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48)화 (48/319)

“여긴 시간이 멈춘 땅이에여, 누나.”

“……응?”

이예주가 시선을 잡아끈 조각상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떼고 조롱이를 휙 돌아보았다.

“세기말 용암 폭발 전부터 팔족 인간들이 모여서 살았던 곳이라 했어여. 세기말 용암 폭발이 일어나자 팔족 인간들이 시간을 멈췄어여.”

“시간이 멈춰……?”

중구난방으로 세워져 있는 차들을 피해 1차선 도로를 건너는 그녀와 조롱이를 발견한 남자아이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롱이의 말을 들은 이예주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걸었음에도 날이 저물거나 어두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도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 어둑어둑하고 우울한 날씨 그대로. 

하늘에 시꺼멓게 몰린 구름들도 변함없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고개를 바짝 쳐올려 하늘을 올려다보고 걸었다. 

구름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렇게 시꺼멓게 몰려온 구름 뭉치들이 단 한 치도. 

하늘에 박제라도 된 것처럼 단 한 치도 말이다.

“시간을 멈췄다고?”

“시간이 멈춘 땅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자랄 리가 없잖아여.”

“…….”

“히카톤에게 짓밟히면 짓밟힌 채로. 먹을 것을 뜯어 먹으면 뜯어 먹은 그대로. 고갈되긴 해도 더 추가되는 것은 없어여. 여기 사는 인간들은 히카톤에 대항하지도, 딱히 살 방법을 강구하지도 않아여. 어떻게 이딴 곳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는지 의문이에여.”

머리끝부터 척추를 타고 전율이 쫘악 전신을 강타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소름이 돋을 때와 비슷한 저릿함이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멈춘 땅. 

세기말 용암 폭발 때 시간을 멈췄으면 1000년이나 멈춘 땅이란 소리다. 

1000년 전부터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예주는 조각상 하나를 더 지나쳤다. 

정말 징그럽게도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안 그래도 음침한 분위기를 기괴한 모습의 조각상들이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저 조각상들은? 네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많아졌다고 했잖아. 추가되는 게 없으면 저런 건 어떻게 만들어 대는 거야?”

“어? 그러게여. 저런 건 대체 왜 만들어 대는 거지?”

불쑥 떠오른 생각에 이예주가 묻자 조롱이 또한 의문 어린 소리로 대답했다. 

“뭐. 팔족 인간들이 멈춘 땅이니 팔족 인간들은 예외인가 보져. 무슨 생각으로 저런 것들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여.”

앞서 가던 아이가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휙 몸을 꺾었다.

“……쟤도 그럼 팔족이야? 아까 그 구걸하던 사람들도 그럼…….”

그녀가 아이가 사라진 모서리를 손가락질했다. 조롱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아니에여. 시간족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면 잡아먹었지, 구걸 같은 거 안 해여. 아마 사막을 떠돌다가 버려진 일반 인간들이거나 시간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돌연변이들일 거예여.”

아이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걷던 조롱이와 이예주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어두컴컴해진 주위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도로와 건물은 없었다. 

“……헐.”

그녀는 아까 자신들의 뒤를 따라왔던 사람들을 바라봤을 때보다 커다랗게 입을 떡 벌렸다. 

커다란 빌딩이 해를 가려 그림자를 드리워 내듯, 그들의 앞을 막아 선 것은 커다란 파도였다. 

어느 빌딩보다도 더 큰 파도. 

이예주는 서울 한복판에 용암이 쏟아져 내려 정신없이 ‘문’을 건너던 때를 떠올렸다. 

붉은 핏물을 뚝뚝 흘리는 거대한 용암 파도가 해일처럼 몰려와 빌딩을 집어삼켰었다. 

그때의 그 용암 파도가 지금 그녀의 앞에 시뻘건 아가리를 벌린 채 뚝 멈춰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태워 먹을 것처럼 검붉은 용암 덩어리 수십 개가 공중에서 멈춰 있었다. 

이미 떨어진 용암 덩어리들은 바닥에 떨어진 반동력으로 다시 허공에 솟구친 채 굳어 있었다. 

철퍽하는 환청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 외에 자동차를 덮쳐 차체를 반 이상 녹이고 있는 마그마, 주택을 집어삼키고 금방이라도 질질 흘러내릴 것 같은 걸쭉한 액체. 

