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44)화 (44/319)

“……독 때문이 아니다.”

“에, 에?”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계집이기에 감히 내 힘을…….”

미간을 좁히며 시뻘건 눈을 빛내던 람은 그 순간, 검은 빛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예주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었다. 

독 때문에 그녀의 입술은 이제 보랏빛에 가까웠다.

“엄마를…… 엄마를 찾아서…….”

“……너.”

무섭도록 시린 빨간 눈이 그녀의 왼쪽 손목의 끝부터 반대편 끝까지 경계를 나누듯 쫙 그어져 있는 흉측한 흉터에 못 박혔다.

“다리족이 아니었군.”

“에엑? 그, 그럼…….”

“검은 안개를 거치지 않고서 이 몸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죽음이 몸을 반쯤 잠식한 상태라서 내 힘조차 들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인간 여자가 기척조차 내지 않고 사라질 때가 있었다. 

멸족 위기에 처한 다리족치곤 꽤 훌륭한 힘을 가진 인간이라고 내심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꺼진 이후로는 람의 힘조차 별수 없었다. 

꺼져 가는 생명을 되살릴 수는 있어도 이미 꺼진 생명을 살리는 것은 람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 여자의 몸은 이미 반쯤 죽은 상태였다.

“가끔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람이 이예주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읊조렸다. 

이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 여자는 제 손목을 그었을 것이다. 

그때 죽었어야 할 숨을, 무언가가 강제로 연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그럼 어떡해여, 주인님? 예주 누나 죽어여?”

황조롱이가 덜컥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제 주인과 인간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뻘건 눈동자를 스르륵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곳으로 가야겠군.”

피 냄새를 맡고 사방에서 삿된 것들이 음울한 소리를 내며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것이 들렸다. 

사막 한가운데는 위험했다. 

이토록 피를 내뿜으며 무방비하게 널브러져 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먹혀 버린다. 

그것이 인간이든 괴물이든…….

람은 히카톤의 독 때문에 흐늘거리는 이예주를 들쳐 안았다. 

그때까지 사경을 헤매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던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람의 시뻘건 눈에 고정되었다.

“……어린 것이.”

“…….”

“왜 죽으려 들었던 거지.”

그것을 끝으로 이예주는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듯 정신을 잃었다.

*       *       *

쪼륵, 쪼르륵. 

어디서 물 따르는 소리가 이예주의 신경을 건드렸다. 

청량하고 맑은 물소리는 그녀의 잠을 깨우듯 꽤 가까운 곳에서 연달아 울렸다. 

물비린내가 났다. 며칠간 사막에서 뒹굴며 메마르고 버석거려진 심신마저 시원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이예주는 맑은 물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몸 위에 바윗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으…… 으응…….”

아이처럼 그녀가 칭얼거렸다. 그러자 누군가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입 벌려.”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과 다르게 거부할 수 없을 만치 강압적인 명령이었다. 

이예주가 비몽사몽 무심결에 입을 작게 벌리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알약처럼 뭉툭하고 딱딱한 무언가가 쑥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꿀럭꿀럭 시원한 물이 밀려 들어왔다.

“삼켜.”

심장까지 저릿하게 울리는 낮은 저음이 다시 명령했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그녀가 그 명령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흐응…….”

이예주의 입에 쏟아부었던 물들이 피부를 타고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까지 친히 챙겨 주었건만 삼키진 못할망정 다시 모조리 뱉어 버리는 그녀의 꼴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후,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결에 그녀의 앞머리가 살랑 흔들렸다.

“입.”

벌리란 말도 하지 않았건만 이예주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런 그녀의 입을 부드러운 무언가가 삼키듯 덮었다. 

벌려진 이 사이로 미끄러지듯 매끄러운 덩어리가 불쑥 침범했다. 

그것을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조금씩 조금씩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예주가 물의 차가움에 몸서리치는 와중에 그녀의 입안을 한가득 메운 뭉클한 것이 무언가를 찾듯 입안 곳곳을 더듬거렸다. 

이내 방금 전 입에 넣어 둔 딱딱한 것을 찾아 그녀의 목구멍 쪽으로 자꾸만 밀어 넣었다.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매끄러운 덩어리를 쪽쪽 빨며 물을 꼴깍꼴깍 받아 마시던 이예주는 어느 순간 식도를 타고 딱딱한 것이 꿀떡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을 점령하고 있던 무언가가 잡을 새도 없이 쑤욱 빠져나갔다.

“꽤 아플 것이다.”

남자가 입가에서 작게 속삭였다. 이예주는 ‘흐응’ 하고 우는소리를 냈다. 

아픈 것은 싫다고 얘기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왼쪽 팔뚝이 타들어 가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통렬한 고통이 뇌를 엄습했다. 

그 엄청난 자극에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눈앞이 껌껌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 아파, 아파…….”

“쉬, 괜찮아. 곧 지나갈 거다.”

“흐흑…… 아파…… 아파요…….”

팔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강렬한 통증에 이예주가 사경을 헤매며 누군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껴안은 몸이 멈칫하고 굳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시원한 냄새가 났다. 

아까 맡았던 물비린내와 비슷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냄새가 물씬 풍겨 와 아픔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뇌리를 강타하는 고통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던 이예주 또한 천천히 고른 숨을 내쉬며 진정할 수 있었다. 

팔뚝의 아픔이 완전히 가셔서 얼얼함만 남겼을 때, 그녀는 메마른 목이 타서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물…… 물…….”

몇 시간 내내 고성방가라도 지른 것처럼 끔찍한 쇳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을 찾는 이예주의 목소리에 다시금 그녀의 입술 위를 순면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덮쳐 왔다. 

