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9)화 (39/319)

그보다 이예주가 더 놀란 것은 고작 해야 4, 5살, 많으면 6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무려 10살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10살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란 소린데. 

그렇지만 그것도 “신인류는 원래 인간 모습의 성장이 더뎌여.” 하고 뾰로퉁하게 덧붙이는 조롱이 덕에 납득이 갔다. 

‘동물이 그렇긴 하지.’ 하는 조롱이가 들으면 불을 뿜을 만한 일차원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렇구나. 두 번만에 변신에 거의 성공한 거면 대단한데? 너희 엄마가 보면 자랑스럽겠다.”

퍽 다정하게 구는 이예주의 언행에 조롱이가 옆에서 무어라 잔뜩 투덜댔다. 그러나 포니는 그렇지 않은 듯 감동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조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유도했다.

“저기, 그런데…… 엄마가 인간들에게 잡아먹히다니? 네 말로는 엄마가 인간들을 도와줬는데, 왜 인간들이 엄마를 잡아먹은 거야?”

그러나 아직은 이른 대화였던 듯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가 히끅 히끅 거리더니 눈두덩이에 물방울들을 매달았다. 

이에 당황한 이예주가 귀를 쓰다듬던 손을 재빨리 내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아이의 눈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마,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미안해.”

“흐, 흐으…….”

“그렇지만 네가 말해 주면 혹시라도 너처럼 위험에 처해 있는 다른 신인류를 구해 주는 게 조금 더 쉽지 않을까 싶은데. ……도와줄 수 없을까?”

“……이, 인간님이 어떻게요? 히, 힝, 인간님도 결국은 인간 편이잖아요.”

말을 고르느라 쩔쩔맨 그녀의 간절함을 배반하듯 아이의 눈물은 너무나도 쉽게 뚝뚝 떨어졌다. 

울음 새로 비치는 인간에 대한 미약한 원망에 이예주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렇다. 결국엔 그녀 또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고픔을 참지 못해 어린 생물을 산 채로 잡아먹는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너의 주인을 돕는 인간이니까.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너한테만 특별히 얘기해 주는 거야.”

이예주가 정말로 특급 비밀을 발설하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진심이었다. 만나지 않았다면 외면했겠지만, 이미 포니와 만난 이상 도울 수 있으면 최대한 돕고 싶었다. 

그것이 포니를 잡아먹었던 인간들과 다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라면 더더욱.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이해해 준 걸까. 인간이라는 이유로 경계심을 풀지 않던 포니가 이예주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에 마침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온기를 찾아 바싹 얼굴을 붙이는 행동이 영락없는 아이였다. 

여전히 애통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지만, 아까처럼 찢어지는 절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눈물을 그치며 사막 여우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막에 이제 ‘먹이’는 아무것도 없어요.”

“……응?”

“인간들이 먹을 수 있는 ‘먹이’요. 작은 벌레부터 시작해서 전갈, 혹은 뱀 같은 곤충들, 사막에서 사는 동물들이나 작은 풀조차 모두 인간들이 먹어 치운걸요. 다른 신인류들도 동물의 숲이나 다른 대륙으로 모두 떠나서 엄마와 우리 형제들이 마지막 신인류였어요.”

사막의 대표적인 식물인 선인장 한 줄기도 보지 못한 지난 하루 반나절이 떠올랐다. 모래 위에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위를 새로 덮는 모래뿐이었다. 

벌레라면 질색 팔색을 하는 이예주가 비명 하나 안 지르고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를 걸어온 것으로 보아 여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심각하게 여우의 말을 되새김질하는 사이, 아이가 이어서 말했다.

“엄마는 사막에 하나둘씩 모이는 인간들이 모두 약하고 몸이 불편해서 다른 인간들에게 버림받거나 쫓겨난 인간들이니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했어요. 아무리 주인님이 미워하는 인간들이더라도 힘없는 생명을 무조건 죽이는 것은 주인님의 지고하신 뜻에 반하게 되는 거라고요. 그래서 엄마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가끔 검은 파편 조각의 힘을 사용해서 물을 나눠 주고, 조금이나마 사막에서 사는 것을 편하게 만들어 주려고 여러 가지를 도와줬어요.” 

“물을 나눠 주고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네. 우리가 태어났을 적만 해도 버려진 인간들의 수는 많지 않았어요. 물은 적은 수의 인간들이 모두 마시기에 충분했거든요. 인간들은 엄마를 사막의 현자라고 부르며 받들어 모셨어요. 엄마는 몇 번이나 현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멋대로 엄마를 현자라고 불렀죠.”

