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3)화 (33/319)

“아니, 글쎄 나는 휴대폰 말곤……!”

“스읍― 더 이상 어리광은 안 통한다. 인간 마을에 도착하면 당과도 사 줄 테니 그만 떼써. 이무기에게 잡아먹히고 싶은 건가? 죽는 게 소원이라면 돌산까지 데려다주지.”

“…….”

이무기라는 그 뱀 대가리를 들먹이며 협박까지 하자 이예주는 끅끅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더 이상의 눈물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 손으로 닦아 냈다. 

눈물을 흡수라도 하는 건지, 신기하게도 남자의 손이 닿는 족족 물기가 사라지고 건조해졌다. 

그렇게 억세게 그녀의 얼굴을 훑던 남자는 결국 이예주가 “아프니까 그만해요!” 하고 날 선 소리를 지른 후에야 손을 뗐다.

“늦었으니 서둘러 따라와라.”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휘적휘적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이예주는 벌건 눈으로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손안에서 덜그럭거리는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씨잉…… 이게 뭐야!”

남자가 손에 고이 쥐여 준 것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휴지처럼 와작 구겨졌다. 손 한가운데 든 것은 엄지 손톱만 한 까만 돌멩이었다. 

돌멩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표면이 매끄러웠다. 

언뜻 보면 조각난 사기그릇의 파편같이 날카로운 면도 있었지만, 까만 결정에는 어떠한 무늬도 찾아볼 수 없었다. 판매되는 예쁘장한 수석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무성한 나무와 풀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가져 봤자 짐만 되는 돌멩이인 것을!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이런 걸…….”

“히엑!”

그때, 검은 돌멩이를 바라보며 잔뜩 투덜거리던 이예주의 곁으로 다가온 조롱이가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가 휙 돌아보자, 조롱이가 휘둥그레진 얼굴로 까만 돌이 놓인 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이거 검은 파편의 조각이잖아여!”

“뭐? 그게 뭔데?”

“으구으구, 그것도 몰라여? 대체 아는 게 뭐예여? 주인님의 본체인 검은 파편이여! 그것에서 쪼개져 나온 조각이잖아여!”

“그래서? 그래봤자 돌멩이잖아.”

돌멩이 따위를 경외심을 잔뜩 담아 바라보는 조롱이를 보며 이예주가 뚱하니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을 숲으로 내던지기 위해 휙 손을 들던 차였다. 

조롱이가 기겁을 하고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헉! 그거 던질 거면 나 줘여!”

“왜? 싫어.”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난 아직 구경도 못해 본 거란 말이에여!”

조롱이가 환장을 하고 매달리자 그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왠지 다른 이가 귀한 거라니 던지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휴대폰을 넣어 놨던 뒷주머니에 돌을 대충 쑤셔 넣자 조롱이가 꽥꽥 돼지 멱따는 소리를 했다.

“소중히 다뤄여! 진짜 주인님은 왜 이런 무식한 인간한테 그런 귀한 걸 다 주시고…….”

“뭐? 무식? 죽고 싶냐!”

“헉. 아니, 아니에여. 무식이라녀, 잘못들었겠져.”

“그러고 보니 너…….”

조롱이를 바라보는 이예주의 눈이 불현듯 가느다래졌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갈색 머리 소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네 주인한테 잘도 휴대폰에 대해 일러바치셨겠다…….”

“흐익! 그, 그것이 그, 그게 아니라여…….”

“내 휴대폰이 네놈 때문에……! 이리 와, 이 자식! 오늘이 네 제삿날일 줄 알아!”

“아아악! 왜, 왜 이래여! 말로……!”

이예주가 험상궂은 얼굴로 조롱이에게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자 조롱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퍼드득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리 안 와!”

“주, 주인님! 아, 악마가 쫓아와여, 주인님!”

“죽어, 너!”

