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골목길은 어둡고 습했다. 그리고 점점 좁아졌다.
처음에는 성인 대여섯 명이 일자로 서서 걸어도 너끈했던 골목의 폭이 몇 분 채 걷지 않아 급격히 좁아지더니, 급기야 나중에는 한 명이 간신히 끼여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여자는 익숙한 길인지 막힘없이 앞서 걸었다. 어둠 속에서 금발 머리가 반짝거렸다.
그 뒤를 조롱이가, 그리고 조롱이의 뒤를 이예주가 이어 걸었다.
골목길은 꺾어지는 곳이나 옆으로 빠지는 샛길 하나 없이 일자로 쭈욱 이어졌다.
축축하고 습한 물방울들이 툭 하고 정수리 위로 떨어지자 이예주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털어 댔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하수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급격히 좁아진 길처럼 그녀의 기분 또한 급격히 나빠졌다.
목을 움츠리고 말없이 조롱이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 걸은 지 수십 분째.
마침내 출구로 보이는 빛이 멀리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것이 반가워 이예주는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어디든 도착해서 쉼 없이 걸었던 발을 쉬게 하고 싶었다.
고픈 배도 채우고 가능하다면 꼬질꼬질한 몸도 좀 씻고 싶고…….
여자의 뒤를 이어 조롱이 그리고 이예주가 차례로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일행의 앞에 삭막하고 음침하던 도시와는 전혀 반대되는 별세계가 펼쳐졌다.
한눈에 봐도 아기자기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등 색색의 지붕과 새하얀 벽이 인상적인 마을이었다.
군데군데 활짝 핀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어두침침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화창해 보였다.
예쁜 동네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리야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운 미인들이었다.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은 있었지만, 모두들 하늘거리는 얇은 치마를 걸치고 종종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 바지를 입은 아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리여리한 여자들이 한쪽 나무 밑에 앉아 빨래를 개키거나 모여서 까르르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둥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개중 이예주와 눈이 마주치는 여자들이 환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이예주는 뻘쭘한 얼굴로 제가 입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어디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일리야와 비슷한 옷을 입은 갈색 머리 여자 하나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일리야 님, 오셨습니까? 이쪽은 말씀하신…….”
“네. 서쪽 대륙을 찾아 주신 손님들이에요. 족장님 저택의 식사 준비는 잘되고 있죠?”
“그럼요. 손님들이 묵을 방까지 다 치워 놨습니다.”
여자의 말을 은은한 미소로 경청하던 일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히 웃으면서 이예주와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피곤하시죠? 어서 저택으로 가서 씻고 같이 저녁을 들어요. 따라오세요.”
어안이 벙벙한 환대에 조롱이와 그녀가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마주했다.
이게 뭐야? 이 사람들 뭐야? 미심쩍음이 철철 흘러나오는 이예주의 눈을 마주한 황금안이 저도 모르겠다는 듯 곤욕을 잔뜩 담은 채 빛났다.
이제라도 돌아가야 하나? 이예주는 그들이 빠져나온 좁은 골목길을 뒤돌아봤다.
걸을 땐 잘 몰랐는데 그 길이가 꽤 긴지 반대쪽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용암 파도가 시뻘건 아가리를 벌린 채 뚝 멈춰 있는 도시와 쭉쭉 빵빵 미인들이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마을.
고작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것치고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심각하게 골목의 좁은 입구와 마을의 광경을 번갈아 보던 이예주는 문득 스윽 다가와 골목을 막아서는 인영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 언니 한 명이 커다란 가슴을 흔들며 이예주가 바라보는 골목 입구에 서서 그녀의 시선을 차단했다.
이예주와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웃음을 치는 것이 남자 꽤 홀릴 법한 여우였다.
허 참,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 모르겠다고 이예주는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
절대 앞에 달린 것이 등판인지 가슴인지 모를 제 신체와 비교가 되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 조롱이가 그녀의 후드 끝자락을 마구 끌어당겼다.
일리야라는 여자가 다시 앞서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끌려가도 되는 걸까…….
이예주는 미련이 남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돌려 그들이 빠져나온 좁은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어둠 그 너머에서 문득 멈춰 있던 검붉은 용암의 아가리가 움틀움틀 움직이다가 결국 마구 흘러넘치는 환영이 보였다.
들끓는 마그마가 순식간에 몰아닥쳐 좁은 틈새를 비집고 철퍽 튀어 올랐다.
“누나?”
이예주는 제 팔을 잡는 손길에 의해 실제 같은 환상에서 벗어났다.
“뭐 해여,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구. 거기 뭐 있어여?”
“어, 어, 아니…….”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여?”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눈치챈 듯 은근히 물어 오는 조롱이의 목소리에 현실을 깨우친 이예주의 얼굴을 조금 일그러졌다.
실제 같은 환상에 어느덧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정신이 해이해졌나. 왜 그런 환상을…….’ 하고 생각하던 이예주는 금방 ‘그럴 만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암 대폭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한순간에 고층 빌딩을 집어삼킨 거대한 용암 파도를 피해 죽자사자 도망친 것은 그녀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하도 고생을 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들이 멈춰 버린 진짜 마그마 덩어리들을 보고 생생하게 다시 살아났다.
“누나, 누나.”
조롱이가 다시 한 번 이예주의 팔을 뒤흔들었다.
성화에 못 이겨 흘긋 바라보자 조롱이는 걸음을 멈춘 채 그들을 바라보는 일리야 쪽으로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가자는 눈치 같았다.
이예주는 갈등했다.
