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현장을 방문한 형사처럼 방 안을 샅샅이 훑던 이예주는 이내 몸에서 힘을 풀며 실소를 내뱉었다.
이곳에 정말 뭔가가 있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 시뻘건 미친놈이 감시랍시고 조롱이를 제게 붙일 리가 없었다.
제 부하 동물들을 끔찍이 여기는 놈이니.
그냥 지금을 즐기자. 언제 그놈에게 거짓말이 들통나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할지 모르니까.
그전에 조금이라도 힘을 부축해 두는 편이…….
그렇게 경계심을 내려놓자 제일 먼저 침대가 보였다.
대체 몇 주 만에 보는지 모를 킹사이즈 침대가 그녀를 반기듯 떡하니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이예주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으! 이게 얼마 만이야!”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자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씻은 듯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바삭하게 마른 냄새가 나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이대로 잠이나 먼저 잘까.’ 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노크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방 안으로 은은한 미소를 띤 일리야가 들어왔다.
그 뒤로 메이드 복장을 한 여자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방은 마음에 드시나요? 손님이 오시느라 급하게 치우긴 했는데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다른 방으로 옮겨…….”
“아, 아니요! 아니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정말.”
당치도 않는 말을 한다는 듯 이예주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넓은 방이 아니라 모텔 단칸방을 내줬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할 지경이었다.
마음에 든다고 연신 강조하는 그녀를 보며 일리야가 다시 미소를 짓고 이야기했다.
“다행이네요. 여기 있는 아이들은 레이디의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 목욕 시중이요?”
“네.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먼저 목욕부터 하고 쉬시는 게 어떨까요?”
이예주가 목욕 시중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이런 넓은 방을 준 것도 모자라 목욕 시중까지 들겠다니.
물론 제 비루한 몸뚱이를 남들에게 보여 줄 생각도 없지만, 이런 귀한 대접까지 받기에는 그녀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예주는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목욕 시중은 무슨…… 그냥 제가 대충 씻고 나올게요, 하하.”
“아닙니다. 손님 대접을 그런 식으로 하면 족장님께 저희가 혼이 나요. 부디 사양하지 마시고…….”
“아니요!”
일리야의 커다란 가슴에 눈을 못 박은 채 이예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 혼자 할게요. 족장님한텐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저 혼자 하게 해 주세요, 언니. 네?!”
“정 그러시다면…… 그러면 이 아이들이 옷 갈아입는 것만이라도 도와주게 해 주세요. 레이디 한 분을 위해 급하게 교육받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아무런 일도 주지 않고 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저 하나를 위해 교육을 받았다고?!
목욕 시중보다 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이예주가 입을 떡 벌린 채 일리야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일리야보단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피로가 사라지니 이번엔 부담감이 그녀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당황스러움에 연신 머리를 쓸어 올리던 이예주는 여전히 애원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야 때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옷만요. 속옷은 제가 입을 테니까…… 옷만!”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 허락에 일리야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같은 여자인 이예주조차 넋이 나갈 정도로 예뻤다.
칫, 하여간 예쁜 것들이 마음씨도 곱네.
왠지 모르게 드는 패배감에 씁쓸히 웃으며 그녀는 메이드 한 명이 건네는 속옷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다른 한 명에게 방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는 욕실을 안내받았다.
탁, 욕실 문이 닫혔다.
곧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자 일리야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환한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똑바로 감시해. 이상 행동을 보이면 즉시 보고하도록.”
인상이 전혀 바뀌어 버린 여자가 두 명의 메이드들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네, 일리야 님.”
메이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여자는 금발을 흔들며 이예주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저기요. 이 옷 꼭 입어야 돼요? 제 후드티랑 청바지는 어디…….”
이예주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제가 입고 있던 옷을 찾았다.
그러자 메이드들이 저들끼리 눈을 잠시 마주하는가 싶더니 입을 맞춘 것처럼 얘기했다.
“레이디, 참 아름다우십니다. 어쩜 이렇게 고우신지…….”
“레이디껜 이런 색의 보석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이건 어떠세요?”
“아니요, 저기요…….”
