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검은 파편
우주.
그 무한한 공간에서 에너지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무서운 굉음을 울리며 터진 에너지들은 튕겨 나가 또 다른 에너지와 맞닿아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것은 무(無)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응집된 파편들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 별, 행성, 혹은 운석이 되기도 하고 다른 에너지가 뿜는 힘의 소용돌이에 흡수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그것은 검은 안개를 지닌 검은 파편도 마찬가지였다.
폭발에서 튕겨 나온 검은 파편은 다른 에너지에 휩쓸려 무(無)로 되돌아갈 뻔한 위험을 수도 없이 겪은 후, 마침내 태양에너지에 끌려 들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열에너지를 가진 태양은 주위의 어떤 폭발에도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게 빛났다.
검은 파편은 더 이상 에너지의 연쇄 폭발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태양과 같이 자신을 지탱해 줄 몸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파편은 검은 안개 또한 자신의 주위에 잘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한한 공간을 헤매고 다닌 탓에 몹시도 지쳤지만, 몸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검은 파편은 별이고 운석이고 심지어 지나가는 에너지조차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들을 빨아 삼켰다.
파편 주위로 검은색의 딱딱한 구가 형성되었다.
곧 구는 검은 안개까지 감쌀 만큼 커졌고, 점차 거대해졌다.
더 이상 주위에 아무것도 빨아들일 것이 없을 때쯤에서야 검은 파편은 자신이 또 다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검은 파편이 빨아들인 기체들은 뭉치고 뭉쳐 대기를 형성했고, 수분은 구의 절반을 덮는 바다를 이루었다.
온전히 삼키기 힘든 딱딱한 별과 운석들은 검은 파편의 힘에 다져져 대지가 되었다.
검은 파편은 자신이 새로 가진 근사한 몸체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몸을 움직이려다 이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것에 급급해 거대한 몸체가 생기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검은 파편은 무척이나 피곤했다.
때문에 몸체인 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다.
검은 파편이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은 몸체 구석구석이 근질근질 거려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난 후였다.
눈을 뜬 검은 파편은 자신의 몸체를 확인하기 위해 몸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검은 파편은 검은 안개 속으로 숨었을 때야만 비로소 검은 안개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움직임은 고작 자신의 거대해진 몸체 내로 한정되었고, 검은 파편은 더 이상 광활한 우주를 누빌 수 없게 되었다.
검은 파편은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검은 안개 속에 들끓는 에너지를 숨겼을 뿐이다.
검은 파편은 몸을 간질이는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검은 안개를 타고 몸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신이 잠든 사이, 몸 위에서 자라난 것들을 보고 아주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 위에서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생명체들이 태어나 검은 파편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검은 파편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자연스레 그의 몸체에 적응하여 진화를 거듭 반복해 성장해 나가는 상태였다.
검은 파편은 검은 안개 깊숙한 곳까지 담뿍 느껴지는 생명의 기척들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관찰했다.
검은 파편은 크기가 가장 크고 거대한 생명들이 금방 다른 생명들을 빨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파편을 낳은 에너지들의 폭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큰 에너지가 그보다 작은 에너지를 잡아먹고 그보다 더 큰 에너지가 그 에너지를 잡아먹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곳이 바로 우주, 검은 파편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검은 파편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장 빠르고 가장 많은 진화를 거듭한 건 작은 털북숭이 종족이었다.
그들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가장 빠르게 번식했고,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날 때부터 무리 생활을 했다.
물론 다른 생명체들 또한 금방 무리를 짓고 서로를 의지해 살아갔지만, 그들은 그중에서도 남다르게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다른 거대한 생명체들에 비해 한없이 작고 약했지만, 종족 보존을 위한 싸움에서는 누구보다 월등했다.
그들의 무리는 그 어떤 종족보다 다양하고 영리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머쥐며 자신들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싸움에서 진 적은 돌 혹은 나무로 잔인하게 내려쳐 반드시 목을 베었다.
달랑거리는 목과 사냥감을 들고 제 무리로 돌아가면, 무리는 목과 뼈만을 남긴 채 사냥감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것은 비단 배고픔을 채우는 생존 수단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을 먹음으로써 힘을 습득했고, 그것에서부터 자신감과 우월감을 성취했다.
다른 에너지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엄청난 힘을 소모하여 몸체를 키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종족을 보존하는 그들을 관찰하며 검은 파편은 순수하게 경탄했다.
그들은 강했다.
적의 공격을 받는 것뿐 아니라, 검은 파편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 일어난 파도나 대륙의 흔들림에도 쉽게 목숨을 잃었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굳게 일어나 자신들의 터전을 가다듬었다.
검은 파편이 정신없이 그들을 관찰하는 동안 그들은 어느덧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몸집이 큰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시시 때때로 적을 사냥해 먹이로 삼았다.
때로는 저들끼리 무엇인가를 즐기듯 생명체를 죽이며 축제를 열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적의 머리를 무리로 가져와 보관하지 않았다.
대신 베어 온 적의 머리를 바다에 던지거나, 땅에 조심히 묻는 행위를 반복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언가를 간절하게 외쳤다.
그들이 정확히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을 때쯤에야 검은 파편은 그 행위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그들 종족의 보존이 위험해 처할 때마다 검은 파편에게 싸움에서 쟁취한 전리품을 바치는 행위였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정확한 언어로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 *
검은 파편은 고독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몇 번이나 생명체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제가 입을 여는 순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거나 땅이 쩍쩍 갈라졌기 때문이다.