머릿속이 온통 혼잡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곳이 1000년 전과 같다면 자신은 대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문’을 건너오기 전의 서울은 사방에서 뜨거운 용암이 몰아치는 불바다였는데!
“아니야.”
이예주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생각 마. 시뻘건 미친놈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아 이 서쪽 대륙에 도착한 건데.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엄마를 되살리고 망해 버린 제 인생을 바로잡아야 했다.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는 절대 이 연고지도 없는 미친 곳에서 죽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여기서 과거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잠시 볼일 보러 갔다는 미친놈이 오기 전까지……!
그 자식이 되돌아와서 그녀가 그동안 거짓부렁을 지껄여 대었다는 것을 알면 곧바로 정수리 위에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가자. 빨리 가야 돼.”
사람의 머리통을 달랑달랑 들고 다니던 무자비한 놈의 모습까지 생각이 미친 이예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 누, 누나.”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조롱이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일리야 때문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황금안을 도록 도록 굴리며 어쩔 수 없이 이예주를 따랐다.
팔족 땅은 불길하고 스산했다. 그리고 일리야라는 여자는 어딘지 찜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황조롱이는 별수 없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인간 여자를 철저히 감시하라던 주인님의 지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예주는 불타오른 과거를 외면한 채 1000년 동안 시간이 멈춘 땅에 완전히 들어섰다.
마을의 끝에 이르러서까지 이예주가 보고 눈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성들뿐이었다.
일리야에게 남편들이나 청년들은 없냐고 물어보려던 그녀는 곧 드러난 또 다른 광경에 아연실색해 입을 다물었다.
마을 정중앙에 난 길을 따라 걸으니 그 끝에 중세 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거대한 저택이 나왔다.
정교한 철제문이 이예주와 조롱이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어디선가 근위병이나 혹은 마차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철제 대문을 지나치자 강렬한 꽃향기가 이예주의 코를 찔렀다.
중앙에서 저택의 현관까지 쭉 나 있는 포장된 길 옆으로 장미, 제비꽃, 히야신스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이 난무하게 피어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모든 꽃들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고 피어 있을 거라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으스스해졌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일행은 저택 현관에 도착한 상태였다.
일리야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 손으로 양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는지 문이 소리 없이 스윽 열렸다.
자신과 조롱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내부는 굉장히 화려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와 그에 반사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리석.
중앙에 있는 계단은 난간까지 온통 황금색이었다.
저택 내부의 꿈 같은 웅장함에 이예주는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일리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았다.
“손님들의 방은 2층에 준비해 뒀습니다. 2층으로 가시면 다시 방을 안내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방으로 돌아가 씻고 여독을 풀고 계세요.”
“예? 아…….”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다시 말씀드리러 가겠습니다.”
“……네, 네.”
어서 가라는 듯한 일리야의 몸짓에 이예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조롱이를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메이드 복장을 입고 있는 여자가 정말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손히 이예주와 조롱이에게 목례를 올린 여자가 앞서가며 1층만큼 넓은 2층을 안내했다.
그녀의 방은 모퉁이를 돌아야 나오는 거의 끝 부분에 위치했다.
방문을 열어 주는 여자의 친절을 사양치 않으며 이예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조롱이가 따라 들어가려 하는데 불쑥 여자가 조롱이의 앞을 막아섰다.
“손님의 방은 다른 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에엑? 왜여? 저는 누나 곁에 있어야 되는데여?”
조롱이가 화들짝 놀라 항의했지만 메이드는 난처한 웃음을 지을 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예주는 처음에는 조롱이와 떨어진다는 생각에 약간 멈칫했지만, 조롱이의 말을 듣고 바로 마음을 돌렸다.
저 녀석이 자신을 감시하려는 것은 아무리 눈치가 둔한 자신이라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롱이가 뼛속까지 나쁜 새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쁘긴커녕 착한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찌 됐건 황조롱이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놈의 부하였다.
게다가 그놈이 친히 자신을 감시하라고 명을 내린 눈치 빠른 감시자!
괜히 조롱이와 함께 있다가 과거로 내뺄 궁리만 하는 제 음흉한 속을 들켜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어딜 숙녀 방에 같이 있겠다는 거야? 얼른 네 방으로 가.”
그녀가 조롱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롱이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빨리 안 가?!” 하고 눈을 부라리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조롱이가 불쌍한 얼굴로 몇 번 더 뒤돌아보았다.
어쩐지 녀석이 눈에 밟혔지만 그녀는 모른 척 방문을 쾅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저택의 저력을 보여 주듯 방 안 또한 넓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호텔 스위트룸 같은 방.
그 모습에 현실 감각이 떨어져 제 볼을 꼬집어 보던 이예주는 문득 제게 베풀어진 이런 과분할 정도의 환대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으로 넘어온 이후 그녀가 만난 말이 통하는 인간이라곤 틈만 나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시뻘건 눈의 미친놈과 외눈박이 삼 형제 그리고 그들의 아비인 망할 노인네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말도 잘 통하는 인간들을 만났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가 이곳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일리야라 소개한 여자는 상냥했고 더없이 고마운 친절을 베풀고 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느낌이 구리지? 팔족인지 뭔지라서 그런가? 숲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다리족들과 같은 시간족 뭐시기라서?
그동안 너무 인간 같지 않은 끔찍한 놈들을 많이 만나 왔기 때문일까.
괜스레 드는 의구심에 이예주는 가느다란 눈초리로 방 안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뭔가 구리다 싶으면서도 딱히 위화감이나 부조화한 부분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