그것들이 도시 한복판에 위태롭게 멈춰 있었다. 

이예주는 다시 집채만 한 파도를 올려다보았다. 목을 쭉 쳐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미친…….”

시간이 멈춘 땅이라는 조롱이의 말이 통렬하게 와 닿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 미친 곳을 마냥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무슨 이딴 곳이 다 있지? 시간이 멈췄다니. 이게 말이 되나? 

이예주는 제가 혹시 꿈을 꾸나 하고 슬쩍 왼쪽 손목을 들었다. 

흉측한 검은색 흉터가 자글자글하게 손목을 가르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여긴 아직도 그대로네여. 엄청 옛날에 왔었는데 하나도 변한 게 없어여.”

조롱이가 옆에서 주절댔다. 

그러자 그때까지 한쪽에 멍하게 서 있던 남자아이가 주춤주춤 조롱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제 손으로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다. 

조롱이가 ‘아!’ 하더니 서둘러 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여기 있어여. 데려다줘서 고마워여. 뺏기지 말구여.”

조롱이는 제 품에서 곡식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통째로 남자아이의 손에 그것을 넘겼다. 

조롱이가 채 건네기도 전에 그것을 낚아챈 아이가 인사도 없이 서둘러 모퉁이를 돌아 뛰어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조롱이가 ‘힘센 인간한테 뺏기면 안 될 텐데.’ 하고 오지랖 넓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다 줘도 돼?”

“우리 길잡이를 하려고 아까 얼마 안 주웠을 거예여. 눈치가 빠르네여. 눈앞에 있는 것을 줍는 것보다 여기까지 데려다주는 게 더 수입이 좋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거져. 그리구 이제 다시 곡식 뿌릴 일도 없는데여, 뭐.”

그렇게 말하며 조롱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이예주는 여전히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용암 파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아까 구걸하는 인간들을 보았을 때는 그저 심란하기만 하던 머리가 이제는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혹시 1000년 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녀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미래의 모습이 단순한 사고를 방해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벽같이 솟은 채 멈춰 있는 용암의 근처로 다가갔다. 

혹시 이것도 조형물이 아닐까. 이 도시에는 조각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 같아 보이니 이것 또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진짜 같은 조각.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조롱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제지했다.

“만지지 마여! 그냥 멈추기만 한 거지, 식거나 굳은 거 아니니까여. 위험해여. 떨어져여, 예주 누나.”

“모르겠어.”

화들짝 손을 떼며 이예주가 거대한 용암 파도에서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시간족은 또 뭐고, 시간을 멈추는 건 다 뭐야.”

“…….”

“시간이 멈춘 거면 여긴 아직 현대일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난 과거로 가야 하는데 여긴 2017년에서 시간이 멈춘 거니까…….”

“예, 예주 누나?”

“……설마. 여긴 그럼 현대야? 아니, 아니야! 아니야!”

홀로 염불 외듯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이예주가 갑작스레 제 머리를 거세게 쥐어뜯으며 마구 고개를 뒤흔들었다.

“흐흡, 하흑…… 나 집에 갈 수 있는 거 맞아?” 

“…….”

“흐흑. 어떡해, 어떡하냐구!”

그녀가 신음과도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모르겠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 

서쪽 대륙으로만 오면 과거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녀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예주 누나.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여. 진정하고…….”

“진정 못해! 어떻게 진정해, 어헝! 집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구만!”

“누나 집이여? 다, 다리족이여? 아니면 인간들 모여 사는 동쪽 대륙…….”

“하…… 미치겠네. 제발…….”

이예주가 울먹거리며 속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아낌없이 터뜨렸다.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자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예전처럼 손목이라도 그어야 하는 걸까. 

아니, 아니지. 여기에는 온갖 위험 천지이니 굳이 손목을 긋는다든가 자해를 하지 않더라도 ‘문’이 알아서 잘만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최단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연속해서 ‘문’을 건넜지 않은가. 

그렇지만 ‘문’을 건너기도 전에 죽으면 어떡하지? 망할! 

그러고 보니 자신의 힘에 대해 남자에게 설명해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있다. 

남자가 말했다. 

그녀를 서쪽에다 데려다주고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인간들을 만나면 친절을 발휘해 같이 죽여 주겠다고.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인간이 또 있을 리도 없겠지만, 있다 해도 죽일 것이고 없다 해도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하다, 그 미친놈은.