메이드 한 명이 그녀에게 불쑥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가져다 대었다.
난처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던 그녀는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밟고 그대로 자빠질 뻔하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섰다.
옷 자체는 곱고 예뻤다. 실크로 만들어진 건지 천 자락이 부드럽게 몸을 에워쌌다.
문제는 일리야가 입은 옷보다 더 심하게 비치고 파여 있고 하늘거린다는 점이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가 그대로 노출될 것만 같았다.
얇은 흰색 치마인지 천인지 모를 것을 몸에 걸친 이예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 옷 말고 딴 옷은요? 다른 옷은…….”
“죄송합니다, 레이디. 저희가 급하게 손님을 맞느라 다른 옷을 미처 준비하지…….”
“그럼 언니들이 입은 옷은요? 그런 치마는 더 없어요?”
“그보다 뒤의 머리카락을 조금 손질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머리가 많이 상하셨네요. 제가 금방 가위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레이디.”
“하…….”
개털 같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이예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파여서 가슴이 휑했다. 허리만 조금 숙여도 가슴골이 다 보이리라.
여자들이 옷을 입혀 줄 때 이예주는 속옷을 하나 더 걸치는 건 줄 알았다.
여자들이 그 상태로 화장을 해 준답시고 나섰을 때도 별 이상한 점을 못 느꼈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보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외부에 노출된 어깨가 차가워지자 이예주는 겉옷을 요구했다.
여자들은 펄쩍 뛰며 겉옷 따윈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번 실랑이가 오가자 그녀들은 이제 이예주의 의사 따윈 무시하고 말을 돌렸다.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럼요. 카디건이나 숄 같은 것도 없어요? 좀 추워서 그러는데요. 그냥 제 청바지랑 후드티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어머, 레이디. 추우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실내 온도를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건 땅에 머리가 닿도록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진짜 환장하겠네…….”
이예주가 한탄하듯 혼잣말을 하자 여자들이 더욱 펄쩍 뛰었다.
혹시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걸까? 보아하니 한 명은 외국계 동양인 같고 한 명은 완전한 서양인인데, 한국어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닐까.
“저기요, 언니. 제 말 들려요? 영어로 말해야 돼요? 익스큐스 미?”
“아니에요. 잘 들립니다, 레이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걱정을 하게 만들잖아!
이예주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가위를 가지러 갔던 메이드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예주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체념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며 여자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 봤자 말도 안 통할 테고, 불리하면 죄송하다고 머리부터 조아릴 게 뻔했다.
포기하고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한 명이 화장품을 들고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래, 네들 맘대로 해라, 맘대로.
“……그런데 한국어는 언제 배우신 거예요? 되게 잘하시네요.”
이예주가 메이드들에게 말을 붙였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가듯 물은 질문이었다.
“예? 한국어요, 레이디?”
“네. 한국어요.”
“그게 뭐죠?”
“한국에서 쓰는 말이요.”
“한국어……? 어디 나라 말입니까? 진, 너는 레이디께서 말씀하신 한국이란 곳을 아니?”
“아니요.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살랑살랑 머릿속을 헤집던 손이 이번에는 지압하듯 꾹꾹 머리 가죽을 눌렀다.
으윽, 좋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짜릿함에 신음하며 이예주는 ‘두 사람이 저를 웃기기 위해 콩트도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피식 웃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모르긴 뭘 몰라요. 지금 하고 있는 게 한국어구만. 모르면 나랑 어떻게 대화를…….”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별안간 벌컥 하고 방문이 열렸다.
이예주가 퍼뜩 눈을 뜨고 바라보자 어느새 파란색 천 쪼가리로 옷을 갈아입은 일리야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방에 들어왔다.
“어머, 레이디.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떤 남자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겠어요.”
일리야가 이예주를 바라보곤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답다는 말에 민망해진 그녀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메이드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머리가 괴물에게 뜯긴 뒷머리 길이에 맞춰 턱 밑까지 훌쩍 올라와 있었다.
4개월 전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했던 때와 비슷했지만, 입은 옷 탓인지 그보다 약간 더 세련되어 보였다.