모여 있던 생명체들은 검은 파편의 말을 알아들을 새도 없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검은 파편은 다시 외로움에 갇혔다. 자신의 몸체 위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 중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검은 파편은 인간 주위를 맴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유일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들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순수하고 역동적이었다.
비록 그들이 바로 옆에 있는 검은 파편을 알아보지 못할지언정 자신은 그들을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은 정말로 소리 소문 없이 태어나 검은 파편에게로 다가왔다.
“멋진 안개를 가지고 있구나.”
검은 파편은 깜짝 놀라 대꾸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여성은 앳된 소녀 같기도,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친 늙은 여성 같기도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러니 인간은 아니었다. 몸체 위에 있는 생물체 중 검은 파편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체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아주 작고 움직임이 없는 새싹조차 강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검은 파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녀에게선 생명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넌 누구지?”
검은 파편은 혹여나 자신의 목소리에 실린 힘 때문에 상대방이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따스한 웃음소리가 검은 파편에게로 다가왔다.
“난 시간이야.”
“시간?”
“그래.”
“너에겐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내 권능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로구나.”
검은 파편이 의아함을 한껏 담아 대꾸했지만 시간에게서 부드러운 웃음은 거둬지지 않았다.
“난 인간들의 염원으로 태어났어.”
“……염원?”
“인간들은 모두 지나간 이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염원하고 기원해. 어떤 이들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어떤 이들은 앞으로 태어날 이들을 기대하고 있지. 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나에겐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지?”
“그건 네 힘을 나눠야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야.”
검은 파편은 시간의 말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지만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검은 파편에게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자신을 ‘시간’이라 지칭한 그녀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란 사실뿐이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선 검은 파편, 네 힘이 필요해.”
“내 힘?”
“그래. 네가 몸체의 주인이니, 너만이 도와줄 수 있어.”
“그들을 구원하면 넌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데?”
“무엇이든.”
“그래, 좋아. 그들을 구원해 준 후에 넌 내 옆에 있어야 해.”
시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빠른 몸놀림으로 검은 파편에게로 등을 돌려 인간들 속으로 섞였다.
그녀는 어떤 인간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을 주기도 했고, 어떤 인간에게는 주었던 시간을 빼앗기도 했다.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변화하며 시간은 인간 세상에 속속히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아귀 아래에서 인간들은 무리를 형성하고, 무리끼리 모여 부족을, 부족끼리 모여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형성했다.
시간은 종종 검은 파편에게 힘을 부탁했고 검은 파편은 그녀의 말에 따라 풍요로운 토지와 수많은 수중 생물들을 실은 바다를 인간들에게 선뜻 내주었다.
어쩔 때는 시간의 주의 아래 아주 오랫동안 몸체를 움직이지 않고 숨죽여 있어야 했다.
인간들은 아늑하고 편안한 자신의 무리에서 행복하게 살아갔다.
시간은 그들이 평안해지는 때에만 잠깐잠깐 찾아와 검은 파편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모두 네 덕이란다. 고마워.”
“이젠 내 옆에 있는 건가?”
“아니. 아직 내가 필요한 인간들이 존재해.”
검은 파편은 서운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곧 시간이 제 옆에 있어 주리라. 그러면 이 공허함과 외로움도 사라지겠지.
안정된 인간들은 형체가 있는 시간을 어느덧 ‘여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한 사원을 건립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꺾어 그녀에게 바쳤다. 또 그녀에게 매일 기도했다.
검은 파편은 시간이 인간을 구원해 주면 이 모든 일이 잠잠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쉴 틈 없이 그녀를 찾았고 그 덕에 검은 파편도 덩달아 쉴 틈 없이 바빠졌다.
시간의 부탁에 검은 파편이 토닥토닥 땅을 두드렸다.
그러자 쩍쩍 갈라진 땅이 순식간에 윤기가 흐르고 곡식들이 넘쳐 자라났다.
또 검은 파편은 따스한 입김을 후 하고 불어 추운 지방의 인간들을 감싸 주기도 했으며 성난 파도를 살살 쓰다듬어 바다 근처에 사는 인간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인간들이 사는 곳마다 검은 파편의 힘이 배어 들어갔다.
생명체들에게 깊이 에너지를 방출한 적이 없던 검은 파편은 금세 지쳐 갔지만 그의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은 언제나 시간과의 부드러운 대화였다.
인간들의 우두머리들은 매년 시간을 위해 아주 커다란 축제를 열었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축제에 어울렸으나 검은 파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신님, 여신님. 아름다운 여신님. 당신 덕에 우리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인간들이 목소리를 모아 시간을 찬양하자 그녀는 검은 파편에겐 보여 주지 않았던 환한 웃음을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나뿐 아니라 검은 파편에게도 감사히 여기렴.”
시간은 언제나 인간들에게 검은 파편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파편의 힘보단 눈에 보이는 시간이란 상징에 더 의존했다.
어쩌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작용했던 검은 파편의 힘조차 시간의 것이라 믿고 있을지도 몰랐다.
축제가 끝나자 시간이 검은 파편에게로 돌아왔다.
“이제 내 옆에 있는 건가?”
검은 파편이 묻자 시간이 예전과 같이 답했다.
“아니. 아직 내가 필요한 인간들이 존재해.”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저들을 보렴, 검은 파편아.”
시간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간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수많은 감정을 내보이며 하루를 살아간단다. 이제야 인격을 갖춘 저들을 어떻게 돌보지 않을 수 있니?”
“감정? 인격? 그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