“하…….”

이예주가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조롱이가 그녀를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무서워서 그래여, 예주 누나? 걱정 마여. 팔족들이 주인님께 몰살당하지 않는 이상 여기 시간이 흐를 것도 아니구여. 주인님도 여기 팔족 땅에 사는 인간들이 가장 불쌍한 인간들이라고 했으니 바로 죽이고 그러진 않으실 거예여.”

“불쌍? 그 인간이?”

이예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황조롱이는 말도 안 된다는 그녀의 부정에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고 반박했다.

“예주 누나, 자꾸 주인님을 아무나 막 죽이는 무뢰배로 보는데여. 주인님은 항상 관대하게 벌을 내리시는 거예여. 죄 없는 인간들까지 마구 잡아 죽이는 건 아니라구여. 얼마나 공명정대하신대여.”

“……그래그래. 퍽이나 그러시겠지…….”

무조건적인 찬양을 흘려들으며 이예주가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번 말문이 터진 조롱이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그리구여. 저두 처음에는 주인님 말씀이 이해가 안 갔는데여. 여기 팔족 땅에 사는 인간들이 제일 불쌍타 하신 건 맞는 말 같아여.”

“불쌍하긴 뭐가? 위험할 때마다 시간도 멈출 수 있고. 나도 이런 능력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이런 망할 능력 말고. 그녀가 한탄처럼 대꾸하자 조롱이가 도르륵 눈알을 굴렸다.

“생각을 해 봐여. 시간이 멈춘 곳에서 산다는 거여.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시간 속에서여. 시간이 흐르는 곳의 다른 인간들은 나이를 먹고 죽어 가져. 애정을 준 상대는 죽어 버리고 나만 계속 똑같은 자리에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여.”

그 말을 내뱉은 조롱이가 조심스레 제 위에 떠 있는 용암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만 같은 그것이 생생한 색감을 자랑했다. 

조롱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팔족 인간들은 시간을 멈추고 나서 왜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하지 않았을까여?”

“…….”

“……이 용암 때문인가? 오랜 시간 동안 시간을 멈추려면 끊임없이 힘을 쏟아부어야 할 텐데여. 팔족들은 원래 시간을 멈춘 사이에 자기에게 필요한 행동을 하거든여. 예를 들면 뭘 훔치든지, 아니면 위험으로부터 도망가든지여. 저 같으면 시간을 멈추고 다른 데로 도망갔을 거예여.”

“위험해서 그런 게 아닐까? 저런 용암 덩어리가 사방에서 쏟아져 안전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나 보지.”

이예주가 서울 한복판을 덮쳤던 용암을 떠올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나 조롱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글쎄여. 예주 누나나 저나 1000년 전엔 없었으니까여. 단정 짓긴 어렵지만…….”

이예주는 뜨끔해서 황급히 입을 다물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멈춘 건지, 멈춘 시간 속에 갇힌 건지…… 잘 모르겠네여.”

그 말을 끝으로 조롱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예주는 웃지 않았다. 

남이야 시간을 멈추든, 용암에 깔려 뒈지든,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는 일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손님이 오셨다는 전달이 늦어 마중을 이제야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가느다란 미성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가 휙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뉴 힐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금발 여성이 어느 틈에 골목에서 튀어나와 서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귀신이 붙었나. 왜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서 사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누, 누구세요?”

“저는 일리야라고 합니다. 팔족 일원이죠. 족장님의 저택까지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세요.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금발 머리, 푸른 눈의 서양인이었다. 

외국인이 분명한데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했다. 

발음이 어눌한 것 또한 아니라서 이예주는 내심 놀랐다.

간단히 제 소개를 마친 일리야라는 여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은 옷이 펄럭하고 휘날렸다. 그 밑으로 매끈한 여자의 다리가 보였다. 

이런 음침한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스러운 천 쪼가리였다. 

“따라가도 되는 거야?”

이예주가 의심이 가득 찬 눈을 가늘게 뜨고 조롱이에게 턱짓했다. 

“일단 가 보자구여.”

조롱이가 대답하면서 여자의 뒤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섰다. 

여전히 꺼림직했지만 그녀는 별수 없이 그 뒤를 조심히 따랐다. 

일단은 구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정상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멈춘 도시 한가운데에서 야시시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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