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45)화 (45/319)

“독기 때문에 입술이 부르터서 그렇다. 네가 입 닥치고 가만히만 있어도 더 이상 터질 일은 없겠지.”

“……부르터?”

꼬리잡기하듯 남자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이예주가 멍하니 그 말을 곱씹어 보는 듯하더니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댔다. 

가만있으라고 타박하는 남자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르작대던 그녀는 기어이 제 후드티의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내 들었다.

“짠.”

주인의 거친 몸놀림 속에서 용케도 붙어 있던 이예주의 스틱형 립밤이었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대신해서 립밤의 뚜껑을 열어 던진 그녀는 뚜껑 없는 립밤을 남자의 손에 고이 쥐어 주었다. 

“뭐에 쓰는 물건이지.”

“발라 줘.”

가만히 있어도 헛웃음이 터져 나올 마당에 인간 여자가 감히 명령하듯 발칙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모아 앞으로 쭉 내미는 것이 아닌가. 

흐리멍덩한 제 두 눈까지 꾹 감는 바람에 람은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한숨처럼 중얼거린 남자가 결국 손에 쥔 립밤을 제 품에 안겨 있는 인간 여자의 입술 위에 대충 덧발랐다. 

그 손길이 어찌나 성의가 없던지 립밤이 이리저리 뭉쳐서 입술에 스며들긴커녕 피와 엉겨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 위에 대강 뭉개진 립밤이 떨어져 나갔을 때 이예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헤벌쭉 웃었다. 

그 무방비한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람은 문득 왼쪽 가슴께가 이유 없이 저릿하게 죄어 오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이건 무슨 감각이지?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의 코끝에 처음 맡아 보는 향이 아른거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이예주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통째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고 싶은 달달한 냄새가 그의 안면으로 훅 풍겨 왔다. 

“……이상한데.”

“…….”

“네게서 단내가 나는군.”

“……단내? 내 립밤은 무색 무취 무향인데…….”

이예주가 멍하게 대꾸하며 홀린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남자의 시뻘건 눈에 그녀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시 귓가에 띵띵 이명이 울려 퍼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자의 빨간 눈이 각인처럼 눈 안에 계속해서 박혀 들었다. 

남자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빨간 혀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간질이듯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고 지나갔다. 

“그래, 단내. 피 때문인가.”

“……피?”

“아까 낮에도 사방으로 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바람에 온갖 삿된 것들이 몰려들 뻔했지 않느냐.”

남자가 이예주의 입술 바로 위에서 속살거렸다. 이예주가 문득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잘생겼어…….”

“……뭐?”

기습 공격 같은 그녀의 말에 남자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예주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녀는 불현듯 덥석 양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남자가 아차 할 틈도 없이 그 입술에 쪽, 제 입술을 찍었다가 떼어 냈다. 

“……뽀뽀.”

남자의 시뻘건 동공이 눈에 띄게 커졌다. 

“이게 무슨…….”

람은 다시 입술 위를 쪼는 말캉함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츄웁, 인간 여자의 혀가 그의 아랫입술을 한 번 쭉 빨고는 감질나게 떨어져 나갔다.

“이건 키스.”

해괴한 소리를 지껄여 대고는 인간 여자가 백치처럼 까르르 웃었다. 

쿵, 심장께가 다시금 저릿하게 죄어 왔다.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람은 들끓는 무언가를 간신히 자제했다. 

“너무 잘생겼어어…….”

그러나 다시금 제 보드라운 입술을 밀어붙이는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이예주의 입이 ‘웁’ 하고 틀어막혔다. 남자는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에 달라붙어 날숨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물컹한 혀가 구렁이 담 넘듯 벌어진 이 사이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이예주의 입안 곳곳을 범하던 그것이 혀를 잡아채 옭아매었다. 

츄웁, 마지막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빤 남자가 입술을 놓아주고 고개를 들었다. 

람의 시뻘건 두 눈이 오싹할 정도로 번뜩였다. 

“……어린 것이.”

그가 이를 갈듯 내뱉었다.

“이런 요망한 짓은 어디서 배운 거지.”

가쁜 숨을 내뱉는 인간 여자의 입술이 남자의 타액으로 젖은 채 부풀어 있었다. 

이예주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동시에 남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여자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람을 졸랐다.

