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예, 예주예요. 이예주요.”
이예주는 마지못해 족장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족장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등 위에 입을 맞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래주! 아이 럽 쏘르르르 머어취! 빛나는 외모에 걸맞은 완벽한 이름이군! 안 그렇소, 일리야?”
“네. 정말 예쁜 이름이네요.”
버터가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능글거림이 족장에게서 느껴졌다.
있는 대로 혓바닥을 굴리며 이예주의 이름을 찬사하자 일리야가 옳다구나 받아쳤다.
어이없는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한 번 토악질하는 시늉을 한 조롱이가 그녀 대신 정정해 주었다.
“래주가 아니라 예주예여, 예주!”
하지만 아무도 조롱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예주 마저 너무도 어이없는 이 상황에 정색했지만, 족장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표정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오 마이 갓! 세상에나. 일리야, 음식이 다 식겠군. 여기 뷰티풀한 레이디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나. 어서 식당으로 레이디를 안내하게, 어서!”
“네, 족장님. 이리로, 레이디 래주.”
일리야가 다시 깔끔하게 웃으며 앞섰다.
그 뒤를 이예주에게 음흉한 미소를 보내던 팔족 족장이 뒤따랐다.
족장의 회색에 가까운 푸른 눈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이제껏 영화나 티브이로 파란 눈의 외국인을 종종 보아 온 이예주였으나, 저렇게 흐리멍덩하고 더러운 파란색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조롱이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떽떽거렸다.
“예주라구여, 예주!”
“내비 둬. 어차피 여기 떠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그걸 말이라고 해여? 아, 진짜 이게 뭐 하는 거예여! 주인님은 그냥 팔족 근거지 근처에서 기다리라고만 하셨는데! 여기까진 저도 처음 온단 말이에여!”
조롱이가 잔뜩 비난 어린 눈초리로 이예주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억울했다.
“아, 몰라! 나도 처음 오는데 어떡하라고! 네가 오자고 한 거잖아!”
“힝, 어떡해여…….”
조롱이가 울상을 지었다.
이예주야말로 착잡했다.
그냥저냥 밥이나 얻어먹고, 뜨거운 물에 씻고 오랜만에 잠이나 퍼질러 잘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 레이디! 어서 그 엘레강트한 발을 이쪽으로 옮겨 주시죠, 레이디!”
멀리서 족장이 검지와 중지를 앞뒤로 현란하게 움직이며 이예주를 불렀다.
그녀가 바라보자 심지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해 댔다.
“……쟤 어떡하니, 진짜.”
조롱이가 다시 우웩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이예주는 가기 싫어 죽을 것 같은 엘레강트한 발을 억지로 떼어 식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식탁에는 온갖 휘황찬란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코를 부드럽게 자극하자 이예주는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시뻘건 미친놈이 간식 주듯 간간이 던져 준 육포밖에 먹을 게 없었던 지긋지긋한 사막에서의 상황에 비해 이곳은 완전히 천국이었다.
“앉으시죠, 레이디.”
족장이 마치 예수님처럼 인자해 보였다.
그녀는 사양치 않고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친 듯이 흡입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롱이도 마찬가지였다.
통째로 구워진 닭고기부터 포크로 뜯은 이예주와는 다르게, 족장은 우아한 체하며 와인잔을 들었다.
일리야는 그런 족장의 옆에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족장이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뭐라 지껄이기 시작했다.
“레이디, 우리 팔족은 일반 인간들처럼 거지로 전락한 다른 시간족과는 태생부터 다릅니다. 레이디께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다른 시간족들은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일반 인간들과 결합하였지요. 세기말 용암 폭발 이후 시간족의 피는 옅어지고 보통 인간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개돼지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팔족만은 다르죠.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께서 세기말 용암 폭발이란 끔찍한 사건에서…… 오우, 노우! 호뤄블!”
정말로 끔찍했는지 족장이 부르르 떨며 와인 잔을 내려놓고 양 뺨을 제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우리 위대한 선조들이 검은 파편으로부터 이 도시를 지켜 낸 후 팔족만큼은 그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 왔습니다, 레이디.”
“…….”
“다른 시간족들이 벌벌 떨며 검은 파편에게 목숨을 빌 때, 우린 당당하게 우리의 것을 지켰지요. 서쪽 대륙에는 이런 먹을 것과 입을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검은 파편 놈으로부터 지켜 낸 긍지!”
족장이 포크로 제 앞에 놓인 레어 스테이크를 꽉 찍었다.
픽 하고 핏물이 허연 얼굴에 튀었다.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포크를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사랑스럽게 핏물 튄 얼굴을 닦아 내며 족장이 외쳤다.
“프라이드! 프라이드요, 레이디!”
“…….”
“큼큼, 래주. 제 말 듣고 있습니까?”
그때까지 정신없이 접시에 코를 박고 음식을 해치우고 있던 이예주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럼요. 듣고말고요. 대단하네요.”
음식을 한가득 우물거리며 그녀가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더 커다란 반응을 원한다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 줄 용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음식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자신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팔족 족장이 촉촉이 젖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제 노고를 인정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예예.”
이예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족장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눈웃음치더니 다시 와인을 홀짝였다.
“음식이 레이디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귀한 손님이니 최선을 다해 준비하라고는 했다만…….”
“맛있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흠, 그런데 레이디. 실례가 안 된다면 저쪽 손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조롱이요?”
