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시간이 멈춘 땅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모래가 뚝 끊기고 나타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들어서며 이예주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뭐가여?”
옆에서 조롱이가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황금안을 둥그렇게 뜨며 질문했으나, 사방을 둘러보느라 바쁜 그녀는 조롱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시의 초입 부분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문’을 넘어 1000년 후로 추정되는 곳으로 온 후 온갖 빌어먹을 괴물들에게 시달려 온 그녀가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던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발견하게 된 인간의 흔적은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길 위에 마구잡이로 세워져 있는 자동차들과 도로를 따라 쭉 늘어서 있는 건물, 가로등들이 보였다.
그러나 자동차도 건물도 가로등도 무언가에 짓밟힌 듯 어느 하나 성한 데라곤 없었다.
건물은 무너진 채로 흉측한 철근들을 그대로 노출한 상태였고, 아스팔트는 무언가에 푹푹 파여 들쑥날쑥 솟아 있었다.
그 위로 바람에 쓸린 정체 모를 쓰레기들이 나뒹굴었다.
군데군데 무질서하게 나동그라져 있는 자동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예주가 익숙한 자동차 브랜드 로고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동그라미가 네 개 엮여 있는, 한국에서도 알아주던 수입차가 쥐포처럼 형체도 알 수 없을 만큼 바짝 짜부라져 있었다.
그 위로 뿌연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서 브랜드 로고가 아니었다면 어떤 차종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끼익 끼익.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나는 쇳소리에 이예주가 고개를 돌렸다.
이 난장판 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용케 붙어 있던 녹슨 표지판이 기울어진 채 바람에 따라 끼익하고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 Welcome to New Hilton ]
영문화권 도시인지 세월의 풍파를 맞은 초록색 표지판과 그 위의 흐릿한 흰색 스펠링이 안쓰럽게 흔들거렸다.
“여기가…… 여기가 어디지? 왜 바다도 안 건너고…… 어떻게 영어 쓰는 곳이랑 함께 있는 거야. 여기 한반도 아니야? 아시아 대륙 아니냐고……!”
이예주가 표지판 위의 영문을 보며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한국 옆에 영어를 쓰는 나라가 있었나?
아니다.
한국 옆에 붙어 있는 나라는 북한이랑 중국밖에 없었다.
설사 대륙판이 미친 듯이 움직여 일본이 한국 옆에 붙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아메리카 대륙이 태평양을 건너서 붙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동안 자신이 ‘문’을 건넜을 때 한국을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그녀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숨이 거칠어진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조롱이가 되물었다.
“아시아 대륙이 어디에여? 바다 건너여? 바다 건너에도 아무것도 없는데여?”
“…….”
“여긴 서쪽 대륙이에여, 누나. 대륙의 서쪽이여! 떨어져 있던 땅덩어리들은 용암 대폭발 때 대부분 다 없어지고, 지금은 우리가 있는 이 땅덩어리 하나밖에 없다고 저번에 얘기해 줬잖아여. 아! 근데 여러 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거라고 주인님이 저번에 말씀해 주셨는데…….”
“…….”
“예주 누나가 살던 곳은 정말 엄청 외진 곳인가 봐여, 이런 것도 모르구.”
그녀가 살던 곳은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건너온 미래는 1000년이나 지난 지구였으니까.
이예주는 조롱이가 조잘대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더더욱 심각한 얼굴로 도시 안에 들어섰다.
유령 도시.
며칠 내내 사람이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간신히 사막을 넘어왔건만,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한 도시뿐이었다.
분명 팔족인지 뭔지가 살고 있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 버린 도시의 냄새에 아연해진 그녀의 곁으로 조롱이가 다가와 섰다.
“히카톤의 짓이에여. 사막에 있는 인간 부락들을 벌써 다 쓸어 버렸나 봐여. 먹을 게 없으니까 팔족의 땅까지 와서 난동을 부려 놨네여. 예전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더 안쪽은 멀쩡하려나여?”
조롱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이예주의 눈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괴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기세를 알아챘는지 조롱이가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주인님이 터뜨려 놔서 당분간은 꿈쩍도 못할 거예여.”
그럼에도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을 풀지 않고 자동차의 잔해를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도시를 가리키던 화살표 표지판을 지나친 그녀는 완전히 그 안에 들어섰다.
“예주 누나.”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의 팔을 조롱이가 뒤에서 낚아챘다.
“왜?”
“이번엔 약속해야 돼여. 절대 제 근처에 떨어지지 않기루여. 그리고 절대 혼자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되여.”
조롱이가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꼭 어린아이 훈육하는 것 같은 말투에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 몸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어. 너는 네 주인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처럼…….”
“주인님이 이번에도 멋대로 행동했다간 까마귀 둥지 한가운데에 버리고 갈 거라고 전하랬어여.”
“…….”
이예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절거리던 입을 닫았다.