“…….”

“그치만 그건 잘못된 거였어요!”

사막 여우가 돌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사막의 어떤 현자가 물을 펑펑 나눠 준다는 소문이 다른 대륙까지 돌아 사막에 유입하는 인간들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졌어요! 힘세고 강한 인간들이 마구마구 사막으로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사막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사막 주변의 숲과 늪지대마저 점령했어요! 사막은 점점 커져 가고 황폐해져 갔어요. 엄마는 변해 가는 사막을 보고 슬퍼했어요. 그래서 다시는 인간들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에 우리들의 굴로 들어와서 꽁꽁 숨어 버렸어요. 엄마가 처음에 도움을 줬던 불쌍한 인간들이 굴 밖으로 찾아와서 매일같이 빌었지만, 엄마는 절대 나가지 않기로 우리 형제들과 약속했어요.”

“…….”

“그런데 어느 날, 불쌍한 인간들 중 가장 늙은 인간이 굴에 찾아와서 엄마에게 어떤 씨앗을 주고 갔어요. 그 씨앗은 사막 밖의 인간들이 주인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작물을 개발한 것이라면서, 이것을 사막에 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니 제발 전처럼 물만 조금씩 내려 달라고 사정했어요. 엄마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늙은 인간이 울며불며 매달리는 통에 어쩔 수 없었지요. 게다가 그 늙은 인간은 ‘포니’라는 이름을 지어 준 제 인간 친구 데브로의 할아버지여서 엄마는 한 번 더 믿어 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인간들이 씨앗을 모래에 심기 시작하자, 엄마는 검은 파편의 조각을 이용해 다시 깊은 지하에서 물을 끌어 올려 나누어 줬어요. 한동안 재배로 인해 인간들도 잠잠해진 것 같았죠.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작물 재배는 실패했어요. 인간들의 생존을 돕는 어떠한 것도 주인님의 허락 없인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요. 엄마는 인간들에게 ‘포기’를 가르쳐 주기 위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물을 주었던 건데, 인간들은 납득하지 않았어요. 급기야 모든 화살을 물을 조금씩만 내려 준 엄마 탓으로 돌린 인간들이 건강한 인간들을 앞세워 우리 굴에 몰래 들어와 검은 파편의 조각을 훔쳐 갔어요.”

“…….”

“검은 파편의 조각을 되찾기 위해 엄마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인간 부락으로 갔지만…… 인간들은, 흑…… 인간들은 이미 엄마를 잡을 덫을 다 준비해 놓고…… 신인류를 잡아먹는 축제를 벌인다고 온 대륙의 인간들을 초대해 둔 상태였어요. 엄마랑 형제들은 인간 부락에서 결국…… 흐으…….”

끔찍했던 예전 일이 떠오른 건지 잠시 눈물을 멈춘 사막 여우의 커다란 눈에서 다시금 물방울들이 퐁퐁 쏟아져 나왔다. 

이예주는 말없이 부들부들 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포니는 한참을 더 그렇게 눈물을 쏟아 내더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가까스로 검은 파편의 조각을 찾은 포니만이 동물의 숲으로 도망치다가 덫에 걸려 아까의 험한 꼴을 당한 것이라고. 

제 바로 위의 형제를 잡아먹는 것에 오랜 인간 친구였던 데브로가 가장 앞서 달려가는 모습이 인간 부락에서 도망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이의 기다란 설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도움을 베풀었던 상대에게 통렬한 배신을 당한 아이였다. 

그토록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들에 대해서 대체 뭐라고 말을 해 줘야 될지 알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던 그녀를 위로한 건 오히려 사막 여우였다. 

훌쩍훌쩍 울던 아이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얼어붙은 이예주를 발견하곤 애써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그래도 주인님을 만나서 전 이렇게 살았으니 다행이에요! 전 정말 행운이 따르는 사막 여우인걸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모아 포니가 한 번 더 배꼽 인사를 했다. 

“너에겐 내 표식이 있어서 더 이상 사막에서 살 수 없다.”

그런 포니를 향해 람이 침착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가 사막 여우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펑!’ 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어느새 어린아이는 천을 뒤집어쓴 작은 사막 여우로 변해 있었다. 

얼굴과 등, 다리에 나 있는 털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의 털이 사막 여우의 목에서부터 배까지 부슬부슬 살랑거렸다. 

람은 사막 여우를 변신시킨 손가락으로 그 털을 가리켰다. 

