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8)화 (38/319)

어느덧 처참하기 그지없던 여우의 가슴팍과 배가 완전히 살가죽으로 덮였다. 

그 위로 잡초 자라듯 새로운 털이 쑥쑥 자라났다. 사막 여우의 얼굴과 같은 연갈색이 아니라 시꺼먼 색의 털이었다. 

꼭 람의 까만 머리통 같았다. 

남자가 일으키는 기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예주는 지금 제가 본 것이 살해 현장의 충격에서 비롯된 환영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그러다 끝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사막 여우의 재생은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처럼 기이하면서도 신비롭고, 또 무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도 모자라 눈 깜짝할 새에 본모습으로 재생시키다니. 

사막 여우의 털이 완전히 자란 후에도 한참을 더 손에서 검푸른 빛을 쏟아 내는 남자.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귀신을 보는 느낌으로 변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예주는 생각했다. 

벌레 죽이듯 생명을 쉽게 죽이고 또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생명을 쉽게 되살리는 이 남자, 정말로 신인지 신의 아이인지 뭔지가 분명하다고. 

사막 여우를 재생시키던 정체 모를 검푸른 빛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까만 털로 뒤덮이게 된 부분을 마지막으로 빛이 완전히 흡수되었다. 

람은 사막 여우의 이마 위에서 빛을 내뿜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사막 여우의 눈꺼풀이 반짝 떠졌다.

“……주인님.”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빛처럼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사막 여우가 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깜찍한 모습에 이예주는 방금 전까지 남자의 엄청난 행위에 혀를 내두르던 것도 잊고 홀리듯 여우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잔인하게 내장이 파헤쳐져 죽어 가던 사막 여우는 꿈인 것처럼, 작고 귀여운 생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에 휩싸였다. 

덕분에 여우로부터 꽤 가까이 있던 이예주는 매케한 연기를 옴팡 뒤집어쓰고 콜록콜록, 거칠게 기침 세례를 했다. 

그녀의 기침 소리가 멎을 때쯤, 연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막 여우의 길쭉한 귀를 단 네다섯 살의 작고 귀여운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꼭 사막 여우의 털처럼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앙증맞게 곱슬거렸다.

그 고만고만한 것이 람을 보고 벌떡 일어나려다 덫에 걸린 발목 때문에 ‘앗!’ 하고 쓰러질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 아이를 감싸 안을 뻔했다. 

“히잉…….”

덫에 깊숙이 물린 제 발을 보고 잠시 울상을 짓던 아이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아랫배에 모아 람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이예주는 아이가 꼭 저한테 인사하는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뙤약볕에 드러난 아이의 알몸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벌거벗은 아이의 보들보들한 피부 위로 쨍쨍한 태양이 내리쬐었다. 

그녀는 혹여나 애기의 피부가 상할까 봐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인지 아무도 아이가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인류는 이 뜨거운 태양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아이가 명랑하게 말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이의 고운 미성에 이예주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아가.” 하고 중얼거리다가 조롱이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사막 여우도 귀여워 쓰다듬을 판에, 그 사막 여우가 눈을 반짝이는 귀여운 아이가 되다니! 

그 외향에 반해 우쭈쭈 거리고 있는 그녀와는 다르게 남자와 조롱이의 표정은 굉장히 진중하고 무거웠다. 

제 무릎에도 못 미치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는 람의 눈이 꽤 냉정했다. 

차가운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던 이예주는 곧 그의 눈동자를 확인하고 안심했다. 

남자의 눈은 어느새 까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 뇌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의 빨간색 눈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의 시뻘건 눈에는 이예주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건 간에 그녀를 향한 살기와 혐오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 눈은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 하나 없는 밋밋한 그 눈이 외려 다정하기까지 해 보였다. 

그것은 이예주에게 굉장히 기묘하고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불만스럽고 화가 나는데, 딱히 화낼 건덕지가 없는 그런…….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하고 있는 남자가 입을 뗐다. 

“내가 네 주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치곤 꽤 거창한 질문임에도 사막 여우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막힘없이 대답했다.

“엄마는 재빠른 사막 여우예요. 검은 파편의 조각으로 저희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주인님의 기척을 알아차리도록 훈련시켰어요.”