“……더 줘.”

시뻘건 눈에서 이지가 사라졌다. 람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이예주의 부푼 입술이 다시 그의 입속으로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       *       *

“……헉, 헉.”

누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에 이예주가 반짝 눈을 떴다. 

자고 일어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맑았다.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뜨거운 사막, 모래 위였다. 

분명 간밤에 오아시스가 있는 아름다운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이었나. 

마치 술 먹고 일어난 다음 날처럼 간밤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잠시 사색에 잠겨 있던 이예주는 “헉헉” 하고 다시 한 번 거친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사막 말고 제 주변을 확인했다. 

비리비리한 누군가가 그녀를 등에 업고 힘겹게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이미 이런 식으로 그녀를 끌고 온 지 한참 된 듯 뒤를 바라보자 모래 위로 질질 끌려온 자국이 끝없이 나 있었다.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저를 업은 조막만 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조롱아.”

“헉, 헉…… 깼어여?”

시뻘게진 얼굴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보았다. 

볕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조롱이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분명 집어 던졌던 검은 천이 제 얼굴을 꽁꽁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려도 돼.”

“네.”

“아악!”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새대가리가 이예주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게 미쳤나!” 

“시, 실수예여! 실수! 너, 너무 힘들어 그만……!”

조롱이가 사색이 되어 제 실수를 인정했다. 이예주는 일단 화를 가라앉히며 보이지 않는 인영을 찾았다.

“네 주인은?”

“주인님은 서쪽 대륙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있다고 하셨어여. 그래서 일단 저랑 예주 누나만 먼저 팔족 땅에 가 있으라고…….”

“뭐?! 너랑 나랑 둘이 어떻게!”

그녀는 못 미덥다는 눈으로 조롱이를 바라보며 버럭 성을 냈다. 

그러자 조롱이가 발끈해서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 

“예주 누나만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있으면 되거든여! 진짜, 애도 아니고 말 좀 들어여!”

“사고를 치긴 누가!”

“누구긴여! 어제 예주 누나 치료하느라 주인님이 얼마나 힘을 많이 쓰셨는데여!”

“치료?”

사고뭉치 취급을 하는 조롱이에게 눈을 부라리던 이예주가 문득 치료란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에엑? 뭐야, 어제 기억 안 나여?!”

“무슨 기억?”

“히카톤한테 얻어맞고 독에 중독돼서 주인님이 치료해 주려고 봤더니! 누나가 죽음에 반쯤 잠긴 몸이어서 주인님이 누나한테 검은 파편의 조각을 심어 줬잖아여! 씨이! 히잡은 왜 집어 던져 가지고! 바람에 날아가서 그거 찾아오느라 쉬지도 못하고! 밤새워 그 근처를 뒤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여!”

조롱이가 떽떽거리며 열변을 토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검은 파편의 조각을 심느니 뭐니 듣고도 믿기지 않을 소리를 해 더 현실감이 떨어졌다.

“진짜 기억이 안 나.”

“이씨! 이거 봐여!”

조롱이가 결국 폭발한 듯 이예주의 왼쪽 손목을 잡아채 그녀의 눈에 들이댔다. 

“보이져!”

“헐! 이, 이거 왜 이래?”

조롱이가 보여 준 손목은 가히 경악할 만했다. 

안 그래도 흉측해서 언제나 그녀의 콤플렉스였던 흉터가 온통 시꺼먼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꼭 대리석처럼 흉터의 표피가 반짝반짝 광이 났다.

“이게 뭐야!”

괴기스럽게 변한 제 손목을 바라보던 그녀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흉포하게 소리 질렀다. 

“뭐긴 뭐예여! 검은 파편의 조각이 자리 잡은 거지. 이제 예주 누난 빼도 박도 못하고 주인님에게 종속됐어여. 축하해여! 인간으로선 예주 누나가 처음일걸여?”

“닥쳐! 이, 이건 말도 안 돼!”

비꼬듯 깐죽대는 조롱이를 향해 이예주가 윽박질렀다. 람이 만약 주변에 있다면 필히 멱살을 잡고 말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흉측한 흉터를 사람 기절한 틈을 타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놔?! 너무 어이없고 기가 차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네 주인 당장 오라고 해! 이거 원래대로 해 놓으라고!”