조롱이가 전속력을 다해 제 주인에게로 뛰었다. 그 뒤를 이예주가 흉포한 콧김을 쉭쉭 내뿜으며 바싹 쫓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환히 빛났던 ‘문’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녀가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에 조롱이에게 뛰어가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문’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       *       *

“……이, 이게 뭐야…….”

이예주는 휑하게 펼쳐진 앞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조롱이에게서 남자가 가는 서쪽과 제가 가는 서쪽이 동일함을 듣고 속히 서쪽 대륙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던 그녀였다. 

서쪽 대륙에 세기말 용암 폭발 이전부터 산, 제가 살던 시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노인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도 더 이 미친 곳에 머물기 싫다는 마음이 저질 체력을 무찌르고 장장 하루를 꼬박 쉬지 않고 걷게 만들었다. 

다리가 아프고 발바닥이 쓰라려 죽을 것 같았지만 내색도 않고 묵묵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뭐긴 뭐예여, 사막이지.”

한발 늦게 옆으로 다가온 조롱이가 그녀의 혼잣말에 심드렁히 답했다. 

그렇다. 간신히 숲을 빠져나왔다 싶더니, 제 앞에는 황량한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숲을 다 빠져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숲과 사막의 경계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이예주의 몸은 아직 숲에, 풀 더미 위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바로 모래 바닥인 것이다. 

숲의 끝이 바로 사막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그녀였다. 

“대체 무슨 이딴 곳이 다 있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사막이 있는 것까지야 이해가 된다. 

그래, 서쪽으로 가려면 사막을 넘어야 하는 것도 어찌어찌 이해하겠다. 그런데 어떻게 숲의 끝이 바로 사막이란 말인가. 

숲의 끝에 도달하는 동안 사막으로 이어지는 풍경에는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나무가 숲의 중앙에 비해 말랐다든지, 풀이 죽어 있다든지, 발에 모래가 버석거린다든지 등등. 

숲은 계속해서 숲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거대한 나무와 무성한 녹지는 사막이 나올 때까지 계속 존재했다. 

그리고 누군가 마치 경계선 하나 쭉 그어 놓고 모래를 뿌려 놓은 것처럼 느닷없이 사막이 시작되었다. 

사막 옆에 숲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지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풀과 모래의 그 선명한 경계선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마음 깊이 차오르는 위화감에 그것을 넘어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멍하니 숲과 사막을 번갈아 보던 그녀의 몸이 강제로 휙 돌려졌다. 그것도 모자라 부드러운 천이 이예주의 얼굴을 꽁꽁 감싸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사막에서는 숲과 달리 인간들이 태양 빛을 견딜 수 없다.”

람이었다. 남자가 제 손으로 기다란 천을 들고 이예주를 아랍 여자처럼 둘둘 싸매고 있었다. 

검은 천이 몸에 휘감기자 확실히 서늘했던 숲의 중앙과는 달리 공기가 후덥지근해졌다. 더위에 약한 그녀가 울상을 하고 항의했다.

“더운데요.”

“참아.”

그러나 본격적인 항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예주의 주장은 바로 묵살되었다. 

남자는 단 한 점의 빛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눈만 빼놓고 온 얼굴을 꽁꽁 싸맸다.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벗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벗지 마라.”

“그치만…….”

“그만.”

소심한 마지막 반항마저 잘리자 이예주가 입술을 삐죽였다. 검은 천에 가려 안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의 빨간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주인님 말 들어여. 제가 그거 가지러 가려고 숲 동쪽까지 얼마나 힘들게 날아갔다 왔는데여.”

그들 사이에 조롱이가 불쑥 끼어들며 장알댔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조롱이를 돌아보자, 그 시선이 만족스러운 듯 조롱이가 에헴, 거드름을 피웠다.

“예주 누나 하나 때문에 동쪽까지 갔다 왔다구여. 사막이 얼마나 위험한데여! 그건 보호 주술까지 걸려 있는 거라 일반 것에 비해 훨씬 비싼 거라구여! 그러니까 저한테 고마워해야…….”