족장이 만남 이래 처음으로 조롱이에게 관심을 표현했다.
조롱이는 제게 시선이 쏟아진 줄도 모르고 이예주의 옆에서 접시에 얼굴을 박은 채 게걸스럽게 생선을 뜯어 대고 있었다.
방금 전의 제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단 사실을 망각한 이예주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툭 쳤다.
조롱이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혹시 레이디와는 형제…….”
“우리 엄마예여!”
그때 눈치 빠르게 무슨 소리를 하는지 파악한 새대가리가 불쑥 소리쳤다.
“뭐?!”
“네?!”
그녀와 족장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조롱이는 다시 한 번 이예주가 뒷목 잡고 넘어갈 소리를 지껄여 댔다.
“엄마여, 엄마. 우리 엄마라구여.”
“너 미쳤어?”
“아악!”
이예주가 웃는 얼굴로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조롱이의 허벅지를 쥐어뜯었다.
조롱이가 짧은 괴성을 질렀고 그녀는 재빨리 어색한 미소로 갈무리했다.
“아하하. 미안, 조롱아. 누나가 실수로 포크를 떨어뜨렸네.”
“누나 아니고 엄마잖……!”
“드지고 싶으믄 계속 흐르…….”
이예주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나오자 조롱이가 내뱉던 말을 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에 빠져 있던 족장이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오 마이 갓, 테르르르르뤄블! 레이디, 아, 아니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요?!”
“하하, 하하…… 아니에요. 동생이 농담한 거예요. 아하하, 부인이라뇨.”
“농담?! 무슨 그런 끔찍하고 스케어뤼이한 농담을! 정말 농담인 겁니까?”
족장이 미심쩍은 눈으로 이예주와 조롱이를 번갈아 보았다.
미심쩍다는 그 눈빛에 그녀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요! 스물셋밖에 안 됐는데 제가 어떻게 이런 아들이 있겠어요. 대여섯 살에 애를 낳은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이 망할 새는 무려 칠십몇 살이라고! 이예주가 정색을 하고 부정하자 족장은 미심쩍은 눈을 거둬들였다.
대신 창백한 얼굴로 연거푸 와인을 들이켰다.
“오, 지져스! 정말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소, 래주. 당신을 잃는다는 생각에 눈앞이 다 깜깜해졌단 말입니다.”
“아하, 아하하. 그러셨구나.”
“다시는 그런 농담 하지 마시오. 불쾌하군! 장난이라도 그런 발언은 루으드하기 마련입니다, 미스터.”
힘겹게 혀를 굴리며 족장이 그 짧은 새에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친 표정으로 조롱이에게 말했다.
조롱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족장을 힐끗 쳐다보더니 “루으드, 루으드하기 마련입니다아.” 하고 밉살맞게 따라 했다.
그러나 곧 테이블 밑에서 이예주에게 발을 콰직 밟히고 강제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난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소.”
심약하신 족장 나으리께서 누렇게 뜬 얼굴로 제 목에 걸린 냅킨을 쭉 잡아 빼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힐끗 그의 앞에 놓였던 음식을 보니 대부분이 소멸된 이예주와 조롱이의 음식에 비해 거의 줄어든 게 없었다.
“저녁을 먹고 저택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지만 내일로 미뤄야겠습니다, 레이디. 부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게 미리 말해 주겠습니까?”
“가고 싶은 곳이요?”
“정원도 좋고, 레이디만큼 아름다운 내 온실도 보여 주겠습니다.”
이예주는 족장의 말에 번뜩 제가 가야 할 곳이 떠올랐다.
옳다구나 싶어 그녀가 눈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말했다.
“혹시 서재나 도서관이 있을까요?”
“서재? 도서관?”
“네. 장기간 여행했더니 책이 보고 싶어서요, 하하하.”
대학 도서관도 리포트 때문에 전공 서적을 찾아볼 때가 아니면 잘 가지 않았던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재를 언급했다.
그러자 족장의 흐리멍덩한 파란 눈에 황홀함이 떠올랐다.
“이런! 제가 레이디의 심해 바다처럼 깊고 심오한 지식 수준을 미처 몰라봤군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내 저택의 서재는 3층 전체로, 이 도시의 도서관보다 크지요. 내일 바로 서재를 구경시켜 주겠소!”
“아하하, 그렇군요. 기대돼요. 감사합니다.”
이예주가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감사에 기분은 좋은 듯했지만 정말 피곤한지 족장이 힘겹게 혀를 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르으펙트한 당신을 이제야 만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군요. 내일이 무척이나 기다려집니다, 레이디.”
“아, 예. 얼른 주무시러 가세요.”
“부디 꿈에서도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마이 스윗 허르으으트.”
“…….”
이예주는 마지막 말에는 끝내 대답할 수 없었다.
먹은 것이 다시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른 잠이나 처자러 갔으면 하는 그녀의 간절함을 읽지 못한 건지 족장은 연신 느물느물 웃으면서 뒤를 돌아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마저 드시고 계세요. 다시 오겠습니다.”
여전히 웃는 낯의 일리야가 이예주와 조롱이에게 말한 후 족장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으웩!”
일리야가 떠나자마자 조롱이가 기다렸다는 듯 헛구역질을 했다.
두 사람이 완전히 식당을 떠난 것을 확인한 이예주가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조롱이를 휙 돌아보았다.
“야, 너 미쳤어? 엄마?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