“그렇게 안 했으면 누나 죽었어여!”

“……뭐?”

“그니까 왜 손목을 그었어여?! 주인님 말로는 죽을 뻔한 목숨을 예주 누나의 힘이 억지로 붙들어 놓은 거래여. 씨잉, 주인님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힘을 쏟아부었는데!”

왜 손목을 그었냐는 조롱이의 말에 이예주는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과거에 손목을 그었기 때문에 괴물에게 다친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히잡을 들어 제 팔뚝을 확인했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지 오래인 후드티의 소매 사이로 희멀건 한 살이 여실히 드러났다. 

팔뚝까지 우악스럽게 찢어져 피를 줄줄 흘렸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는 팔뚝은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조롱이 말처럼 남자가 치료해 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이예주는 침울한 얼굴로 이번에는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흉터가 꼭 용의 비늘 같기도 했다. 징그럽기 짝이 없다. 

혹시 몰라서 반대쪽 손을 들어 흉터를 더듬어 보았지만 천만다행으로 촉감은 다른 살과 별다를 바 없었다. 

시각적인 면만 대리석 같아 보이는 듯했다.

문득 연갈색 털을 지닌 사막 여우의 가슴팍에 자리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검은색의 빳빳한 털들이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정말 흉측한 털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흉측한 흔적이 제 몸에도 선명하게 남게 되었다.

“이게 뭐야. 더 이상해졌잖아…….”

이예주가 아이처럼 징징거리자 조롱이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일갈했다.

“주인님이 친히 주신 조각을 그렇게 별것 아닌 상처 치료하는 데 쓴 것도 예주 누나밖에 없을 거예여. 포니 기억 안 나여? 죽다 살아났잖아여.”

그건 그렇지. 그녀가 조롱이의 말에 군말 없이 수긍했다. 

모르긴 몰라도 검은 파편인지 뭔지 하는 돌조각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조롱이의 신비한 페어리니틀 약초보다 더.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 남자가 자신에게 딱딱한 무언가를 먹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뒤에 뭐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알았으면 이제 얼른 가여. 해 지기 전에 팔족 땅에 도착해야 한단 말이에여.” 

떠오를 듯 말듯 간밤의 실마리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예주가 조롱이의 재촉에 그것을 털어 냈다. 

조롱이가 빨리 따라오라는 듯 대충 손을 휘젓더니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너랑 나랑 둘이 사막을 어떻게 횡단해. 너 물 있어? 없지? 물도 없이 어떻게…….”

자신보다 작은 갈색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녀가 불퉁한 얼굴로 불평했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람이 있어도 괴물 때문에 죽다 살아난 참이다. 그런데 둘이 대체 어떻게 남은 사막을 헤쳐 건너냐, 이 말이다. 

그런 그녀의 삐죽거림에 조롱이가 걱정도 팔자라는 얼굴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예여. 사막은 다 건넜어여. 저기 봐여.”

얄팍한 조롱이의 팔이 먼 사막 능선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작렬하는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흐릿흐릿하기만 한 모래 능선을 바라보던 이예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롱이가 “다시 잘 봐 봐여.” 하고 채근했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아른아른한 무언가가 능선 너머에 나타났다. 

그것은 커다란 고층 건물이었다.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고층 건물이 도시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보이져? 이제 거의 다 온 것…….”

“빨리 가자!” 

우쭐해 하는 조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빠른 속도로 그를 지나쳐 걸었다. 

마치 삶의 의욕을 얻은 듯 힘찬 발걸음에, 멍청히 서서 말을 잃고 있던 조롱이가 황급히 뒤를 따르며 소리 질렀다.

“아, 진짜! 같이 가여!”

이예주는 사막의 끝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대체 이 죽일 놈의 사막을 언제 다 횡단하나 했더니, 드디어. 

드디어 과거로 돌아갈 실마리가 눈앞에 보였다. 

점점 도시의 형태가 잡힐수록 가슴이 방망이로 두드려 대듯 떨려 와서 종국에 그녀의 걸음은 거의 뛰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어휴, 천천히 좀 가여!”

이예주는 조롱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투덕거리며 남은 사막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 그녀를 환영하듯 사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건물들이 지긋지긋한 모래 능선 끝에서 음울한 기운을 잔뜩 내뿜으며 우뚝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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