“닥쳐.”

이예주가 사납게 일갈했다.

“이런다고 내가 풀릴 것 같아? 네가 나한테 했던 짓을 생각하면……!”

휴대폰을 뺏긴 생각만 하면 조롱이의 뼈도 씹어 먹을 것 같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긴 아는지 조롱이가 움찔하고 이예주의 사나운 눈길을 피했다. 

“황조롱이의 말이 맞다. 사막은 숲보다 더 위험하니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

“대답.”

대답 없이 입을 삐죽이는 이예주를 귀신같이 알아챈 남자가 채근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심통 난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요!” 

남자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그녀의 얼굴을 꽉 조이던 천을 뒤로 마저 묶고 자유를 하사했다.

“가자.”

람이 짧게 명령했다. 그 뒤로 조롱이가 의기양양하게 따라붙었다. 

어휴, 저 얄미운 자식! 

조롱이를 향해 눈을 힘껏 부라리던 이예주는, 벌써 모래 위를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남자를 보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사막에 발을 들이밀려니 왠지 모르게 영 발길이 떼지지 않았다. 

아마도 남자의 말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지긋지긋한 숲속보다 더 위험한 곳이라니, 또 얼마나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날까.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고 염통이 다 쫄깃해지는 기분에 그녀가 장난치듯 신발을 모래 위로 붙였다 떼는 것을 반복할 때쯤이었다.

“빨리 와라.”

자신 따윈 따라오든 말든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갈 줄 알았던 남자가 어느새 도로 돌아와 그녀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우뚝 서 있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남자의 하얀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저 남자는 이 터번 같은 것 안 써도 상관없는 건가. 

출발하는 것 대신 딴생각을 하고 있는 이예주에게 점점 짜증이 나는지 남자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이리 와.”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가기 싫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전혀 통하지 않는 듯 남자가 다시 한 번 짧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두 번은 없다는 듯 남자의 눈이 시뻘겋게 빛나자 그녀가 “가요, 가!” 하고 서둘러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아직도 가슴 한편에 서늘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지만, 가기 싫다고 뻗대도 소용없었다. 

곁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남자가 불쑥 그녀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울상을 지으며 뒤에 있는 숲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숲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고개를 떼고 앞서 가는 남자를 보았다. 

숲이나 사막이나 남자에겐 별 차이 없어 보여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또한 왠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조롱이를 보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끔찍한 경험이란 경험은 숲에서 다 하고 왔는데,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게 뭐 있으랴. 

일어난다 하더라도 눈 딱 감고 오늘처럼 남자의 도움을 바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암, 설마 죽기야 할까. 

그렇게 결론 내린 이예주의 얼굴은 어느덧 개선장군처럼 어떤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막을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녀를 흘끗 돌아보았다. 

숲과 달리 모래가 발에 푹푹 파이는 사막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인간 여자는 그가 저를 빤히 응시하는 줄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어!”

모래를 마구 발로 차 대며 걷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하는 것을, 잡은 손목에 힘을 줘 용케 세워 뒀다. 

그러자 인간 여자가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질반질한 동공이 지금껏 보아 왔던 다른 인간들과는 판이했다. 

인간을 박멸하는 천적에게 손목이 붙들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본능적인 혐오감도 없는 말간 얼굴이었다.

“휴, 넘어질 뻔했네. 고마워요.”

놀란 얼굴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얼마 안 가 헤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신중하게 발을 놀렸다.

그런 인간 여자의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람은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부여잡은 손목은 그의 손아귀에 비해 매우 가늘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똑 부러질 정도로 작고 어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발칙한 계집은 제가 두렵지 않은 것인가.

제 손목을 세게 부여잡고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 얄팍한 목숨을 고스란히 내맡긴 인간 여자의 모습은 참.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신선했고, 그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으헉!”

또다시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이예주를 람이 붙잡았다. 

멋쩍게 미소 짓는 그 얼굴에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보폭을 늦춰 그녀에게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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