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5)화 (35/319)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네 옆에 있을 때쯤에 너에게 가르쳐 줄게.”

검은 파편은 시간의 말에 다시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고 인내했다. 

곧 인간들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날이 올 것이리라. 그러면 이 공허함과 외로움도 사라지겠지. 

하지만 인간들은 계속해서 시간을 찾았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하나같이 여신의 특혜를 받지 못해 안달이 났고, 그것은 곧 갈등으로 치달았다.

여신을 차지하기 위한 대전쟁이 일어났다. 

검은 파편이 힘을 쏟은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땅은 황폐해졌고 그 위는 진득한 피로 뒤덮였다. 

인간들은 서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살을 가르고 목을 베었다. 

오로지 종족의 적들에게만 향했던 날카로운 칼날이 이제는 그들 서로를 향하게 된 것이다. 

시간을 찾는 사람들은 폭주했다. 덕분에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검은 파편은 다시 멀어지려는 시간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고 인내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파멸하고 있었고 생명체의 파멸은 검은 파편의 몸체 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를 놓아줘, 검은 파편아.”

“내 옆에서 감정을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나를 찾는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단다.”

“너는 네 할 일을 충분히 했어. 이제 인간들을 그만 돌보아도 된다.”

“그렇지만 저 가엾은 아이들을 봐. 저토록 불쌍한 이들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주렴.”

“관대함? 나는 그딴 것 몰라. 네가 나에게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그러나 검은 파편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시간은 그를 내버려 둔 채 인간들에게 달려갔다. 

간신히 그녀를 붙잡았던 검은 파편은 허무하게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       *       *

인간들의 전쟁은 인간만의 피해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 도중 식량이 부족해진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들을 사냥했고 불을 지필 새도 없이 산 채로 뜯어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면 또 다른 인간들에게 습격받아 죽었고, 그들의 피가 강을 이뤄 대지에 사는 또 다른 생물들을 죽였다. 인간들로 말미암아 검은 파편의 생명체들이 죽어 갔다. 

검은 파편의 몸체가 조금씩 병들어 가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위해 몸체 곳곳에 심어 놓은 힘도 소용없었다. 

검은 파편은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는 시간을 보며 자신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그만.”

검은 파편은 몸체가 망가지길 원하지 않았다. 

검은 안개에 숨겨 놓았던 커다란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시간을 가질 자격이 없다. 그것은 내 힘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뿜어져 나온 에너지가 인간 세상에 속속들이 박혀 있던 검은 파편의 힘을 빨아들였다. 

그 옛적, 검은 파편이 다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때와 엇비슷한 에너지가 몸체 위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가 넘실대며 인간들을 덮쳤고 그가 내린 따스한 바람과 풍요로운 토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황폐한 토지와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 그들을 향해 몰아치는 바다의 시커먼 아가리뿐이었다. 

오랫동안 인간들이 일궈 놓았던 터전이 눈 깜빡하는 사이 얼어붙었다. 

대재앙과도 같은 빙하기가 시작된 것이다. 

검은 파편은 힘을 빨아들이기 위해 광활한 에너지를 펼쳤기 때문에 금방 지쳤다. 

그러나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시간을 붙잡았다. 

검은 파편의 권능 아래 태어나지 않은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붙잡혔다.

“이제 내 곁에 있어. 인간들 말고 날 구원해 다오.”

“검은 파편아. 네가 있어 인간들이 있을 진대, 내가 어떻게 너를 구원하겠니?”

“감정을 가르쳐 줘. 내게 인격을 만들어 줘.”

그녀는 추위에 덜덜 떨며 죽어 가는 인간들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을 사랑하다 보면 너 또한 자연히 인격이 생길 거야.”

“그러니 그것을 네가 가르쳐 주면 될 것 아니냐.”

그때였다. 

검은 파편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시간의 다리를 한 인간이 잡은 것은. 

그는 시간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전쟁을 일으킨 한 일족의 우두머리였다.

“여신님, 여신님! 우리 일족을 구원해 주세요!”

광기 어린 인간이 엄청난 악력으로 시간을 잡아당겼다. 

검은 파편은 하마터면 시간을 놓칠 뻔했다. 

검은 파편이 다시 힘을 끌어모아 시간을 다잡았을 때 우두둑하고 뼈와 살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시뻘건 피가 솟구쳤고 시간의 다리를 잡아당긴 인간의 손에 뜯긴 다리가 쥐어졌다.

“여, 여신의 다리다!”

추위와 배고픔에 굶주린 인간이 시간의 다리를 들고 게걸스럽게 그것을 뜯어 먹었다. 

그가 뼈까지 우둑우둑 씹어서 시간의 다리를 먹어 치웠을 때 그들 일족은 시간을 넘나들 정도로 빠른 다리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검은 파편은 많은 힘을 썼기 때문에 피곤하고 지쳤지만 서둘러 시간을 데리고 인간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남은 힘을 그러모았다.

그때였다. 

검은 파편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시간의 팔을 또 다른 인간이 잡아챈 것은. 

“여신님, 여신님! 우리 일족을 구원해 주세요!”