포니는 제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털은 괜찮아요. 그것보단 주인님의 조각을 삼켜서 배 속에 숨겨 뒀는데, 잃어버린 것 같아요. 주인님, 죄송해요…….”

“조각은 널 되살리기 위해 이미 네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네 검은 털이 그 증거지. 넌 여전히 신인류겠지만, 검은 털 때문에 사막 여우로서의 자격은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의 어조는 냉정하고 무뚝뚝했지만 이예주는 보았다. 

그의 눈이 다시 검은색 동공으로 돌아가 그녀에겐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다정함을 띠고 있는 것을. 

그 모습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던 그녀의 호흡이 가팔라졌다. 

그에게서 차갑게 손이 내쳐지고 싸구려 동정을 내보이는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따끔거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물밀 듯 밀려오던 순간. 

“저는 사막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동물의 숲으로 가서 평생 인간들을 보지 않을 거예요.”

사막 여우가 삐죽 솟은 귀를 쫑긋거리며 이예주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씌워 준 검은 천이 작은 머리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천을 다시 돌려주려는 듯 포니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빨개졌어요.”

포니의 말처럼 이예주의 얼굴은 홍역에 걸린 아이처럼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에 노출된 피부가 그 짧은 새에 상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각하기가 무섭게 이마와 코 근처가 따끔따끔거렸다. 

아이의 처참한 과거사에 집중한 나머지, 피부가 지글지글 익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포니가 돌려주는 천을 거절했다.

“가지고 갔다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일이 생기면 써. 맨몸으로 다닐 순 없잖아.”

“저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 거예요. 이 모습이 훨씬 편하거든요. 그리고 저보단 인간님이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 사막에서 태어난 재빠른 사막 여우인걸요.”

“그래도…….”

“받아여, 예주 누나.”

끝내 망설이던 이예주를 조롱이가 재촉했다. 

“사막 여우는 인간보다 태양 빛에 강하다구여.” 

덧붙여지는 조롱이의 말에 그녀는 포니가 다시 돌려주는 검은 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저야말로요. 감사해요, 인간님…… 아니, 예주 누나가 제가 마지막으로 보는 인간이 되겠네요.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그녀임에도 사막 여우는 마지막에 그녀를 ‘예주 누나’라 칭하며 정답게 인사해 주었다. 

그녀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진창이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사막 여우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섯 번째 재빠른 사막 여우야.”

“나중에 또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예주의 대답에 사막 여우가 환히 웃었다. 

밤하늘처럼 빛나는 눈과 곱슬곱슬한 검은 털이 인상 깊은 작은 생물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뒤로 돌았다. 

사막 여우가 총총총 모래사막을 뛰어서 멀어져 갔다. 

그 씩씩한 뒷모습이 능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예주는 오래도록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인간 여자의 옆모습을 남자가 격랑이 가신 고요한 눈으로 주시했다. 

어느덧 시뻘건 눈동자에 들끓던 노기는 사라져 있었지만 포니를 배웅하느라 이예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그만 가여, 예주 누나.”

조롱이가 곁에 와서 뒤집어쓴 천 자락을 잡아당겼다. 

람은 이미 꽤 멀리 떨어져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앞에 어느새 황혼이 내려앉은 사막의 붉은 태양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       *       *

다섯 번째 재빠른 사막 여우 포니를 만난 후 이틀이 지났다. 

그러나 이틀만 더 가면 인간 부락이 나올 것이라는 조롱이의 말과는 다르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틀간 이예주는 눈에 띌 정도로 달라졌다. 

가끔 약 올리듯 소과를 쥐어 주며 깝죽대던 조롱이조차 힐끔힐끔 눈치를 볼 정도로 말이 없어지고 힘들다며 불평불만 하던 것도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고프다며 육포를 내놓으라고 패악을 부리는 것도 않고, 소과조차 조롱이가 챙겨 줄 때가 아니면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가끔 체력이 한계에 부딪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잠시 멈춰 서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껌껌해져 람이 길을 멈추고 노숙할 장소를 물색할 때까지 쉴 틈 없이 걸었다. 

이예주가 입을 꾹 다물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무리는 놀라울 정도로 적막에 휩싸였다.

“예주 누나, 소과 줄까여?”

“…….”

“예주 누나, 예주 누나? 예주 누나!”

“어, 어?”

히잡 쓴 얼굴을 푹 숙인 채 말없이 터벅터벅 걷던 그녀는 조롱이가 팔을 흔들자 화들짝 놀라 커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소과 주머니를 들고 있는 조롱이가 그런 이예주를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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