아까와 같은 뭉클한 덩어리를 타고 시원한 물줄기가 입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예주는 입안에 든 것을 있는 힘껏 빨아 꼴딱꼴딱 물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던 행위는 다행히도 그녀가 마음껏 물을 섭취한 후에야 끝이 났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려다가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꾹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하고 떨리더니 이예주의 두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였다.

“여기…… 여, 여기가 어디…….”

분명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있는 듯 정신이 멍했다. 

공중에 몸이 붕 떴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느낌이 반복되었고 귓가에 이명이 들리는 한편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아득하게 덮치는 현기증 때문에 이예주가 “아아…….” 하고 작게 신음하자 머리 위에서 그녀를 도와줬던 사람이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 주었다.

“아직 독기가 가시지 않아 어지러울 테니 누워 있어라.”

“안 돼…… 학교 가야 되는데…….”

“헛소리를 하는군.”

“마녀가…… 심리학 마녀가 F를…….”

남자의 말처럼 헛소리를 계속해서 연발하며 이예주가 스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깜깜한 밤이었다. 그러나 작은 호수가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주위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어디서 물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이예주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누군가는 호수 바로 근처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호수 주변에 야자수로 추정되는 나무 몇 그루가 정갈하게 자라 있었다. 

“……오아시스?”

혹시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이예주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기상천외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잔한 물 위로 날개 달린 요정 같은 것들이 등처럼 떠올라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반짝반짝 발광하고 있었다. 

마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이 예쁜 광경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술 마신 기억은 없는데 이상하게 술 취한 사람처럼 자꾸만 제멋대로 혀가 꼬였다.

“꿈이…… 개 같은 꿈이…….”

“…….”

“……교수님, 저 오늘은 지각 안 했어요…….”

“…….”

“그러니 재수강만은…… 어, 나비다.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호수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날개 달린 것들 중 하나가 포로록 하고 날개를 펼쳐 허공을 날아갔다. 

이예주는 그것을 쫓아가기 위해 남자의 품에서 끊임없이 바르작거렸다.

“제발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을 즈음,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상체가 남자의 손에 의해 발랑 뒤로 넘어갔다. 

이예주가 저를 넘긴 사람을 게슴츠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비 아저씨…… 어떤 멍청한 새끼가 제 음식물 쓰레기통을 자기 건 줄 알고 자꾸 가져간다고 했잖아요…….”

“완전히 정신 놨군.”

“어, 나비야! 나비야, 가지 마! 이리 와, 나비야!”

이후 이예주가 헛소리를 지껄이다 나비를 쫓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남자가 짜증스럽게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잡아 눕히는 것이 몇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나비에 대한 관심을 간신히 저를 잡아 눕히는 남자에게로 옮길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분명 남자가 억센 손길로 저를 몇 번이나 바닥에 메다꽂았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저는 얌전히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꾼 꿈이 이어지는 것만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정신없이 주변이 바뀌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참고 있듯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있는 시뻘건 눈동자 하나만은 변함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죽여, 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남자를 멍청하게 올려다보던 이예주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이제 보니 저를 안은 사람은 진짜 헉 소리 나게 잘생긴 남자였다. 

자신의 사주를 보고 온 엄마는 그녀의 인생에 남자는 상종 못할 인간들뿐일 테니 남자를 멀리하라 했다. 

이예주는 23년간 착실히 이행했다. 

사실 착실히 이행한 것은 아니었다. 사는 게 바빠 연애 같은 것은 돌아볼 틈조차 없었다. 

고로 이런 미남이 그녀의 사주팔자에 나타날 리가 없다, 이 말씀이다. 

이예주는 남자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녀의 음침한 눈초리에 남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삐쭉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이 익어서 이예주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보고만 있던 그녀가 남자의 얼굴에 대뜸 삿대질을 했다.

“이 눈깔! 나만 보면 막, 막! 시뻘게지고!”

“…….”

“그리고 동물들만 보면 다시 막 까매지고! 나 보면 다시 막, 막 시뻘게지고!”

“…….”

“이, 이…… 이 동물 성애자야!”

이예주의 삿대질이 정점을 찍었다.

“동물만 보면 좋아 가지고 막 눈깔 까매져서 흥분…… 웁!”

“집어 던지기 전에 입 닥쳐.”

남자가 떠벌 떠벌 대는 그녀의 주둥이를 한 손으로 거칠게 틀어막았다. 

입 닥치란 소리에는 살벌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읍! 읍!”

이예주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발언의 자유를 돌려받기 위해 고개를 흔들어 대었지만 입을 틀어막은 억센 손은 풀리지 않았다. 

발악하듯 움직여 대던 그녀가 제 풀에 지쳐 몸을 축 늘어뜨릴 때까지 그들의 주위는 잠시간 침묵에 잠길 수 있었다. 

그녀가 잠잠해지자 입에 얹어져 있던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흔들어 대는 도중에 남자의 손바닥에 쓸린 입술이 따끔거렸다. 

그녀가 손을 들어 아랫입술을 더듬어 만졌다. 손에 축축한 것이 묻어져 나왔다. 

그것을 바라본 이예주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피, 피!”

“…….”

“히잉, 피…… 피 나. 예주 피 나, 흐흑. 흐응, 흡…….”

“……하.”

남자가 정말 지친다는 듯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이예주의 손을 치우고 대신해서 그녀의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확실히 남자의 하얀 손가락 위로 입술이 터진 것치곤 꽤 많은 양의 액체들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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