그 또한 시간의 선물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었고 한 일족의 우두머리였다. 

피 냄새를 맡은 인간은 방금 전의 인간보다 더 큰 악력으로 시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두둑하고 또 한 번 뼈와 살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시뻘건 피가 솟구쳤고 시간의 팔을 잡아당긴 인간의 손에 뜯긴 두 팔이 쥐어져 있었다.

“여신의 팔이다!”

그는 마치 그것을 목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허겁지겁 시간의 팔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우둑우둑, 그는 순식간에 두 팔을 먹어 치웠다. 

그들 일족은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멈출 수 있는 팔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검은 파편은 이제 더 이상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끌어모았다. 

서둘러 시간을 데리고 인간들에게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였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시간의 머리채를 마지막 남은 인간이 덥석 잡아챈 것은.

“여신님, 여신님! 우리 일족도 구원해 주세요!”

그는 시간의 선물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전쟁 중에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조차 잔인하리만치 몰살한 일족의 우두머리였다. 

그 역시 추위와 배고픔에 굶주려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모른다는 듯 안광을 형형히 빛냈다. 

핏빛이 도는 탐욕과 광기가 눈에서 번들거렸다.

“여신님, 당신은 인간을 구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엄청난 악력이 시간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지치고 힘이 없던 검은 파편은 시간의 머리통을 허무하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만둬!”

검은 파편이 거세게 소리쳤으나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시간의 긴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빨아 먹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다 먹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인간은 이빨로 시간의 머리카락을 잡아 끊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아름다운 왼쪽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내었다. 

그러곤 그것을 아이가 사탕 먹듯 쪽쪽 빨아 삼켰다. 

그들 일족은 오랜 세월을 길러 왔던 살랑거리는 시간의 머리카락만큼 과거를 볼 수 있는 왼쪽 눈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의 얼굴에 남은 오른쪽 눈이 황망히 그녀를 바라보는 검은 파편에게 향했다. 

검은 파편은 몹시도 지친 목소리로 시간의 오른쪽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나 얼마 안 가 인간의 손에 시간의 오른쪽 눈마저 뽑혔다. 

시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간을 얼렀다.

“오른쪽 눈은 검은 파편을 위해 남겨 두렴, 아이야.”

하지만 인간은 광기 어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여신의 말에 싸늘히 대꾸했다.

“여신님, 당신은 인간을 구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가 시간의 오른쪽 눈알을 먹기 위해 입을 쩍 벌리자 검은 파편이 분노에 찬 바람으로 인간의 손을 잡아챘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인지 인간의 손을 찢어발길 수는 없었다. 

대신 인간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의 오른쪽 눈알이 또르르 검은 안개 근처까지 굴러 왔다. 

허겁지겁 그것을 쫓아 달려오던 인간이 꾸물거리는 검은 안개를 보고 멈춰 섰다. 

시간만이 볼 수 있던 검은 안개가, 시간의 눈을 먹어 치운 인간에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이 헤벌쭉 웃으며 검은 안개에 쌓인 검은 파편을 손가락질했다.

“거, 검은 파편이다! 여신이 말했던 검은 파편! 저것을 먹으면! 저것을 먹으면 신이 될 것이야!”

광기에 젖은 인간이 검은 안개를 향해 순식간에 달려왔다. 

검은 파편은 자신을 알아본 인간 때문에 당황하다가 곧 검은 안개를 쥐어뜯어서 미친 듯이 입에 욱여넣는 인간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질렸다. 

인간은 배부름 따윈 모른다는 듯 검은 안개를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안개는 빠른 속도로 인간의 입속으로 사라졌고, 가려져 있던 검은 파편이 점점 드러났다. 

“검은 파편! 검은 파편!”

인간이 검은 파편의 한 치 앞까지 다가왔다. 

탐욕에 가득 찬 손이 검은 파편에 닿기 직전, 검은 파편은 고작 한 줌 남은 검은 안개를 타고 간신히 몸체 가장 깊숙한 곳으로 숨을 수 있었다. 

인간의 배 속으로 모두 들어간 검은 안개는 먹어도 먹어도 끊임없이 만족을 모르는 욕심이 되어 그들 일족의 몸속에 들러붙었다. 

가까스로 몸체 깊숙한 곳에 숨은 검은 파편은 힘을 회복한다고 해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움직이게 해 줄 검은 안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곁에 있어 준다던 시간은 죽었다. 검은 파편의 권능 아래 태어나지 않아 그 기척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인간들에게 먹혀 버리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시간을 위해 인간들에게 헌신했지만 돌아온 대가는 참혹했다. 

게다가 검은 안개조차 인간에게 빼앗겼다. 

시간도 검은 안개도 모두 인간에게.

검은 파편은 울부짖었다.

—내가 다시 지상으로 끌어 올려질 적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발겨 주마…… 

까마득한 잠에 빠져들며 검은 파편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시간이 가르쳐 준 인간의 감정은 없었다. 

결국 검은 파편 홀로 인간을 겪으며 깨달은 분노와 증오만이 그에게 남겨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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