여우의 말에 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빠른 사막 여우면 초기 신인류 중 하나군.”

그러더니 손을 뻗어 그때까지도 아이의 발목을 죄고 있던 덫을 툭 건드렸다. 

덜컥하고 거짓말처럼 덫이 입을 벌렸다. 

“황조롱이.”

“네, 주인님!”

람이 부르자 이예주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조롱이가 잽싸게 부름에 응답하며 아이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조롱이는 품에서 전에 그녀를 치료했던 페어리니틀 주머니를 꺼내 아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람이 몸을 일으키며 다시 아이에게 입을 열었다.

“인간들의 도구로 생긴 흉터는 완전히 본래대로 재생할 수 없다. 평생 가지고 있어야 하지.”

람이 사막 여우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인간으로 미처 변신하지 못한 것인지 아이의 가슴팍에 짐승의 검은색 털들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연갈색 머리칼의 귀여운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꼼짝없이 뜯어 먹혀 죽을 줄 알았는데…….”

“새끼를 위험에 내팽개치고 네 어미란 놈은 대체 어디 간 거지?”

람의 날카로운 질문에 이번에는 우물쭈물하더니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작은 목소리로 “그게, 그게…….” 하던 아이의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결국 아이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울린 건 람인데도 되려 이예주가 더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울린 당사자는 물론이고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 조롱이조차 나서지 않자 그녀가 먼저 나설 수가 없었다. 

훌쩍이던 아이가 울음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눈을 들어 다시 람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두 눈에 투명한 물이 그득그득 쌓여 반짝거렸다. 

“엄마는…… 흐, 흐윽, 엄마는 인간들에게 잡아먹혔어요.”

“…….”

“엄마는, 엄마는, 우리에게 인간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항상 가르쳤는데…… 인간들이, 인간들이 엄마를 잡아먹었어요……!”

“…….”

“……나머지 형제들도 다 잡아먹혔어요.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은 저에게 북쪽 대륙 동물의 숲으로 가서 검은 파편의 조각을 숨기라고 했는데…… 더, 덫에 걸려 버렸어요, 주인님. 주인님, 흐으 흑.”

아이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었기에 이 작은 아이의 몸으로 삶의 무게에 짓눌린 것 같은 피 맺힌 절규를 내뱉는 걸까. 

아이의 찢어지는 울음소리는 절규 그 자체였다.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울컥 치솟는 감정들을 애써 억눌렀다.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같잖은 동정심 따위가 아닌, 엄마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심이었다. 

실제로 엄마를 잃은 자신에게 아무도 주지 못했던. 

그래서 그녀를 결핍된 인간 낙오자로 만들어 버렸던.

“……저기, 햇볕이 따갑지 않아?”

어두운 감정을 표정에서 몰아낸 이예주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로 둔갑한 여우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아이가 히끅거리며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예주는 재빨리 머리에 걸치고 있던 자신의 천을 벗어 아이의 맨몸 위에 씌워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와는 달리 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피부가 뙤약볕에 금방 벌겋게 익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넌 이름이 뭐야?”

“어, 어…… 포, 포니인데…….”

아이가 그녀의 물음에 머뭇머뭇하며 몸을 움츠렸다. 

아직 인간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충격과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해 보였다. 

이예주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이라도 쓰다듬어 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의 결 좋은 연갈색 곱슬머리에 닿기도 전에 찰싹, 그녀의 손이 차갑게 내쳐졌다. 

다름 아닌 람에 의해서. 

“건들지 마라.”

이예주가 놀라서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람이 어느덧 시퍼런 살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 사막 여우를 뜯어 먹던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의 까만 눈동자가 가장자리부터 붉은 기운을 띄더니 순식간에 새빨간 색으로 변모해 그녀를 향한 적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겁에 질린 것이 네 눈엔 보이지 않는 건가.”

남자의 말에 이예주가 사막 여우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녀의 손을 피해 한껏 목을 움츠린 모양새인 아이가 보였다.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의 송곳 같은 독설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너희 인간들은 저보다 약한 것들을 보면 싸구려 창녀보다도 더 쉽게 동정심을 내비치더군. 그래 봤자 동정이 곧 지배욕으로 변하는 것은 한 끗 차이가 아니더냐. 쓰레기 같은 것들.”