정말 욕이 나오지 않으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그렇게 자신이 끔찍해 마다 않는 소리만 족족 해 댈 수 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에 조롱이가 금안을 도로록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유를 좀체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럴 때 보면 멍청한 새인 게 분명한데, 중요한 때엔 어쩜 그렇게 눈치가 귀신같은지.
“왜여? 까마귀가 왜여?”
탄식 어린 눈으로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예주를 보며 조롱이가 뻐끔거리며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머리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 얄미워 죽을 것 같은 조롱이만 제게 남겨 두고 떠나간 남자에 대한 원망이 물씬 솟아올랐다.
답답해 터진 새대가리지만 정작 그녀에게 붙이기엔 더없이 유능한 감시자라는 사실에 탄식했다.
이 도시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알아보고 다녀야 되는데, 과연 이 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 내고 그것을 알아보러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 가기 전에 빨리 대답해여!”
대답 없는 이예주를 보며 아직까지 그녀의 한쪽 손을 움켜쥐고 있던 조롱이가 붕붕 팔을 흔들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루여! 약속할 거져?”
“어, 어…… 으응…….”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조롱이가 부득부득 협박했다.
“확실히 대답해여! 주인님한테 다 이를 거에엽!”
“죽을 줄 알아.”
“씨잉, 여기까지 별 탈 없이 안전하게 데려다줬음 고마워해야지. 주인님이 볼일 보러 가셔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줄 알아여…….”
부릅뜬 이예주의 눈빛에 기가 죽은 조롱이가 바로 꼬리를 내리고 투덜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은 그녀가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 주인이 볼일 보러 가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잊었어여? 누나 계약 조건이여. 여기 서쪽 대륙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계약 만료잖아여?”
“……헉!”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생각에 이예주는 그제야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짧게 숨을 들이켠 그녀의 얼굴이 까마귀 둥지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창백해졌다.
이예주는 이제 머릿속이 복잡해진 걸 떠나 너무 얽히고설켜 터져 버리기 직전임을 알았다.
시뻘건 미친놈한테 숲에서부터 했던 거짓말과 도망. 도망, 도망!
그녀가 지껄였던 모든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안다면 남자가 자신을 찢어 죽일 테다.
그도 모자라 친히 손수 눈깔을 뽑아 까마귀들에게 던져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 남자가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남자가 오기 전에 과거로 가는 방법을 찾아서 이 지긋지긋하고 빌어먹을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제 과거로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명줄이 달린 필수 과제.
“표정이 또 왜 그래여? 누나도 여기 소문 들었어여?”
얼굴에 급격히 먹구름을 드리운 채 허공을 사납게 쏘아보는 이예주를 보고 조롱이가 헛다리를 짚었다.
세상의 온갖 불행을 짊어진 듯한 암울한 표정의 그녀가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소문은 무슨 소문.”
“가끔 여기 팔족 땅에서 여자들이 사라진대여. 그것도 일반인이나 시간족이나 상관없이 모두 인간 여자들만여.”
“여자가 사라진다고?”
“네. 이상하게 여자들만여. 그렇다고 팔족 여자들이 사라지는 건 또 아니에여. 언제나 예주 누나처럼 이렇게 서쪽 대륙에 처음 방문하는 약한 여자들만…….”
조롱이가 겁주듯 음침한 얼굴로 다가왔다.
“……여자들만?”
그녀가 ‘자신처럼’이란 소리에 긴장 서린 눈빛으로 조롱이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무서운 이야기를 끝맺듯 조롱이가 눈에 힘을 주고 조용히 속삭였다.
“……쥐도 새도 없이여.”
휘이잉. 조롱이의 말이 끝나자 왠지 모르게 스산한 바람이 그녀와 그의 사이를 휘젓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따라 종이로 추정되는 쓰레기가 펄럭 휘날렸다.
이예주는 의구심에 가득 찬 얼굴로 다시 한 번 그들 앞에 펼쳐진 도시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알고 있던 도시와는 확실히 다른, 썰렁하고 황폐한 나머지 괜히 기분까지 나빠지는 곳이었다.
왠지 모르게 드는 오싹함에 그녀가 두 손으로 제 몸을 껴안았다.
“야, 무섭게 그런 얘긴 왜 해? 하지 마, 하지 마.”
그러자 조롱이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거고 걸음을 옮겼다.
“뭐, 팔족 땅은 인간들이 항상 지나치는 곳이니까여. 인간들이 많이 몰리는 곳일수록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여.”
“야, 조롱아. 근데 여기 사람 많은 거 맞아? 왜 이렇게 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글쎄여. 안에 더 가 보면 있겠져 뭐.”
이예주는 앞서 걷는 조롱이를 허겁지겁 뒤따라가며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방금 전에 사막에 있을 때만 해도 쪄 죽을 것 같이 뙤약볕이 쨍쨍하게 내리쬐었건만, 도시는 잿빛 구름에 휩싸여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폐허를 방불케 하는 고층 건물들이 분위기를 더 삭막하게 했다.
반가운 도시 모습임은 분명했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적막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정말 어떻게 돼먹은 미래인지 정상적인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롱이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