

“네, 집사. 하는 일이 집사랑 비슷한 것…….”

이예주의 집사 발언에 일리야가 호호호,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한 것 같아서 이예주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간 맑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던 일리야가 웃음을 멈추고 질문에 대답했다. 

“집사라…… 집사는 아니에요.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긴 하네요.”

“아…… 비슷한 일…….”

집사 비슷한 일은 또 뭘까. 파출부? 아니면 좀 고급스럽게 가사도우미?

“네. 시간이 늦었네요. 내일 아침 일찍 저택 구경을 하시려면 어서 잠자리에 드시는 게 좋겠어요, 레이디.”

그러나 끝내 일리야는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 것을 종용했다. 

이예주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고분고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목 끝까지 푹신한 이불을 올리는 걸 확인한 일리야가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부디 좋은 꿈꾸시길, 레이디.”

일리야가 방문을 열고 속삭이듯 말했다. 왠지 모르게 공주 대접을 받는 것 같은 쑥스러움에 이예주가 이불 안에서 팔을 박박 긁으며 대답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일리야.”

불이 꺼졌다. 

이어서 탁 하고 일리야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예주는 낯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스르륵 잠에 빠져 들었다.

*       *       *

‘쥐새끼 한 마리 기어 다니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 깊은 잠에 빠져든 이예주는 열심히 꿈속을 허우적대며 침대를 굴렀다.’는 개뿔. 

그녀는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으로 3층을 향해 걷고 있었다. 

모든 불을 끄고 커튼을 친다는 일리야의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던 듯 정말로 저택 내부는 깜깜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매우 당황하던 그녀는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여러 번 헛손질을 하며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이 눈에 익었음에도 완전히 주위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연신 벽을 잡고 이동해야만 했다. 

소리를 낼까 저어되어 천천히 움직였더니 중앙 계단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다. 

쩌억, 맨발이었기 때문에 대리석에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방 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예주가 다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중앙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중앙 계단으로 보이는 난간을 붙잡았을 때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를 뻔했다. 

일단 2층에는 사람 기척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그녀는 꽤 대담하게 중앙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올랐다. 

뭐 훔치러 가는 것도 아니건만, 남의 집이여서 그런지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서 원하는 것만 가지고 제 방으로 돌아갈 생각에 속히 계단을 오르던 이예주가 3층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불쑥 발소리가 들려온 탓에 그녀가 기겁을 하고 계단 난간에 붙어 쭈그려 앉았다. 

쇠창살처럼 일정하게 세워진 난간 기둥이 제 몸을 숨겨 줄 리 없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어둠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수밖에. 

저벅저벅. 계속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던 발자국이 계단에 들어서는 입구 근처에서 멈췄다. 

그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2층은 똑바로 확인했겠지.”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네, 일리야 님. 3층의 커튼까지 모두 닫고 왔습니다.”

다른 여자가 대답했다. 

일리야? 아는 이름에 이예주가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일리야의 목소리가 완전히 딴판이었다.

와, 저렇게 도도한 목소리도 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예주는 쭈그려 앉아 있었기에 난간 사이로 손전등 불빛만 볼 수 있을 뿐, 사람들의 얼굴까지 낱낱이 볼 수는 없었다. 

차가운 일리야의 목소리와 또 다른 인영의 대화가 계속 진행되었다.

“여자들은?”

“방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눈족이 한 명 있다지?”

“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숫처녀는 아닌 듯해서 같이 들여보냈습니다. 인원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눈족? 시간족을 말하는 건가? 숫처녀는 뭐야? 들여보내긴 어딜? 

이해가 가지 않는 일리야와 또 다른 여자의 대화에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리야는 목소리를 죽여 은밀하게 속삭였다. 

“족장은?”

“여느 때와 같이 전혀 눈치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손님도 계시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일리야 님.”

심각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말이 그 후로 조금 더 오갔다. 

이예주는 더 이상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도 쭈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서 죽을 것 같았다. 

들킬까 봐 긴장해서 몸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열심히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코에 찍어 발라도 다리는 점점 더 크게 후들거렸다. 

난간을 잡고 있지 않는다면 바로 주저앉았거나 넘어져서 계단을 굴렀을 것이다.

“그 여자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때까진…… 눈치채고 도망이라도 가면……!”

그때였다. 

털썩. 미친 듯이 저리는 다리를 참지 못하고 이예주가 결국 주저앉았다. 

순간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면서 그대로 계단을 구르며 떨어질 뻔했지만 난간을 부여잡아 간신히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거기 누구죠!”

일리야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꽤 먼 거리에 있던 불빛이 순식간에 훅 가까워졌다. 

하, 망했다. 멍청이 같은 저를 탓하며 이예주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하. 저예요, 일리야.”

“레이디?!”

계단 난간에서 이예주의 모습이 드러나자 일리야가 경악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일리야가 휘청거리는 이예주 쪽으로 빠르게 내려와 그녀의 눈앞에 손전등을 들어 보였다. 

눈이 부셔 이예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 주무시고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아…… 저, 죄송해요.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 좀 쐰다는 게…….”

그녀가 빛으로부터 고개를 피하며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추궁하는 일리야의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짜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간신히 빛에 익숙해진 눈이 정면을 바라보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계단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리야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난처해하던 이예주의 표정 또한 덩달아 차갑게 굳어지자 일리야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표정을 지우고 웃음을 지었다. 섬뜩한 변화였다.

“정말 놀랐잖아요, 레이디. 저를 보셨으면 불러 주시지 않고 왜…….”

“아, 3층으로 올라오다가 발이 미끄러져서요. 일리야가 있는 건 몰랐어요.”

은근슬쩍 떠보는 일리야를 향해 이예주가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해서 마주 웃어 보였다. 

여자가 어둠 속에서 뱀같이 차가운 눈을 하고 샅샅이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는 게 느껴졌다. 

변함없이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는 입가에 그칠 뿐이었다. 

아까 따뜻하게 잠자리를 봐주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는 한참 후에야 눈초리를 거뒀다. 

그러곤 이예주를 향해 다시금 꽃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3층 서재를 구경하러 오신 건가요? 서재는 내일 족장님과 같이 구경하시기로 했을 텐데요.”

“아, 네. 그건 그렇죠. 그렇긴 한데…….”

이예주가 변명거리를 생각하기 위해 눈을 허둥지둥 굴렸다.

“어…… 그냥 책 하나 방으로 가지고 와서 보다가 자려고 했어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서재는 팔족에 대한 유서 깊은 책들이 많기 때문에 손님들에게 공개하는 범위가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항상 문을 잠가 둔답니다. 물론 열쇠는 족장님만 가지고 계시죠.”

“아하, 그렇구나…….”

“그러니 오늘은 이만 주무시고 내일 일찍 족장님과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이디. 위험하니 이 손전등을 가지고 내려가세요.”

영혼 없는 대답을 반복하던 이예주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일리야가 손전등을 넘겼다. 

아예 가서 자빠져 자라고 쐐기를 박는 듯한 행동이었다. 

일리야에 대한 미심쩍음이 더욱 상승했다.

“불은 안 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냥 저 혼자 알아서 내려갈 수…….”

“안 돼요! 깜깜해서 위험합니다. 레이디 이것 가지고 어서 방으로 내려가세요. 저희는 아직 둘러볼 데가 남아서요.”

일리야가 단호하게 이예주를 막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넘어질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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