분칠을 해 희멀건 한 얼굴과 쥐 잡아먹은 듯 시뻘건 입술이 눈에 확 띄었다.
스무 살이 넘고도 이런 짙은 화장은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밑에는 걸친 건지 두른 건지 분간이 안 가는 하늘색 천 쪼가리까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게다가 얼굴을 덮은 화장품 때문에 벌써부터 피부가 답답하고 근질근질했다.
이예주가 손을 들어 볼 근처를 긁자 메이드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아뗐다.
“레이디! 건들면 안 됩니다. 지금이 완벽해요!”
“아아, 예…….”
그녀는 무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일리야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저녁 준비가 끝나서 모시러 왔습니다, 레이디. 밑에서 족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꼭 이런 옷을 입어야 해요? 제발 제 옷을 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고 마냥 웃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메이드들처럼 말도 돌리지 않고 그녀의 말을 쉽게 묵살했다.
이 여자, 꽤 고단수인데? 미심쩍은 얼굴로 여자들을 따라 방을 나서며 이예주는 생각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중앙 계단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조롱이와 다시 조우했다.
한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조롱이의 입이 부루퉁하니 댓 발 나와 있었다.
세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는 이예주를 발견한 조롱이의 황금색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커다란 동공은 놀라움에서 충격, 충격에서 경악으로 그녀가 다가갈 때마다 굳어졌다.
“이, 이게 다 뭐예여, 누나!”
이예주는 조롱이에게 대답하는 대신 아래위로 조롱이를 훑어보았다.
열심히 때 빼고 광낸 자신과는 다르게 조롱이는 옷만 바뀌었을 뿐, 별 차이 없었다.
여자들이 하도 신경 써서 자신을 꾸며 주기에 조롱이는 맞지 않는 정장이라도 입힐 줄 알았건만, 옷조차 그 나이 또래의 옷이었다.
전에 입고 왔던 후줄근한 옷보다 더 깔끔할 뿐 딱히 크게 달라진 바는 없었다.
그런 조롱이와는 다르게 자신은 몇 시간을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조롱아.”
“헉, 누나. 진짜 이게 뭐예여!”
“그게, 내가 전에 입던 옷 달라고 했는데…….”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볼을 긁적였다.
옆에 있던 여자 한 명이 또 한 번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뗐다.
“빨리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여. 얼른여!”
“그게…….”
“난 몰라. 주인님 알면 죽어여, 누나! 힝, 주인님이 예주 누나 잘 감시하라고 했는데…… 이씨, 얼른 안 갈아입고 뭐……!”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족장님이 많이 기다리고 계세요. 음식이 식으면 안 되잖아요? 오랜만에 손님이 오셔서 저희도 많이 준비했는데, 하시던 말씀은 저녁 식사 후에 나누시면 안 될까요?”
그때 이예주와 조롱이 사이에 일리야가 끼어들었다.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만 떠들고 빨리 내려가라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조롱이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이예주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입은 걸 어쩌란 말이냐. 그리고 지금 자리에 없는 미친놈까지 들먹이며 겁박하는 조롱이의 불퉁거림은 듣기 싫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뒤를 여자들이 우르르 따랐다.
챙겨 주는 이 하나 없이 남겨진 조롱이는 아까보다 입이 한층 더 나온 모습으로 쿵쾅거리며 계단을 홀로 내려갔다.
“오,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레이디. 저는 팔족을 이끄는 족장입니다. 실례지만 레이디의 존함은…….”
팔족 족장이란 놈은 생각보다 젊고 느끼하게 생긴 남자였다.
금발에 푸른 눈의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저번에 숲에서 만났던 다리족 족장 노인과 비교해 보았을 때 느끼한 어투 빼고는 흠잡을 데 없는 멀쩡한 인간에 가까웠다.
이예주는 저에게 내밀어진 족장의 손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짓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야가 변함없이 미소를 띠며 족장의 손을 어서 잡으라고 눈짓했고, 조롱이는 부글부글 감정이 들끓는 황금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손을 잡지 않고 어색하게 바라보고만 있자 버터만큼이나 느끼한 발음이 다시 그녀의 고막을 자극했다.
“레이디? 혹시 무슨 일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