살기 어린 시선으로 한마디씩 내뱉는 남자의 말에 이예주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왜, 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베일 것 같은 시선 아래 그녀는 입술을 쉬이 떼지 못하고 달싹거리기만을 반복했다. 

이예주는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차갑게 나를 밀어내느냐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느냐고, 왜.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눈동자를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렸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치료를 다 끝낸 조롱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예주와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를 시도했다.

“예, 예주 누나, 잠깐 이리로…….”

“저, 저기! 저기, 아니에요! 저, 저 겁 안 먹었어요!”

그때 조롱이의 말을 막고 사막 여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소리에 놀란 세 쌍의 눈동자가 휙 하고 자신을 향하자 잠시 부끄러운 듯 사랑스럽게 볼을 붉히던 아이는 이예주가 제 위에 덮어 준 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인간 여자님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차, 착하신 것 같은데…….”

“…….”

“아, 저…… 제 이름은 다섯 번째 재빠른 사막 여우…… 아, 아니! 포니예요. 인간 친구였던 데브로가 지어 줬어요. 저기, 어, 인간 여자님은 그러니까…… 주인님을 도와주는 인간이신 거죠?”

“예주 누나는 인간 여자라는 말 싫어해.”

이예주의 답을 가로챈 조롱이가 불쑥 끼어들어 대신 답했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헉! 저, 정말요? 그, 그럼 인간 여자님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예주 누나는 예주 누나야. 나이는 20에서 어…… 세 개 더 많은 나이인데, 나이도 어리면서 누나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이상한 인간…… 아악!”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조롱이가 제 뒤통수를 부여잡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포니의 눈에 그 뒤에서 꽉 쥔 주먹을 휘휘 돌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악, 진짜! 왜 때려여!”

“이상한 인간? 죽고 싶지, 응?”

“그건! 아니에여…… 저, 절대 이상한 인간 아니에여…….”

번뜩이는 그녀의 눈빛에 뭐라고 항의하려던 조롱이가 잠자코 고개를 수그렸다. 

깔끔하게 나뉜 승패에 개운한 표정을 지은 이예주가 그때껏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번갈아 보던 포니를 향해 돌아섰다.

“대, 대단해! 인간 여자님은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정말 좋은 분인가 봐요! 황조롱이 신인류와도 굉장히 친한 거 보니 주인님을 돕는 인간이 맞는 거죠? 그쵸?” 

이미 확신에 찬 얼굴로 동조를 강요하는 포니에게 그녀는 대답 대신 행동했다. 

천 사이로 삐죽 솟아 있는 사막 여우 귀를 손가락으로 닿을 듯 말 듯 툭 치며 허락을 구했다. 

“만져 봐도 돼?”

작은 접촉도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아이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이예주는 다시 차갑게 내쳐질 것이 무서워 황급히 등 뒤로 손을 숨겼다.

본인보다 한참이나 작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사막 여우는 굳었던 몸을 조금씩 풀었다. 

그러고는 한껏 위축되어 있는 그녀가 넋이 나갈 만큼 맑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여 주었다. 

그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털의 결을 따라 귀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예주 또한 덩달아 조금 유해진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넌 몇 살이야? 4살? 5살? 조롱이는 인간으로 잘 변하던데, 넌 귀는 그대로네? 네가 다섯 번째 재빠른 사막 여우인지 다 알겠다.”

“4살이라뇨? 전 벌써 10살이나 먹은걸요!”

신중하게 포니란 이름을 피해 말한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아이는 전혀 다른 부분을 강하게 부정했다. 

오히려 이예주가 놀랄 만한 대답이었다.

“10살? 네가?”

“그럼요! 그래서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도 이번이 꼭 두 번째예요. 첫 번째는 쫓기다 덫에 걸려서 변신을 다 못했어요…….”

아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듯 털어놓았다. 

그녀는 여우의 말에 아까 처음 보았던 사막 여우의 몸에 인간 다리만 달린 모습을 떠올리곤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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